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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588
한자 航空
영어음역 hanggong
영어의미역 aviation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경수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항공기관이나 단체 또는 관련 시책 등의 항공 현황.

[개설]

제주도의 항공교통은 해방 이후에 이루어졌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이 군비행장으로 제주국제공항, 모슬포공항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비행의 시초는 1913년 5월 13일 서울 용산 삼각지훈련장에서 일본인 ‘나리하나’의 공개 비행과, 1917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 공개비행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민간 비행사는 1920년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안창남이었고, 그는 고국 방문을 위하여 1922년 12월 10일 서울 및 인천 상공에서 공개 시범비행을 했다.

우리나라의 민항공노선이 처음 개설된 것은 1929년 6월 21일, 일본 항공수송(주)의 서울~울산 간 화물과 우편물의 수송이었다. 여객 수송을 위한 노선은 1929년 9월 10일 울산~서울, 서울~평양 간, 8인승 포커슈퍼 유니버셜 수송기가 매일 1회 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한국인에 의한 유료비행은 1930년 9월 신용욱(愼鏞頊)이 조선비행학교를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도입한 지도리[千島]식 4인승 쌍발기로 서울 상공을 일주하거나 인천까지의 왕복 비행을 한 것이 효시라 할 수 있다. 탑승 요금은 서울 상공 일주 10분에 5원, 인천 왕복 20분에 10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은 13원이었다.

제주도와 육지부 간의 민간인 수송 목적의 최초 비행은 1946년 미국정청 항공수송용 C-47기를 동원하여, 김포공항을 기점으로 서울~광주~제주 간을 주 2회 운항하면서 시작되었다. 민간항공에 의한 최초의 수송은 대한국민항공사(Korea National Airline: KNA, 대표 신용욱)가 1948년 10월 30일 교통부로부터 서울~광주~제주 노선 면허를 받아 1949년 2월 1일 5인승 스틴슨(Stinson)기를 1일 1회 운항하면서부터이다.

[변천]

1. 해방 전후의 제주비행장

중국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26년부터 4년 여에 걸쳐 만들어진 모슬포 비행장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계에 이르렀다. 일본은 제주읍 내에 새로운 비행장 건설을 계획하였고, 이에 따라 1942년 1월, 40만 평의 부지 위에 비행장이 개설되었다.

당초의 제주비행장은 활주로도 없이 잔디밭에 단발기인 경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나, 1942년 일본군 육군항공대에 의해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활주로가 다듬어졌다.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1946년 2월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자 군용 수송기가 가끔 제주비행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후 40여 만 평의 부지 위에 15평 정도의 콘센트 건물 5~6동과 석조건물 1동만 덩그렇게 남은 제주비행장에는 제주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유일하게 들어왔을 뿐이었다. 몇 동의 건물 중 교통부건물은 콘센트 건물 1동이 고작이었다. 전후의 제주비행장은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비행장으로서의 기능은 전혀 없었고,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었다.

2. 교통부 비행장 시대

(1) 공항청사 확보

전쟁 이후 거의 방치상태에 놓여 있던 제주비행장은 1955년경부터 민간항공개발이 절실해짐에 따라 교통부가 제주비행장에 관계직원 1명을 처음으로 파견하고 무선통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전흔이 어느 정도 복구되고 질서가 잡혀가기 시작하는 1956년 9월 17일 국방부는 민항공 개발이 시급함에 따라 전국에 있는 군용비행장을 군 작전에 지장이 없는 한 민항공용으로 적극 개방하였다. 그해 12월 전장 500m, 폭 25m인 아스팔트 활주로가 준공되어 최초의 포장 활주로가 선을 보이게 되었다.

(2) 비행장 확장

날이 갈수록 항공여객은 계속 급증하여 여객기가 운항할 때마다 좌석이 동이 나서 여객기 운항 편수의 증가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955년 12월에 준공한 길이 500m의 활주로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에 벅찬 실정이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57년 12월, 길이 500m, 폭 25m의 활주로를 기존 활주로에 이어 다시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교통부는 활주로가 확장되고 여객기의 이·착륙이 빈번해지자 이를 통제하기 위한 관제탑 설치가 절실해져 부산 김해비행장에서 쓰던 철제 관제탑을 옮겨왔다.

1958년 1월 30일 정부는 대통령령 제1319호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제주·부산·강릉·광주 등 다섯 곳에 각각 비행장을 설치함으로써 제주비행장은 1942년 일본 군용비행장으로 개설된 이후 17년 만에 정식 비행장 직제를 갖게 되었다. 이후 1961년까지 길이 1,500m, 너비 35m로 활주로가 확장되었고, 30편이 수용 가능한 계류장 시설도 갖추게 되었다.

