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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265
한자 宗敎
영어음역 Jonggyo
영어의미역 Religion
분야 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성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세계, 또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일체의 활동.

[개설]

교리가 경전으로 출판되고, 의례 체계가 표준화되며, 종교 지도자의 재생산 구조와 지도자와 일반 신도의 결합 구조가 공식 조직(formal organization)의 형태를 띠게 될 때, 보통 ‘종교’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부를 때는 바로 이 ‘제도 종교’를 가리키며,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는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왔다. 여기서는 제도 종교를 중심으로 서술하되, 비제도적인 범주도 부분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삼국 시대 이래로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외래 종교가 한국 사회에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토착 종교보다는 외래적인 종교 체계가 한국 종교사를 장식해 왔다. 불교와 유교가 차례로 지배 종교 역할을 했으며, 근대화 이후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 종교들은 한국 사회에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 또는 서구에서 이미 제도 종교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전래될 때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들어오곤 했다. 제주의 종교 역시 이러한 한국 사회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하면서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의 제주 종교]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주민들의 정신세계는 대체로 무교 신앙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마을 수호신을 받드는 당(堂)을 모셨으며, 자연 재해를 막고 생업 활동을 안전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대상은 한라산신과 바다의 용왕(龍王)이었다.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포작인(鮑作人)과 해녀(잠수: 潛嫂)들은 용왕과 바람신(영등신: 燃燈神)에게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치고 굿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에는 언제나 신에게 물어보곤 하였다.

무교의 성직자 역할은 무당이 담당하였다. 제주도 무당은 흔히 ‘심방’이라고 부르는데, 여자도 있었지만 대개 남자였다. 이들은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존재로 종교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공권력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일반 주민들에게는 정신세계의 지배자였다.

무교 신앙이 지배적이던 제주 지역에 새롭게 들어온 종교는 불교였다. 절은 대체로 고려 후기에 세워졌는데, 법화사(法華寺)·수정사(水精寺)가 대표적이다. 이 절들은 모두 왕실에서 지은 비보사찰이기 때문에, 규모도 대단히 크고 절에 딸린 토지도 넓고 노비도 수백 명씩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불교는 약화되고 절의 수는 줄어들었다. 승려들은 농사를 짓다가, 신자가 찾아오면 건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낮은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하다가 사라져 갔다. 1568년(명종 23)에 곽흘(郭屹) 제주목사가 절을 부수고 불상을 불살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상당수의 절이 남아 있었다.

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는 불교가 거의 사라졌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절도 없고 중도 없고 비구니도 없다(사찰 터는 삼읍에 대단히 많다)”, “제주성 동쪽에 만수사(萬壽寺)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海輪寺)가 있다. 각각 불상은 있지만 상시 전수자(典守者)가 없어서 마을에서 한 사람을 정하여 돌보고 있다. 또 사명일(四名日)에 서로 모여서 예불할 뿐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두 절에는 일명 동자복(東資福)과 서자복(西資福)이라 부르는 불상이 있었는데, 승려 없이 주민들이 모여 예불을 드린 것으로 보아 당시 제주도민들의 불교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무교 신앙과 함께 민간에서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유교 문화는 제주 사회에 깊이 침투하지 못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펴나갔다. 국가가 향교를 설치하고, 경서를 보급하고, 과거를 장려하면서 유교 이념의 보급에 힘써왔다.

하지만 육지의 다른 지방들보다 제주 지역에서 유교의 영향력은 미약했고, 양반 관료로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던 토착 지배 세력들은 유교 이념 학습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의 무교 신앙은 유지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서 유교가 정착하려면 왕이 파견한 제주목사들이 선정을 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부임하는 제주목사와 제주현감 대부분이 무신(武臣)들이었고, 이들은 제주에서 선정을 베풀기보다는 탐관오리로 온갖 수탈을 일삼았다.

