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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적색 농민 조합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747
한자 濟州赤色農民組合事件
영어음역 Jeoksaek Nongmin Johap Sageon
영어의미역 Red Peasant Union Incid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찬식한금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 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32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34년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김두경|부병훈|김경봉|양병시|장한호|김정맹|양두옥|홍경옥|장용진|장병윤|강공흡|김일준|부생종|부병준|김원근|이기표

[정의]

1934년 제주에서 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항일 조직을 재건하려다가 일제에 적발된 사건.

[개설]

일제는 1930년대 초반 제주도민과 사회주의자들의 결합을 차단하고 제주도민의 황국 신민화와 경제적 수탈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제주 지방에서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각지에 민풍 진흥회(民風振興會)라는 민간 관제 조직을 강화하고 진흥회, 자강회 등 진흥 단체를 새로이 만들고 주민 자치 기구였던 리민회 등을 관제 단체로 바꾸어 진흥 운동을 펼쳤다.

[역사적 배경]

1932년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제주도 핵심 항일 운동가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지나간 뒤 다시 제주도 야체이카의 뒤를 이어 제주도 운동 지도부가 만들어졌다. 그 책임은 제주읍 건입리에 거주하던 김두경에게 맡겨졌다.

제주도 야체이카의 책임자였던 강창보는 제주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강창보는 탈출 직전에 강병희를 통하여 김두경·부병훈·강팽학에게 제주도 운동을 재건할 것을 지시하였다.

김두경은 1932년 6월 중순과 7월 중순에 구우면 이익우의 지도 하에 있던 김경봉과 만나 제주도 운동의 장래를 모색하였다. 두 사람은 제주도 운동의 재건에 뜻을 같이 하는 가운데, 과거 야체이카 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1932년 8월 상순에는 김일준을 직접 만나 운동 지도부에 합류시켰다. 이렇게 제주도 운동 지도부가 다시 건설되자, 이후 제주도 운동은 부병훈·김경봉·김일준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별로 농민 조합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경과]

1932년 10월 상순에 김경봉·부병훈·김일준 등 세 명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김경봉제주 적색 농민 조합 조직 간담회를 개최할 것을 제의하여 협의,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제주도에서의 농민 운동의 필요성에 동감하였다.

이들은 1933년 1월 28일 다시 만나서 위의 간담회 결의에 의하여 조직체의 명칭을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창립 준비 위원회’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경봉은 “농민 운동 전개의 전제 조건으로 농민들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고, 이를 자료로 하여 농민 대중을 획득하고, 의식을 주입하여 하부 조직을 확립하는 등 농민 본위의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운동 방침으로는 ① 본 준비회는 제주 적색 농민 조합의 조직을 목적으로 한다 ② 우리는 제주도 적색 농민 대중의 전위 투사로서 활동할 것을 기약한다 등 두 가지로 정하였다.

책임 부서는 부병훈이 맡고, 지역별로는 제주읍 일원을 부병훈이, 구우면·신우면을 김경봉이, 신좌면·구좌면을 김일준이 담당하였다. 지역별로는 제주도 북부 지역에만 한정되었는데, 담당 구역 이외에 적당한 동지가 있을 때에는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창립 준비 위원회에서 협의하여 가입시키기로 하였다.

1933년 3월 초순 제주도 운동의 책임 지도자인 김두경은 부병훈·김경봉·김일준 등 세 명이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창립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는 보고를 부병훈으로부터 받고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준비 위원회를 추인하였다.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준비 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지역별 담당자들은 제주 적색 농민 조합의 조직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제주 적색 농민 조합의 조직은 각 리에 반을 두고 면에 지부를 두기로 하고 리 단위에 투쟁 기구인 농민 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제주 적색 농민 조합 준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은 구우면과 신좌면 지역이었다.

제주 적색 농민 조합에서는 일제의 관제 농촌 운동과 면 행정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쳤다. 도로 확장, 흑색 옷 착용, 공동 임야 확장, 학교 시설 개선 등에 반대하고 면장의 비리를 폭로하였다. 1934년 7월 19일 김경봉·양병시·고경흡 등이 농민 위원회를 적색노농연구회로 새로이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4년 10월 구우면 일대에서 청년 52명이 검거되어 그 조직이 적발됨으로써,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

이 사건으로 제주 경찰서에 총 62명이 입건되었다. 김두경·부병훈·김경봉·양병시·장한호·김정맹·양두옥·홍경옥·장용진·장병윤·강공흡·김일준·부생종·부병준·김원근·이기표 등 16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장창구 등 35명은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고, 고자화 등 10명은 소재가 불명확하여 기소 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기소된 16명은 목포로 이송되었는데, 1937년 4월 12일에 가서야 광주 지방 법원 목포 지청에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당시 이들 운동가들에 대하여 일제는 가혹한 고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재판정에서 이의형 변호사는 피고들이 이구동성으로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였다고 변론하였다. 또한 신좌면 함덕리 부생종은 예심 과정에서 취조를 받다가 1936년 6월 29일 옥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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