(3) 국제공항으로 승격

1962년 6월 19일 대한항공공사가 정식 발족되면서 전국의 필요 지역에 지사가 설립되었고, 그해 11월 15일에는 대한항공사 제주지점이 문을 열었다. 제주지점은 대한국민항공사(KNA)의 도산으로 여객기의 운항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해 12월 2일부터 재취항함에 따라 정상업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12월에는 항로 수정을 위한 항공 보안시설이 설치되었고, 1968년 4월 정부가 제주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킴에 따라 1970년 11월에는 계기착륙장치인 ILS시설이 착공되어 1971년 11월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국제공항으로 승격되면서 제주공항은 차츰 제반 항공시설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1972년 5월에는 풍향에 의한 이·착륙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단선 활주로에 교차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여 1973년 5월에는 길이 2,000m, 너비 45m의 남북교차활주로가 총 6억 원을 투입한 끝에 완공되어 제주공항도 제트 여객기의 이·착륙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한항공도 국제선 운송이 해마다 좋아지자 10월 1일부터는 주 3회에서 1972년 4월 1일부터는 주 4회로 크게 증편했으며, 공항장의 직급도 1970년 10월부터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격되었고, 250여 평의 국제선 여객 청사도 1972년 6월 20일 착공하여 이듬해 11월에 준공되는 등 국제공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4) 제주공항의 확장

제주비행장은 1969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활주로라고는 고작 1,500m의 아스팔트 활주로가 전부였다. 그러나 여객기의 기종이 프로펠러에서 반제트기로 바뀌면서, 여객의 증가와 세계적인 제트화 추세 등으로 인해 제주국제공항은 활주로 확장과 시설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DC-3, DC-4와 같은 프로펠러기와 F-27, YS-11 같은 반제트인 터보프롭, 제트기인 B-727 등이 혼합, 운항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스팔트 활주로로는 제트기 취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늘어나는 여객의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교통부는 이러한 제주공항의 제반여건을 감안하여, 1968년 건설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제주공항을 국제공항 규모로 확장하기로 하였다.

1969년 교통부는 길이 1,200m의 구활주로를 양쪽 150m씩 늘려 1,500m로 확장하는 한편, 겨울철에 불어대는 북서풍을 피할 수 있는 교차 활주로, 즉 동서로 이어진 기존 활주로에 1,500m의 남북 활주로를 신설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부터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교차활주로 공사는 만 1년 만인 1973년 5월에 완공되어 보잉 727제트기가 취항함으로써 제주도의 항공 교통이 본격적으로 대량 수송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976년 활주로와 청사수용이 극한에 다다르자 교통부는 현 공항 이외에 구좌읍 월정리한경면 고산리, 한림읍 수원리 등 세 군데에 공항 이설 후보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 투입과 교통 불편 등의 이유로 신공항 건설을 또다시 ‘현지 확장’으로 최종 확정됐다.

정부에서 밝힌 현지확장계획은 이·착륙 방향에 장애물이 없으며 도심지에서 벗어나 소음공해가 적은 안으로 최종 결정되어, 3,000m의 신활주로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확장계획은 당장의 여객 수용에도 미흡하다는 정부 측의 전망에 따라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거쳐 처음보다 무려 400억 원이 많은 562억 원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3층의 6,000㎡ 청사를 신축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을 전부 수용하는 이외에, 주차장을 1만㎡에서 2만㎡로 확장하고 관제탑과 동력동 등의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1983년 12월에 준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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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1983)

이에 따라 제주국제공항은 연간 항공기 이륙 6만 회의 능력과 B-747 점보항공기 8대를 동시에 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연간 260만 명의 여객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화물 청사는 연간 7만 톤의 화물처리 능력, 주차장은 400대의 주차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계기 착륙시설(ILS)과 레이더 및 전방향 무선표지 시설(VOR/DME)을 설치함으로써, 비행자 정밀 등급-Ⅰ(CAT-Ⅰ)로의 운영이 가능해져 항공기 결항률의 감소와 함께 항공기의 안전 운항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5) 시설 및 노선 확충

제주국제공항은 1985년 9월 1일 다시 대규모 확장공사를 시작하였다. 국제공항관리공단 제주지사가 설립되어 관리·운영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날로 늘어나는 항공 여객의 서비스 요구를 충족시키고, 공항 운영의 과학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설유지 보수의 적기 시행, 새로운 장비의 도입, 그리고 우수 기술요원의 확보 등 공항의 서비스 수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우리나라 3대 국제공항의 서비스 수준을 평준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제주국제공항 인수 첫 해인 1985년에 제주지사의 사무실 확보를 위해 화물청사 2층의 개량과 더불어 종합상황실을 설치하였다. 1987년에는 장비의 현대화에 따른 전공 청소차, 라인 마카 등 각종 고가 장비를 확보하면서 차고의 신축이 불가피해져 토목 및 건축 현장을 겸한 중장비고를 신축하였다.

