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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449
한자 倭寇
영어음역 waegu
영어의미역 Japanese pirat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전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옛 일본 해적.

[개설]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인 해적을 총칭한다. 흔히 고려 후기까지의 왜구를 전기 왜구, 그 이후의 왜구를 후기 왜구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기 왜구가 우리나라를 주요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면, 후기 왜구는 약탈의 대상지가 중국과 동남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후기 왜구는 일본인 왜구뿐만 아니라, 중국인·포르투갈인 등을 포괄하여 국제적 성격을 지녔다. 특히 제주 지역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왜구들은 제주도를 그들의 거점 지역으로 삼으려고 빈번하게 침입해 왔다.

[왜구와 관련한 역사적 기록]

왜구의 제주 지역 침범 기록을 보면,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가 추자도에 침입하였고, 1350년(충정왕 2)에는 정의에 침입하였으며, 1352년(공민왕 1)에는 우포(지금의 용수리)에 침입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는 대촌(지금의 제주시)에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왜적선 600여 척이 제주도를 침입하자, 성주 고신걸이 방어하였다. 1377년(우왕 3) 6월에도 왜적선 200여 척이 제주를 침범하였다.

1433년(세종 15) 윤 8월에 대정 사람인 김석이 등 7명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전라도 해진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에 서여서도에서 왜구를 만났다. 진금은 살해당하고 다른 이들은 의복 등을 약탈당하였는데, 때마침 순시하던 전라도 수군에 의하여 구제되었다.

이 보고를 접한 제주안무사 김인이 진무 박원의 등을 시켜 여러 섬을 수색하던 중, 추자도 남방 해상에서 왜구 중선 1척을 발견하였다. 이때 사방으로 공격하여 11명을 사살하였고, 나머지 14명이 투항하자 각 고을에 나누어 감금하였다.

또 1433년(세종 15) 6월 제주 관청의 배 1척이 서여서도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적선 2척이 나타나서 26명을 죽이고 남녀 7명을 납치하였으며 쌀 100석과 면포 1,000필을 약탈하고 달아났다.

또 같은 시기에 왜적선 1척이 대정현을 침범하였는데, 대정현감 강순이 분전하여 그중 2명을 사살하자 적선이 도주하다가 파선되었다. 이에 왜구 49명을 생포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왜구에 대한 대비책]

제주 지역에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면서 제주 방어에 대한 새로운 방안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후기 봉수제의 설치나, 1408년(태종 8)에 10척의 병선을 제주도에 주둔시킨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관방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는 1439년(세종 21)에 이루어졌다. 당시 관방 시설 정비 이전의 방어 시설 및 병력은 제주읍성 수어소, 좌우소, 독소의 마병·보병이 1,329명, 대정현성 수어소, 좌우소, 독소의 마병·보명이 407명, 정의현성 수어소, 좌우소, 독소의 마병·보명이 483명이었다.

그리고 김령방어소(153명), 조천관방어소(103명), 도근천방어소(144명), 애월방어소(144명), 명월방어소(192명), 차귀방어소(75명), 동해방어소(56명), 서귀방어소(124명), 수산방어소(175명) 등 9개의 방어소가 설치되었다.

봉수는 제주목에 10개소, 대정현에 5개소, 정의현에 7개소가 있었으며, 매 봉수마다 봉군 5명이 배치되었다. 연대의 수 및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높이와 너비가 각각 약 3m로, 후망인은 병기·기·각을 이용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하였다.

[왜구와 싸운 제주목사의 행적]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은 기존의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 외에 제주방에 대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수산방어소, 서귀방어소에는 성곽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응하고, 둘째, 왜선이 정박할 염려가 있는 21곳에 공·사 노비 및 각 소속 정군, 봉족 등 잡색 군인을 50~100여 명씩 나누어 번갈아 방어하도록 하였다.

셋째, 공사의 선박을 이용하여 5~6척을 1대로 편성하여 매 1척에 도졸 4명, 호공 1명, 사관 2명을 두어 수군을 강화하고, 넷째, 삼읍에 역참을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1년씩 서로 돌아가면서 번을 서게 하여 마병을 강화시켰다.

한편 봉수 시설도 김녕에서 판포 사이에 10개소, 차귀에서 거옥 사이에 5개소, 정의현에서 지말산 사이에 7개소를 설치하였다. 봉수대는 산 위에, 연대는 해안가에 설치하였다. 제주도 내 9진과 25봉수대, 38연대는 그 후에 정비된 것이다.

한편 일본은 아사카가 막부가 쇠퇴하면서 중앙 통제력이 약해져 왜구들의 침입은 더욱 잦고 치열해졌다. 1552년(명종 7) 5월에는 정의현 천미포에 침입하여 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이때 김충렬 제주목사와 정의현감 김인이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같은 해 6월 남치근을 제주목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1554년(명종 9) 5월 다시 왜구가 천미포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1555년(명종 10) 정월 김수문을 제주목사로 임명하였다. 이 해 5월에 왜구들은 70여 척의 배를 앞서워 달량포와 이진포 등 우리나라 남해안에 침입하였다.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왜구들은 영암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전주부윤 이윤경이 장병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패배한 왜적들은 6월 27일 40여 척의 배에 1,000여 명이 탄 채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김수문 제주목사는 효용군 70명을 골라 적진으로 돌진시켰다.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명이 말을 달려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하자 왜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붉은 털의 투구를 쓴 적장 하나가 자신의 활 쏘는 실력을 믿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적들은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우리 장병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김수문 제주목사는 군관 강려를 서울로 보내어 전승을 보고하였다. 명종은 크게 기뻐하여 선로사 윤의중을 보내 군인과 백성들을 위로했다. 김수문에게는 일등급 가자(加資)하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으며, 다른 장병들에게도 공에 따라 상을 주었다.

이와 같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제주 방어가 이루어지던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변이 발생하였다. 을묘왜변은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제1차는 5월 달량진·장흥·강진 등지에서 일어났고, 제2차는 6월 왜구가 제주에 침입함으로써 야기되었다.

1차와 2차에 걸쳐 침입했던 왜구는 모두 통일된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전라남도 연해 각지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가 여의치 않자 제주도를 침략하였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제주 지역에 대한 약탈은 고려 시대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조선 전기만 해도 20여 차례나 된다.

그러나 제주 을묘왜변은 왜구가 단순히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기타큐슈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절해고도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6월 27일 1,000여 명의 왜구가 60여 척의 선박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면서 며칠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김수문 목사를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 등의 치마 돌격대의 공이 컸던 것이다.

이에 명종김수문에게 일자를 올려주고, 비단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김성조에게는 건공장군 벼슬이 제주되었다. 이리하여 제주도를 해상 근거지로 삼으려던 왜구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1, 2차에 걸친 을묘왜변의 결과 중앙 정부는 남해안 및 제주 지역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였고, 비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을묘왜변과 병진왜변 때 왜구들의 침입이 가장 치열했으나 제주도민 모두가 힘을 합하여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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