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83
한자 金秀文
영어음역 Kim Sumun
이칭/별칭 성장(成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568년(선조 1)연표보기
본관 고령(高靈)
대표관직 영건만호(永建萬戶)|동래부사|김해부사|제주목사|첨지중추부사|평안도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고령. 자는 성장(成章). 아버지는 김임(金銋)이다.

[활동사항]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야인(野人: 여진인)들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납치해가자 1535년(중종 30) 영건만호(永建萬戶)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1546년(명종 1) 동래부사에 부임하던 해 관리로서 근면, 절약하고 특히 치민(治民)에 힘써 품계가 올라갔으며, 1549년(명종 4)에는 김해부사가 되어 구황(救荒)에 힘써 포상을 받았다.

1555년 3월 남치근(南致勤)[?~1570]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부임 직후인 5월에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다고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555년(명종 10) 6월 제주목사 재임 중 왜구들이 80여 척을 거느리고 장흥·강진 등 8진(鎭)을 침범하고 화북포에 상륙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남해안에 침입하여 대패하고 쫓겨 가던 왜적 1천 명이 제주를 기습하자 정예병 70명을 뽑아 적진으로 쳐들어가 많은 적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전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을묘왜변으로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교리 윤의중(尹毅中)[1524~?]을 제주로 파견하여 목사인(牧使印)을 다시 사용하도록 하였다. 1556년(명종 11)에도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잘 막고 선박 6척을 포획하는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는데 명종의 배려에 감열하여 겨울 연희각(延曦閣) 동북쪽에 망경루(望京樓)를 지어 어의(御意)에 보답하는 뜻을 나타냈다.

1557년(명종 12) 10월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고 재략(才略)이 있으며, 변방을 맡아 명성과 치적이 있어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떠나니 세인이 훌륭한 목민관이라 칭하였다.

1558년(명종 1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1565년(명종 23) 한성판윤에 특진되었고, 1565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여러 번 만주인의 침입을 격퇴하여 북변방어에 공을 세웠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탐라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서북으로는 만주인을 물리치는 등 변방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