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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954
한자 佛敎
영어음역 Bulgyo
영어의미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오성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신앙하는 전통 종교.

[개설]

제주불교는 삼국 시대를 전후하여 제주 지역에 전파된 이후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민간신앙과 혼재되어 이어져 내려왔다. 근현대에 들어와 다시 중흥기를 맞았고 현재까지 제주도의 대표 종교로서 뿌리 내리고 있다.

[고려시대 제주불교]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국가 이념으로서 민중들의 생활 의식 및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사찰 지원은 통치적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제주불교 역시 고려 조정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제주도 사찰 가운데 법화사와 수정사의 경우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산남과 산북의 사찰들을 관리하는 비보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 후기 창건된 존자암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성제를 지내던 비보사찰이었다.

또한 고려 시대 제주불교의 특성 중 하나는 1세기 동안 지속된 원나라의 지배에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원나라는 내륙과는 별개로 탐라를 지배, 관리하기 위하여 총관부를 설치하고 초토사, 또는 다루가치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군사를 주둔시키며 목장을 직접 관리하는 등 제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때 제주도 내의 사찰을 정비하였는데, 법화사와 수정사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원나라의 오랜 지배를 받은 제주불교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불교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제주 지역 사찰들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 제주 지역의 사회·경제적 여건상 국가나 지방관 차원의 지원 없이 규모가 큰 사찰을 건립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으며 뿌리 내린 제주불교는 제주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사료가 묘련사에서의 송광사 경판 제작이다. 이는 고려 시대 제주불교 문화의 수준을 가늠케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제주불교]

조선 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선종과 교종 양종의 종파를 병합시키고,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시켜 나감으로써 불교는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제주불교 역시 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사찰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에 의지하여 유지되었는데, 특히 지방의 불교 사원의 존폐는 지방 관리의 영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불교가 침체되었기는 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불교 신앙이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토착화되었다.

정치적으로 제도권에서 밀려난 불교는 수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사상적 측면보다 신앙적 측면이 주를 이루면서 민중들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제주불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근현대 제주불교]

제주불교는 안봉려관의 출가와 관음사 창건을 필두로 20세기를 맞이하였다. 관음사 창건에 앞서 강창규가 1892년에, 김석윤이 1894년에 각각 완주 위봉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들의 은사인 박만하는 근대 초기 제주에서 활발한 포교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19세기 말 제주불교에 관한 구체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편적 사건들만 알려져 있다.

민간에 스며들어 있던 불교는 자연스럽게 19세기의 민족 사상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제주도민과 아픔을 함께 해온 승려들은 ‘법정사(法井寺) 항일 운동’과 같은 민족 운동을 주도해 외세에 대한 저항에 앞장섰다. 이러한 신앙 형태는 제주불교의 독특한 모습으로, 불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문제의식을 지니게 하였다.

제주도의 근현대 불교는 관음사를 모태로 전개된다. 관음사 포교당을 중심으로 한 제주불교협회(1924년 창립)의 활동을 통한 제주불교의 의례와 신행 형태의 변화 및 제주불교연맹(1937년 창립)의 해방 전까지의 활동을 통한 외형적 성장이 있었고, 불교의 근본 사상을 정립시키고자 했던 제주도에는 90여 개의 사찰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불교계의 포교 열망과 일제의 효율적 관리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는 시대적 한계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 결과 1945년 제주불교 혁신 운동으로 친일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으나 4·3사건으로 좌절을 맛보며 불교 정화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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