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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만 할아버지의 일생의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09
한자 -日生儀禮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신부감 구하기

군에서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빨리 장가가라며 장가가서 부인이 있어야 돈을 모은다는 독촉에 장가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장가를 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직업이 있거나 돈이 많아야 하는데 그가 가진 것은 맨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궁합이 맞는 나이를 알아보시고는 동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으로 가서 새 각시 감을 구하라고 했다. 그가 현재 자주 애용하는 이발소인 인성 이용원 맞은편이 제대 후 그가 살던 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100m도 안 되는 곳에서 지금의 아내의 집이 있었으니 그의 아버지의 예견이 맞는 셈이다. 처음에는 모슬포, 한림, 하귀 등 자신의 집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로 여기 저기 신부감을 알아보러 다녔다.

처음 한림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 ‘장가가젠 새 각시 보레 댕겸수다(장가가기 위해 새 각시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했더니 동네에 괜찮은 색시감이 있다고 만나보라고 해서 찾아간 일이 있었다. 안양에 있는 방직공장에 다니는 여자인데 그 집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결혼 날은 아직 안 잡았지만 약혼은 이미 했다고 하여 허탕을 친 일이 있었다. 한번은 하귀에 얌전한 새 각시 있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고 했다. 하귀에 아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과 같이 집에 찾아 갔다. 그 때는 손님이 오면 닭 한마리 잡아서 술을 먹는 게 큰 대접이었다. 그 집 어머니와 오빠를 만나 같이 술도 마시고 인사도 하고 하였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같은 고씨 라서 낭패를 본 일도 있다.

지금의 아내와의 만남

그는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개를 키웠는데 이름이 ‘로브’였다. 그 개를 데리고 아침마다 집에서 서부두 방파제까지 산책을 했었다. 구 발전소 자리, 지금 건입동사무소 짓는데 내려가다가 지금의 부인이 밤색 반코트를 입고 지장깍에서 물을 길어서 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물을 나르는 것을 보고 착실한 처녀라고 생각을 했고 생긴 것도 여성스럽고 예뻐서 마음에 들어 좇아가서 집을 알아두었다. 지금 노동위원 앞 오거리 서북쪽에 문청근씨가 운영하는 방앗간인 청근이네 방앗간이 있었는데 그 앞집이 그녀의 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찾아갔다.

처음에는 군대 갔다가 제대하여 근처에 사는 청년인데 이 집에 젊은 청년이 있으면 친구나 하려고 인사차 왔다고 하면서 전순자의 집에 들어갔다. 아들 두 명이 있는데 하나는 결혼해서 다른데 살고 한명은 집에 있다고 하여 인사를 하고 다음에는 그때 당시 ‘부란디’라는 술이 있었는데 맥주병보다는 크고 되병보다는 작은 소주였다. 그 술과 안주를 챙겨서 지금의 처남과 몇 번 술자리를 하였다. 그러고는 사실 이집에 오는 이유가 누이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털어 놓았다. 이 이야기를 옆방에 있던 장모가 듣고는 집이 가난하다고 하시보는 게 아니냐며 일자리도 일정치 않은 깡패 같은 놈에게는 딸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에도 몇 번 찾아가 나쁜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설득을 했다고 한다. 고봉만의 부인 전순자는 1938년 7월 2일 생으로 원래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순창이다. 아버지가 제주시 건입동 제주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농업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제주로 오게 되었다.

전순자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만 먼저 제주도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아들 둘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따라 왔다. 농림학교 사택이 현재 건입동사무소 신축공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전순자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전순자가 3·4살 정도 1940년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상복치마가 예뻐 보였는지 어머니께 그녀가 “아버지 죽으면 깍치마(상복치마) 입젠(입고 싶어요)”라고 했었다고 한다. 전순자의 어머니는 배를 타고 멀미를 심하게 하였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여객선이 아니라 떼배여서 멀미를 심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순자의 아버지인 남편이 죽었지만 다시 그 배를 타고 싶지 않다고 제주에 그냥 남아있었다고 한다. 남편하나 믿고 제주도에 왔는데 남편이 죽자 여자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살아나가기는 힘들었다.

