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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595
한자 强忍-濟州女人海女
영어음역 Ganginhan Jeju Yeoin Haenyeo
영어의미역 Women Divers
이칭/별칭 수,녀,수,잠수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좌혜경

[개설]

해안가에서 기계 장치 없이 나잠업으로 미역·천초 등의 해초와 소라·전복·해삼·문어 등을 캐면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해녀라고 한다. 아직도 제주도 전역에 5,000명이나 되는 해녀가 특이한 나잠수 작업으로 생업을 영위하고 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바다에서의 물질 작업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한다고 표현할 만큼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을 해내는 여인들이었다. 또한 근대 일본 어선들이 출어하여 제주 어장을 황폐화시키자 일본·중국·러시아 등지로 출가(出家) 물질을 하면서 경제 활동을 계속하던, 강인한 제주 여인들이었다.

[문헌 기록에 나타난 해녀]

『삼국사기』 503년(문자왕 13)조에 있는 ‘가즉섭라소산(珂則涉羅所産)’의 가(珂)는 제주의 진주 혹은 패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를 채취한다는 것은, 단시간에 잠수하여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채취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사』 1079년(문종 33)조에는 채취한 진주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탐라의 구당사(勾當使) 윤응균(尹應均)이 큰 진주 두 개를 바쳤는데, 별처럼 빛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야명주(夜明珠)라 했다고 한다. 또 『고려사』 1276년(충렬왕 2)조에는 원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阿室迷里)를 파견하여 제주의 진주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이 해 가을에 제주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진주 100개를 탈취하여 원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 1489년(성종 20)조에는 “신이 듣건대 연해에 와서 사는 제주인, 본래는 농업을 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고기를 잡아 자금을 만들고 그래서 여러 읍의 수령들은 복작우 혹은 포작간(鰒作于)...”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복작우가 어업에 전업하면서 전복을 따던 남성들이라면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정의현감이 기록한 『남천록(南遷錄)』(1679)에는 “포작인의 수가 대단히 많아서 족히 진상에 응할 수 있었고 경신년(1620)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복을 따던 남성들이었던 포작인이 여성들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유교 이데올로기의 확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제주 방언 ‘보재기’는 일반적으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이면서 전복을 따는 사람을 뜻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주목의 토공 품목으로 나타나는 전복(全鮑)·인복(引鮑)·추복(搥鮑)·조복(條鮑)·곤포(昆布) 등은 바로 해녀와 포작인들의 작업으로 캐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李健)『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는 제주 잠녀가 미역을 캐는 기록이 있다. “해산(海産)에는 생복(生鰒)·오적어(烏賊魚)·분곽(粉藿)·옥두어(玉頭魚) 등이 있다. (중략) 곽(藿)을 채취하는 여자를 잠녀라고 한다. 2월부터 5월에 이르기 이전에 바다에 들어가서 곽(藿)을 채취한다. 잠녀는 적신노체(赤身露體)로 바다에 가득하고 호미를 가지고 바다 밑까지 가서 미역을 채취하여 나온다. 남녀 서로가 섞여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중략) 생복(生鰒)을 채취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1694년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지영록(知瀛錄)』에서는 해녀들의 고충이 기록되어 있다. “미역을 캐는 잠녀가 많게는 8백 명에 이르는데 물 속에 들어가 깊은 곳에서 미역을 캐는 것은 채복녀(採鰒女)나 다름없다. 익숙하지 못하다고 핑계대어 위험한 것을 피하려고만 한다. 잠녀들의 괴로움은 현격하게 다르다.

장차 전복 잡는 사람이 없을까 염려해서 또한 균역(均役)하고자 하여 전복잡이를 익히도록 권장하고 미역 잠녀에게 추인복(搥引鰒)을 나누어 정해 주었다. 종전에 한 잠녀가 함께 힘을 합치면 매달 각자에게서 받는 전복이 한두 개에 지나지 않다가 일년을 하더니 익숙해졌다. 전복잡이 100여 명에게 준비하여 바치도록 하고는 추인복을 봉하여 진상하였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은 “섬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 “관에 잠녀안(潛女案)이 있는데 진상하는 전복은 모두 잠녀에게 책임지운다”라고 하고 있다. 1843년(헌종 9)부터는 포작인이 부담한 진상역은 예리처(禮吏處)가 대행하게 되고, 관아용은 민간에서 구입하게 되면서 전복 진상은 사라졌다.