가끔 유교 이념에 투철한 제주목사가 와서 향교를 고쳐 짓고, 학문을 진흥하고, 서당을 세워놓더라도 그 다음에 다시 부패한 제주목사가 와서 수탈을 일삼는 일이 반복되었다. 또한 향교에서 경전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과거 시험을 보고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700년경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은 신당을 파괴하고 무당 활동을 중지시킨 인물로 유명한데, 그는 당을 부수고 불태우는 한편, 유교 제사와 향교 교육을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무당들은 흩어지고, 당신앙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떠나자마자 원상태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시대 내내 주민들은 대체로 당신앙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가 되면 유교식 상례(喪禮)와 제례(祭禮)가 제주민들 사이에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하고,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오늘날 제주 지역의 일반 가정에서 조상 제사를 유교식으로 모시는 것은 상식이며, 전국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볼 때도 훨씬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구한말, 일제 강점기의 제주 종교]

1876년 개항 이후부터 천주교와 개신교는 물론 불교 역시 오래 동안의 단절을 넘어서 다시 포교를 시작하였다. 한편 남학(南學)과 같은 신종교가 유입되어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남학 신자들은 1894년 전라도로부터 제주도로 들어와 대정 일대의 화전 지역에 정착했다가, 1898년 민란을 주도하고 나서는 관의 탄압을 받아 급속히 사라졌다.

1898년부터 유입된 천주교는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한 성장세를 이루다가 1901년 이재수의 난을 겪으면서 다시 약화된다. 제주도에 들어온 지 불과 2년 만에 수천 명의 신도를 확보했던 천주교는 신자들에게 신당을 파괴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라고 가르치면서 민간신앙과 유교를 강하게 공격했었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과 제주도 농민군 사이에 빚어진 큰 충돌이 이재수의 난이었다. 결국 천주교 신자 수백 명이 살해당한 엄청난 비극으로 발전했는데, 그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제주도민들 사이에 천주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1907년에 포교가 시작된 개신교는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새로운 신자를 확보하기 어려워 소수의 신자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는 증산교 계통의 선도교(仙道敎)였다.

1914년경 제주도에 들어온 선도교는 변해가는 세태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갓과 도포 등의 전통 복장 사용을 고집하고,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고 양인(洋人)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무속 신앙을 갖고 있던 농어민들과 천주교나 개신교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유림들이 많이 입교했다.

그들은 1918년 법정사 항일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제의 강한 탄압을 받았다. 선도교는 1920년대 초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제주 지역에도 진정원(眞正院)을 설치하여 정식 포교를 진행하였다. 이후 신자들이 계속 늘어났지만, 내분이 심화되는 1926년 이후에는 크게 약화되었다.

1936년에 중문 출신의 강승태(姜昇泰)가 증산교의 뿌리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으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세워 천여 명에 가까운 신자를 모았다. 무극대도교는 반일적인 사상이 강한 반면 교도들이 전 재산을 바쳐가며 신자가 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강승태가 말한 후천 개벽의 세상, 즉 미래에 대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건 사람들에게는 큰 복음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볼 때는 거짓 선전에 속아 넘어가 패가망신하는 종교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무극대도교는 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 무극대도(無極大道) 등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한편 증산교의 다른 일파인 김형렬이 세운 미륵불교가 1938년부터 제주에 들어왔는데, 일본의 통치를 부정하고 장차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실현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포교를 했다. 이들은 1942년 미륵불교 신자들이 독립군에 참여할 것을 모의하다 체포되면서 세를 잃었다.

[해방 이후의 제주 종교]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신자를 확보한 것은 불교이다. 오늘날 제주시에는 역사가 오래되거나, 규모가 큰 사찰은 없지만 고려 후기부터 이어진 불교의 전통이 되살아나 제주시 내 곳곳에서 사찰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신도가 활동하고 있다.

제주도는 전국적으로 불교 신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 속한다. 물론 사찰 수보다 개신교 교회 숫자가 더 많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여전히 불교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양상이다.