혼인 승낙

고봉만이 전순자의 집을 여러 번 찾아 가서 결혼하자고 했더니 전순자는 결혼 할 마음도 없지만 준비도 전혀 안되었다고 했다. 집사람은 결혼 안하겠다고 울고불고 하여 목이 쉬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어느 날 택일을 하여 가지고 가서 전순자를 만나러 갔다. 택일을 보니까 12일 만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장모는 먹을 것도 없고 결혼 준비도 안 되었는데 결혼이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덮는 이불 한 채 하고 까는 요 하나, 그거면 된다. 딸만 주십시오’ 해도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고봉만이 택일 잘 하는데 가서 보니까 이날 결혼을 하면 평생이 좋고 이 날 결혼하지 않으면 결혼 날짜가 없다고 했다고 설득을 했다. 결혼 날짜로 나온 날이 평생에 제일 좋은날이고 그날 결혼해야 잘 산다고 하는데 어느 부모가 딸을 나쁘게 만들려고 하겠는가. 억지 춘양 격으로 장모를 설득하고 드디어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 아버지 방앗간 앞집 딸과 결혼하기로 했다니까 ‘가까운디 새각시 슴(될 사람)이 이서났구나이(있었구나)’하면서 멀리서 어떤 처자인지 보러 가곤했었다.

결혼 전 데이트

12일 만에 결혼식을 급하게 올리느라고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지금의 부인이 칠성통 중앙극장에 친구들과 극장구경을 갔을 때 마이크로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으나 그녀는 끝내 나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지 못한 터라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단 한 번의 데이트가 있었는데 ‘들렁개’(지금의 방선문 근처)의 데이트가 그것이다. 그가 나무 심는데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던 터라 장모가 지금의 부인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라고 해서 계란후라이에 보리밥 도시락을 가지고 갔다가 집에 오는데 깜깜해져서 손을 잡고 걸어온 것이 유일한 데이트였다고 했다.

결혼준비

결혼하기로 한 날짜는 금방 다가오고 결혼식장을 알아보았는데 예식장비가 너무 비싸서 결국 제주 삼성혈에서 예식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 운치 있는 야외결혼식이겠지만 그때는 돈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제주 삼성혈에서 결혼 하는 것은 그때 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뜻을 알았던 걸까. 그의 큰아들도 삼성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관덕정/ 쪽에 중앙예식장이라고 하나 있었는데 예식장 값이 한번 결혼 하는데 4만 5천원이나 필요했다고 한다. 그때 그 돈은 엄청 큰 돈이어서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돈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제주 삼성혈에 찾아 갔다. 자신의 성이 고씨니 제주 삼성혈에서 결혼식을 올려도 되느냐고 관리하는 사람을 찾아 의논을 했다. 그때 까지 제주 삼성혈에서 결혼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안 될 것도 없다고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며 허락을 해 주었다. 돈은 얼마를 내면 되느냐고 했더니 향초 값으로 촛불을 켤 돈만 내면 된다고 했다. 당시에 초 한 봉(10개)에 350원이었다. 그래서 500원을 내었더니 제주 삼성혈 희사자 명단에 올려주었다. 사촌형에게 들러리를 부탁하고 버스한대를 빌어서 친척들을 실어 나르고 신랑 신부차로 짚차를 친구에게 빌려서 결혼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결혼식

원래 주례는 집안 어른이 서기로 했는데 고봉만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결혼식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소변이 마려운데 신부도 화장실 다녀와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주례를 서기로 했던 분이 웃겨서 주례를 서지 못하겠다고 하여 그 자리에 있던 어느 여고 교장선생님이 주례를 보았다고 한다. 그의 결혼식은 전통도 현대도 아닌 것이었다고 했다. 본인은 양복을 입고 부인도 면사포 쓰고 결혼했다고 사진을 보여주는 것을 보니 신부는 하얀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신부 옷도 해준 것이 아니라 신부가 알아서 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전순자는 당시 미용기술을 익힌 터라 머리나 화장은 본인이 했고 면사포만 사진관에서 빌려서 썼다고 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면사포를 사서 쓰기도 했는데 보통 빌려서 썼다. 제주 삼성혈 사용료로 향초료 500원을 냈는데 제주 삼성혈 관리하시는 분이 잔칫날 저녁에 다시 500원을 부조해서 왔더라고 한다. 자신이 낸 향초료는 공금이었는데 그분은 개인 돈으로 부조를 해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잔치

1959년 음력 3월 20일 결혼식은 제주 삼성혈에서 했지만 집에서도 당연히 잔치를 했다. 제주에서는 3일간 잔치를 하는데 첫 날은 돼지 잡는 날, 둘째 날은 손님 받는 날, 셋째 날은 결혼식 당일이 그것이다.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결혼식 전날 즉, ‘가문잔치’날에는 돼지 족발을 술안주 삼아 결혼식 일을 분담하고 계획을 짰다. 또한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식 하는데 보탬이 되라고 돼지 한 마리에 술 한 허벅 정도 가지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돼지다리 하나에 술 두되 정도 결혼식 전날 가지고 가서 인사를 했다고 했다. 결혼식 당일은 ‘홍세함’이라고 해서 홍포로 싼 나무로 된 상자 속에 신부의 옷감이나 결혼 예장물을 담아 보냈다고 한다. 옷감은 애기 기저귀로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결혼식 후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요즘 생긴 풍습이라 밥 먹을 시간도, 옷갈아 입을 시간도 없이 다음날 바로 결혼식 때 빌려 썼던 솥이며 다른 물품들을 신랑이 직접 갖다 주고 신부도 흰 옷 입은 채로 허리를 묶고 결혼식후의 그릇을 닦았다고 했다.