[해녀들의 물질 작업]

구좌읍에서 해녀들은 30일 중 15일은 물에 들어가서 작업을 한다. 보통 물질은 15일 간격으로 12물에서 6물까지 7~8일은 입어를 하는데, 한 달에 두 번 이루어지므로 15일이 되는 셈이다. 15일 간격으로 바닷물의 간조를 헤아리는 것을 ‘물찌’라고 한다. 물찌는 음력으로 세어 초아흐레와 스무나흘이 한물이 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헤아려서 12물, 조금, 한조금, 게마슴, 한물, 두물, 서물, 너물, 다섯물, 여섯물 등으로 정한다.

전복과 소라와 오분자기 등을 잡는 헛무레는 한조금에서 일곱물까지 작업을 한다. 미역이나 천초 역시 두세물에 시작해서 여섯물 혹은 일곱물까지 작업을 한다. 물질을 할 수 있는 물찌에는 파도가 너무 거세거나 날씨가 궂지 않으면 대부분 작업에 임한다. 물찌에서 ‘조금’은 세물에서 다섯물인데, 물이 좋고 물 아래가 맑으면 ‘암조금’이고 물알이 어두우면 ‘숫조금’이다. 물때가 일곱물, 여덟물이 되어 물이 거칠어지면 ‘웨살’이라고 한다.

해녀의 물질 작업은 무리를 지어 공동으로 진행된다. 해산물 채취를 막기 위해 입어를 금하다가 해경(解警: 허치·허채·문)을 하면 주민 누구나 물질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녀 수가 제한되고 해녀회와 어촌계가 생긴 후로는 비록 해경을 하더라도 해녀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녀들은 공동으로 그 어장을 관리하고 감독한다. 해녀가 입어할 수 있는 구역은 정해져 있고, 입어와 작업 시기는 해산물 종류에 따라 정해진다.

해녀들은 보통 오전 9시쯤에 입어를 해서 오후 네 시나 다섯 시가 되어서 나온다. 두 시가 지나면 힘에 부친 해녀들이 먼저 나오는데, 채취물은 망시리에 가득 담겨있다. 남정네들은 지게를 이용해 망시리를 공동 판매대로 운반하여 아내의 힘든 노동을 도와준다.

소라·전복·해삼·성게를 잡는 헛무레는 여름 산란기에는 금어(禁漁) 하다가 음력 10월에서 3월까지 작업을 한다. 4월에서 6월까지는 천초와 닭고달이라고 하는 고장초를 채취한다. 미역은 5월 늦게 작업한다. 그러면 6월 말부터 10월까지는 농사철이어서 한 달에 세 번 정도 천초 작업을 한다. 전복은 음력 8월이 산란기여서 8월과 9월에는 금채(禁採)한다.

천초는 우미라고도 하며 수심 5m에서 자란다. 감태는 7월에 작업하며, 넙미역은 남자들이 배를 이동하면서 채취한다. 특히 금했던 미역을 작업하도록 허락한 미역 허채(미역 해경)가 이루어지는 날은 바다에 수많은 테왁이 떠 있고 망시리에 가득 담아온 미역을 남정네들이 운반하여 갯가에 널어놓아 햇볕에 말렸다고 한다. 당시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은 육지부에 반출되어 돌미역이라고 해서 제 값을 받았는데, 양식 미역이 보급되면서 이제는 거의 채취하지 않는다.

해녀들은 물질 나가기 전날 밤의 꿈을 통해 다음 날 작업을 예견한다. 상을 당해서 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사람을 꿈에서 보거나 떡을 먹는 꿈을 꾸거나 돼지꿈을 꾸면, 그 날은 전복을 뗀다는 의식이 있다. 또 물질 나갈 때 만난 사람에 따라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재수가 좋다’라는 것은 해산물을 많이 캐거나 특히 크나큰 전복을 하나 떼는 일을 의미한다. 또한 전복을 떼면 침을 뱉거나 혀로 핥아서 그 전복에 전복이 잇달아 붙어달라고 기원한다.