한편 제주시 내에는 조계종 소속 사찰과 태고종을 비롯한 다른 종파의 사찰 수가 비슷한 편이지만, 제주시를 벗어나면 조계종보다도 오히려 태고종 사찰이 더 많고 훨씬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복적이고 무속적 성격이 가미된 불교’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기복적 성격을 배제하고 선을 대중화하는 사업이 활발해지고, ‘수행과 교육’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한편 개신교와 천주교 역시 해방 이후 교세를 확대해 갔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많은 신자를 확보하였다. 이것은 전국적인 현상의 반영이기도 한데, 일제 강점기만 해도 반천주교 정서가 강했던 제주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빠르게 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개신교에 비해서 천주교가 크게 성장한 것은 반천주교 정서가 급속히 약화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해방 이후 제주시의 종교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 세 종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 무교 신앙은 계속 탄압을 받았다. 특히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에 미신 타파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관청이 나서서 각 마을의 당굿을 중지시키고, 무당을 잡아다 굿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나서 풀어주었다.

탄압이 계속되자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는 행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일부 양반 지배층에 한정되어 있던 유교식 조상 제사가 조선 말기부터 널리 보급되어 일제 강점기에 일반 대중들에게 깊이 확산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일반 주민들은 대부분 유교식으로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그렇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전제(門前祭), 조왕신(竈王神)에 대한 제사 등 무교 신앙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점복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고,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가 뿌리 내리기 어려운 것은 아직도 제주도민들의 심성 속에는 무교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계로 보는 제주시의 종교 현황]

1995년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제주도의 종교 인구는 24만 9,450명으로 전체 인구의 49.4%이다. 그중에서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3대 종교의 신자가 제주도 종교 인구의 98.3%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종교 인구는 1.7%에 지나지 않는 셈이 된다.

물론 이 통계는 제도 종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 신앙은 종교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유교 신자가 0.4%에 그치고 있는데, 이 수치는 향교에 출입하거나 유도회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들에 한정된 것이므로, 유교식 조상 제사를 지내는 비공식적인 유교 인구는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종래 당신앙을 중심으로 한 민간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그 위에 유교가 지배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던 조선 시대로부터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불과 반세기 만에 제주의 종교 지형이 완전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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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도 종교 인구 분포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제주도는 전국의 다른 지역과는 상당히 다른 종교적 특징을 보여준다. 전국적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신자가 증가한 개신교가 19.7%이고, 천주교가 6.6%로 둘을 합친 기독교 인구가 26.3%를 차지하여 23.2%인 불교 신자보다 많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개신교 8.4%, 천주교 6.2%로 합쳐서 14.6%에 그쳐 33.6%를 차지하는 불교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불교는 전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23.2%인데, 제주도는 33.6%로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다. 불교 신자는 부산(38.2%)과 경상남도 지역이 36.3%로 가장 높고, 제주 지역이 33.6%로 3위를 차지한다.

대구(33.2%), 경상북도 지역(31.0%)이 그 다음으로 많아 경상남도, 경상북도와 함께 제주도가 불교 신자가 가장 많은 지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울 지역 불교 신자 18.4%의 약 2배이고, 전라남도 13.6%, 전라북도 12.2%에 비하면 거의 3배에 가깝다.

불교 신자가 많다는 사실이 곧바로 무속의 뿌리가 강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제주도의 종교 지형이 전국적인 상황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 유입된 창가학회(創價學會), 영우회(靈友會), 진여원(眞如苑) 등의 법화경(法華經)을 신봉하는 신종교들은 모두 재가(在家) 불교이다. 이 신자들은 일본계 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상당히 부정적이기 때문에 종교 통계를 묻는 질문에 흔히 불교 신자라고 답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 통계 중에 불교 신자로 분류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는 일본계 종교 신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지역별 분포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주시와 다른 지역, 즉 서귀포시, 그리고 남제주군, 북제주군을 비교해 보자. 불교 신자는 지역별로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는 제주시가 9.1%, 서귀포시가 10.8%로 비교적 높은 반면,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은 6%에 그쳐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뚜렷하다.

천주교 신자의 도시 비율은 개신교보다 훨씬 높다. 서귀포시 지역이 4.9%, 남제주군은 2.8%에 그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북제주군이 4.9%의 분포를 보이는 것은 한림 지역이 천주교의 중요 거점으로 비교적 많은 천주교 신자가 거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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