혼수

이불 한 채, 이불장 하나, 방석 다섯 개, 궤 하나가 전순자의 혼수 품목이었다. 궤는 당시에 결혼 하지 않은 친구들 끼리 계를 결성해서 결혼하기 전에 얼마씩 모아서 친구 중 한명이 결혼할 때마다 궤를 선물하곤 했다. 그녀도 결혼 전 친목계에서 받은 궤를 가지고 결혼을 했다. 이불장은 전순자의 작은 오빠가 목수라 동생을 위하여 직접 짜준 것이었다. 시부모님께는 큼직한 가제손수건을 짜서 선물을 했다. 시댁에서 받은 것은 금반지 하나가 있었는데 후에 재봉틀을 사면서 팔아버렸다.

자녀의 출산

큰 딸(1960년생), 둘째 딸(1961년생), 큰 아들(1964년생), 셋째 딸(1966년생), 작은 아들(1967년생)으로 2남 3녀의 자식을 두고 있다. 자식들의 터울이 별로 없는 편이다. 22살부터 29살까지 7년 사이에 다섯을 낳아서 거의 연년생으로 키웠다. 고봉만의 부인 전순자는 아이를 낳는데 특별히 힘들게 낳거나 한 기억을 없다고 했다. 중앙성당 앞에 사는 산파가 와서 아이를 받았는데 아이 다섯을 다 그 산파가 받았다고 한다. 산파비는 당시 1500원 정도 했는데 그의 집에서는 1000원만 받았던 것 같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몇 년 전에 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반가웠다고 한다.

기저귀, 배냇저고리

전순자는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파마를 해주곤 했는데 파마 값으로 밀가루 푸대를 10개 정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것을 양잿물에 삶고 여러 번 빨아 말려서 아기 기저귀로 썼었다고 한다. 기저귀 살 돈도 없고 기저귀 감이 없어서 밀가루 푸대로 기저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결혼 할 때 홍세함에 있던 기저귀 감으로 삶아서 자르고 손으로 감침질해서 기저귀를 만들었다. 1980년대에 일회용품이 대량 생산되고 보급되면서 종이 기저귀를 사용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아기의 건강과 환경을 위해 천기저귀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아기들 백일·돌 사진 찍어 주려해도 옷 사서 입힐 돈이 없어서 가제손수건으로 기저귀 채워서 큰딸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었다고 전순자는 회상했다.

배냇저고리의 제주어인 ‘봇뒤창옷’이라는 것도 베로 만들어 입혔었는데 손을 덮게 긴 소매에 바지저고리 모양으로 가운데 끈을 매게 되어있었다. 정확한 치수도 없고 남녀의 구분도 없으며 대강 신생아의 크기를 짐작해서 만들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기저귀로 몸을 감싼 후에 최소한 3일이 되면 쑥물로 목욕을 해서 이 옷을 입혔는데 7~15일 정도 입힌다. 아기가 태어나면 몸에 태열이 있어서 가려우니까 삼베로 만든 이 옷을 입으면 자동적으로 긁을 수 있어서 효과적이다. 꼼꼼한 어머니는 봇뒤창옷을 아기가 결혼할 때 까지 놔두기도 한다.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아프지 않고 아들이 여러 명 낳은 집에 가서 빌려오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아기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건강한 집이 최고이다. 고봉만의 집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새로 만들어 입히지 않고 첫 애 때 입혔던 것을 다음 아이들에게 물려주어 입혔다고 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손자들 키울 때는 사서 입혔다고 했다.

자녀들의 혼인

큰딸 결혼할 때는 집에서 돼지 13마리를 잡았는데 모자라서 나중에 70근을 더 사다가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왔었다. 지금은 모두 식당에서들 잔치를 하지만 그는 모든 자녀 결혼 때 집에서 잔치를 했다. 큰 아들 결혼 할 때 신부는 고향이 서울이었는데 아들이 아버지 결혼한 장소에서 결혼하겠다고 하길래 “그건 너 맘대로 하지 말고 신부한테 물어보라”했더니 신부도 따르겠다고 하여 제주 삼성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고집이나 남다른 생각이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지금은 미국에 있는데 비록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큰 아들이라는 게 믿음이 가고 의지하게 되고 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진 듯 보였다. 신랑 혹은 신부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때도 있었으련만 아이들의 선택을 믿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행복한 것이다. 아직 결혼 안한 중국에 있는 막내딸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결혼 안 하겠다면 말고 좋으면 하고 아이들의 의지에 맡긴다고 했다.