[해녀들의 바다 밭 관리]

바다는 해녀들의 밭이다. 해녀들은 바다에 들어가면 어디에 어떠한 바위와 어장이 있고 어느 곳에 전복이 많이 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딸은 어머니 해녀에게서 그 밭을 익혀 물질 작업을 잘하는 상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해녀들의 밭 다툼은 자주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행원리 해녀들의 밭은 월정과의 경계가 속칭 ‘지풍개’이고 한동과의 경계는 ‘더뱅이물’로 되어 있어 인근 마을에 비해 바다 밭이 엄청나게 넓은 편이다. 또한 해산물이 풍부하여 행원리 해녀들은 자신들의 바다가 어느 바다보다도 생산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행원리 바다 밭의 이름은 다양하고 재미있다. 주로 물과 여(섬), 덕, 코지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는 물에 잠긴 바위인데, 밀물 때는 보이지 않지만 썰물 때만 나타나는 일종의 바닷속 섬이다. 생김새에 따라서 사람이 등을 굽힌 것과 같다 하여 ‘등 굽은여’, 넙적하고 편편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너븐여’, 물새들이 날아와서 새끼를 친다고 해서 ‘오저여’, 연자방아처럼 넙적하게 생겼다고 하여 ‘방앳여’로 부른다. 코지 역시 육지에서 바닷 쪽으로 길게 뻗쳐 있고, 물위에 나타나 보이는 바위다.

소유 어장은 자신들의 밭이므로 어장 청소와 해초에 나있는 잡초인 바당풀을 제거한다. 일 년에 두세 번 치르는 어장 청소를 ‘개딲이’라 하는데, 이 작업은 모든 어촌계 회원들에게 주어지는 의무이다. 만일 빠지면 벌금을 내며, 보통 하루 임금 정도이다. 근간에는 20,000원 정도로 책정하고 있고, 회원 모두가 참석하여 공동으로 작업에 임하도록 한다.

[해녀들이 쓰는 물질 도구]

과거 해녀가 물질 작업 때에 입는 옷은 물소중기(물소중의·물속곳)이었다. 물소중기는 겨울에 너무 추워서 30분 내지 2시간 작업을 한 후에는 불 턱에서 불을 쬐고 다시 물질 작업을 했다. 그러나 1975년경부터는 검은 고무옷과 오리발을 착용하고 작업에 임했다. 해녀들이 사용하는 물질 도구들을 살펴보자.

① 빗창: 빗창은 전복을 뗄 때 사용하는 30센티 정도의 날카로운 철제 도구이다. 이 빗창에 노란 녹이 슬어 있으면 그 날은 재수가 좋아 전복을 뗄 수 있다고 여긴다. 빗창이 무디면 개날[戌日]에 대장간에 가서 갈고 온다.

② 테왁: 햇빛에 잘 익은 박을 타서 꼭지를 피해 구멍을 낸다. 거꾸로 매달아 두세 달 두면 물이 마르고 속이 비어 씨만 따로 떼어져서 나온다. 대막대로 씨를 파내어서 속을 텅 비게 한 후 구멍 낸 부분을 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는다. 막을 때에는 고무신을 녹여서 고무풀로 사용했다. 이를 ‘콕테왁’이라고도 한다.

③ 정게호미: 모자반이나 톳 또는 미역을 벨 때 쓰는 낫 모양의 호미이다. ‘게호미’라고도 한다.

④ 망시리: 망시리·망아리라고도 하며 억새풀의 속껍질로 그물 모양으로 짠다. 채취한 해산물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⑤ 조락: 오분작을 떼어 담는 작은 망사리이다.

⑥ 작살: 소살이라고도 하며 물고기를 잡을 때 쓴다.

⑦ 골각지: 호멩이라고도 하며 오분자기나 성게나 문어를 채취할 때 쓴다. 긴 것은 문어를 잡을 때, 짧고 날카롭게 된 것은 오분자기를 잡을 때 쓴다. 김을 맬 때 사용하는 호미(골갱이)와 비슷하다.

