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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작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480
한자 浦作人
영어음역 pojagin
영어의미역 fisherme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제주에서 전복과 물고기 등을 주로 잡아서 진상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

[개설]

예부터 제주의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종류가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산물의 채취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혹은 포작)과 잠녀를 특별히 두어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관련기록]

1443년(세종 25)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기건(奇虔) 목사는 포작인과 잠녀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는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전복을 밥상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17세기 초에 김상헌이 쓴 『남사록』에는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데다, 관리들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포작인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다. 때문에 제주 여자들은 포작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사록』에 의하면 수탈에 견디다 못한 제주 포작인들이 육지로 빠져나갔음을 보여준다.

[내용]

포작인은 진상용뿐만 아니라 관아에서 쓰는 물품까지 담당하였다. 관아에서는 이들의 장부를 마련하여 1년에 포작인은 20필, 잠녀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하였다. 따라서 포작인과 잠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제주에서는 이를 고역으로 인식하여, 6고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포작인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조선 초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현상이 빈번하였다. 더구나 여자가 많은 현상 속에서도 제주 여인들에게 ‘홀로 살지언정 포작인의 아내는 되지 않겠다’는 말이 나돌던 것을 보면 포작인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1738년(영조 14)에 평역미를 설치하여 포작인의 역을 경감시키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헌종 9년에 포작역을 맡기던 역을 다른 곳에서 대행하는 조치가 마련되었지만, 포작인들은 관아 선박의 사공으로 차출되는 등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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