아버지의 죽음

1967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상을 했는데 3년 동안 식사 때마다 때식을 다 올렸었다. 지금이야 거의 그런 집이 없지만 그 때만해도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식사 차리듯 아버지 상을 차렸었다.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도 식사 때가 되면 들어와 살아계실 때 밥을 차려드리 듯 상에 밥을 올렸다. 아이들도 학교 갈 때 “할아버지 학교 갔다 오쿠다”하고 갔다 오면 “갔다와수다”하고 무엇 맛있는 게 있으면 할아버지 상에 먼저 올렸다.

차례·기제사

고봉만의 집 거실 뒤편으로 또 하나의 거실처럼 방이 하나 있는데 여닫이문이 있어서 여름에는 열어두어 바람이 들게 하고 겨울에는 닫아둔다고 했다. 제방에는 양 옆으로 장식장이 있고 조금 북쪽으로 나무로 짠 탁자 하나가 놓여있다. 그는 그 방을 ‘제삿방’이라고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고 제사나 명절 때 제를 지내기 위해 특별히 만든 방이라고 했다. 정월멩질(구정), 팔월멩질(추석), 한식, 단오 이렇게 4명절을 지냈었는데 한식은 40여 년 전에, 단오는 30여년 전 부터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가 친척집을 돌아다니면서 제를 지내는데 친척들이 제주 시내에 있어 한 열 몇 집을 돌아다니며 제를 지내고 밥을 먹고 해서 저녁 6시까지 하곤 했었다. 차츰 사람들도 바쁘고 간소화 하는 추세라 각자 자기 집안에서 제를 지내고 서로 돌아보지 않기로 선언을 한지도 십여 년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안 식구끼리만 명절을 지내는데 형들도 일본에 있고 그의 큰아들도 미국에 가고 해서 2층에 사는 작은 아들과 손자들, 고봉만 내외가 단출히 명절을 보낸다고 했다.

추석 명절 때는 육지는 추수 후라 한가하지만 제주도는 가장 바쁠 때라고 설명한다. 우마를 먹이는 촐(꼴)을 베어 겨우내 먹일 먹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촐(꼴)을 베어 날씨 좋을 때 장만하지 않으면 하면은 다 변하거나 썩어서 쓸모가 없게 되며 하늬바람에 잘 말려서 그걸 묶어서 노적가리를 만들어 두어야 한해 겨울 우마들 다 먹인다. 그래야 우마가 건강하게 살져서 봄이 되어 다시 농사를 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갈옷은 노동복으로만 알고 있는데 평상복으로도 많이 입었다고 한다. 추석이라고 흰 한복을 입고 다니면 일을 안 하고 노는 사람으로 취급되니 평상복으로 갈옷을 입고 다녔다고 회상한다. 또한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인심이 후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박했으므로 게으르다고 낙인 찍히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갈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 사람들은 급할 때 돈이나 쌀을 빌려 달라고 해도 빌려주지 않았다. 놀러 다니는 사람이므로 그렇다. 부지런히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세수를 안 하고 수염을 안 깎고 다녀도 ‘바쁠 때랑 우리 집 오랑 쌀 가져가라, 쇠판 돈 얼마 이시매 돈 필요허민 얼마 빌려가(바쁠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쌀 가져가라, 소 판돈 얼마 있으니 돈 필요하면 빌려가라)’고 한다.

전순자는 명절 때 아이들 옷은 양복점에 다니던 실력으로 집에서 직접 옷을 만들어 아이들을 입혔다고 했다. 나중에는 사서 입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그녀의 옷이나 남편의 옷은 기성품을 사기보다는 양복점이나 양장점을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제사분할·장보기

제사는 1년에 여러 번 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친척들 끼리 나누어서 지내기로 하여 현재 그의 집에서는 6번의 제사만 한다. 음력 3월 22일 할아버지 제사, 6월 28일 할머니 제사, 8월 5일 어머니 제사, 9월 9일 아버지 제사, 10월 11일 외할아버지 제사, 10월 30일 외할머니 제사가 그것이다.

제사 준비 때 남편은 거의 도와주지 않는다. 집에 따라서는 남자가 산적할 고기를 썰기도 하는데 전순자는 차려놓은 것을 상에 올려놔주는 것만도 고맙다고 한다. 옛날에는 친척들이 다 와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는데 이제는 윗층에 사는 작은 아들과 손자 그리고 고봉만 내외만 조촐히 제사를 지낸다. 음식은 명절 때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한다. 명절이랑 제사 지낼 때 제수용품은 동문시장을 애용한다. 이마트 안가고 가까운 동문시장도 가보고 바로 앞에 있는 킹마트에 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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