⑧ 질구덕: 물질 기구와 채취한 해산물을 넣고 다니는 대바구니이다. 일반적으로 제주도 여자들은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⑨ 수경: 바다 밑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는 안경인데 ‘족세눈’이라는 소형 쌍안경을 사용하다 1960년대부터는 ‘왕눈’의 둥근 대형 단안경으로 바뀌었다. 신엄에서 만든 눈을 ‘엄쟁이 눈’이라고 하고 행원리 옆마을 한동에서 만든 것을 ‘궷눈’이라고 한다.

⑩ 연철: 고무옷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다는 무거운 납덩이이다. 나이가 들수록 연철의 무게는 많게 하여야 한다.

[제주 해녀의 출가 물질]

출가(出稼)는 해녀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물질하는 것을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나가 물질 작업을 하는 것이다. 제주 해녀들은 근대를 거치면서 육지부 혹은 외국까지 출가 물질을 하게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로 출어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초부터 일본의 잠수기 어선 137척이 전복을 200관씩이나 한꺼번에 채취해갔다. 잠수기 어업은 잠수복을 착용하고 공기를 배급받으면서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물질을 할 수 있어 어장은 곧 황폐화됐다. 1885년 당시 조선인의 전복 채취는 일본 잠수기 어선의 1/10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해녀가 물에 들어가서 채취하는 양은 잠수기 어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잠수기 어업으로 제주 일대의 어장이 황폐화되자 1895년부터 해녀들은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을 떠났다. 이후 해녀들의 출가 물질은 활발해졌으며 그 범위도 상당히 넓었다. 경상도, 강원도, 다도해, 함경도 등 육지부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따오와 따리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출가 물질을 나갔다.

특히 외국 출가 물질 중에서 일본 출가 물질은 아주 극성스러웠다. 제주 해녀의 일본 출가 물질은 1903년 미야께지마[三宅島]를 시작으로, 주로 미에껜[三重縣]에서 이루어졌다. 미에껜 해녀들이 조선으로 출가했으나 제주 해녀에 비해 일의 능률이 떨어져서 오히려 제주 해녀들을 수입해가기에 이르렀다. 일본 해녀의 조선 출가가 제주 해녀가 일본으로 출가 물질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32년에 일본에 출가한 제주 해녀 수는 1천 6백 명에 이르고 있다.

해녀의 출가 물질은 1895년을 기점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1895~1945년 동안 해녀들은 뛰어난 물질 역량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한반도나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1945~1960년대는 이민이 제한되어 밀항이라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합법적 이민도 있지만 여전히 불법적 체류 방식도 있다.

[해녀들의 신앙과 영등굿]

해녀들은 목숨을 걸고서 물질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들의 신앙은 진지하고 강렬하다. 그녀들은 바다에서의 물질 작업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한다고 여기는데, 그만큼 물질 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해녀들은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의례를 치르게 된다.

해녀들이 공동으로 치루는 집단 의례로는 영등굿이 있다. 개인 의례로는 음력 정초에 ‘할망당’에 가서 빌거나 바다에서 용왕에게 비는 ‘지드림’을 행한다. 대부분의 어촌에서는 어촌계를 중심으로 영등굿을 한다. 영등굿에는 어부와 해녀들이 함께 참여하며, 거의 음력 2월 1일에서 2월 15일 기간에 행해진다.

영등굿은 해녀회 주관이기는 하면서도 바다를 밭으로 살아가는 어부들도 동참한다. 그 해의 풍어를 기원하고 관(官)과 주민이 모두 어우러져서 축제의 향연을 베푸는 것이다. 영등굿의 주된 신은 영등신으로 ‘영등할망’인 여신이다. 영등할망은 강남 천자국 또는 외눈배기섬에서 왔다가 되돌아가는 신으로, 해녀들의 물질이나 어부의 어로 활동의 안전, 해산물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다.

‘지드림’은 영등굿이 끝난 때이거나 새해가 되어 처음 물질을 시작할 때 밥이나 쌀을 종이로 싼 후 실로 묶어서 바다에 던지는 것을 말한다. 지드림은 요왕신에게 그리고 바다에서 죽은 영혼에게 바치는 조그마한 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구좌읍 동김녕리와 안덕면 사계리는 ‘잠수굿’이라는 의례를 치루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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