또한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시설개량 사업으로 1988년 3월 1기뿐인 국내선 탑승교를 보완하기 위하여 국제선 탑승교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개설, 국내선 항공기의 동시 주기시 2기의 로딩 브리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였다. 또한 입국장 탑승 수속장의 시설을 개량하여 공항 이용객에게 보다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1991년에서 1992년까지 2년 동안에는 152억 원을 투자하여 국내선 여객 청사를 1만 5,000㎡를 증축하고, 계류장도 확장하였다.

국제노선 또한 지속적으로 확충되어 1985년 10월에는 제주~도쿄 주 6회, 1986년 10월에는 제주~타이페이 주 3회, 1988년 3월에는 제주~나고야 주 6회의 노선이 잇따라 개설되었다.

3. 항공사의 발달과정

(1) 대한민국 항공사

우리나라 초창기 항공사(航空史)에서 안창남 이후 신용욱만큼 뚜렷한 족적(足跡)을 남긴 인물도 드물다. 재력가이면서 사업 수완이 탁월했던 데다 현실 감각도 남달랐던 그는 비행학교 운영과 국내 항공 노선취항 이외에도 미국에서 도입한 DC-3 수송기로 중국 해남도(海南島)까지 부정기 운항으로 군수품을 수송하기도 했다. 또, 국내에서 글라이더의 붐이 일자, 서울 신길동에 종업원 300명 규모의 글라이더 제작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 군부와 협력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면서 당시의 식민지 형편으로는 놀라울 만큼 항공 사업을 일으켰던 신용욱은 8·15광복 이후에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민항공사업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신용욱은 해방 전에 닦아놓았던 사업 기반을 활용하여, 즉 조선항공사업사를 모체로 하여 1946년 3월 1일 대한국제항공사를 설립하였다.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기 항공운송사업면허를 취득한 신용욱은 사장에 윤치영을 추대하고, 스스로는 상무에 취임하여 신생 국가의 항공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용욱의 구상은 미군정의 항공정책 부재로 인해 실현되지 못한 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맞이했다. 신용욱은 1948년 10월 1일 대한국제항공사를 모체로 하여 다시 대한국민항공사를 창설하였다. 본격적인 순수 민간항공사가 탄생한 것이다.

1948년 10월 10일 교통부로부터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 서울~부산 구간의 국내선 운항면허를 받아, 우선 서울~부산 구간의 정기 항공노선을 개설, 여객 수송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듬해인 1949년 2월에는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의 나머지 3개 구간에도 취항함으로써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과 각 지방 주요 도시를 잇는 항로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순수 민간자본으로 설립되었던 대한국민항공사는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3개 노선에서 1회 취항에 4명의 승객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들어 항공기가 비행을 하는 시간보다 지상에 체류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당연히 수지 균형을 기대하기가 어려웠고, 항공사는 적자 경영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겨우 걸음마 단계이던 항공업계에도 쓰라린 피해를 입혔다. 보유하고 있던 스턴슨기 3대를 모두 공군에 징발당한 대한국민항공사는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난지 부산 출장소를 근거지로 하여 전세를 관망하던 대한국민항공사는 9·28 서울수복을 계기로 미국 더글러스사부터 36인승 DC-3 항공기 2대를 차관 도입하여 부산~제주, 부산~대구 노선에 취항하였다. 이어 1951년 9월 22일부터는 서울~광주, 서울~군산 노선을 증설하여 운항을 시작하였다.

1952년 3월, 우리나라와 대만 사이에 항공협정이 체결되면서 중국민항공사가 그해 5월부터 타이페이~도쿄~서울 노선을 개설하고 주 2회 운항에 돌입하면서 국내 취항 외국 항공사는 2개사로 늘어났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합명회사 대한국민항공사는 주식회사 체계로 서둘러 전환(1952년 7월)하고, 1953년 10월 국제선 취항을 염두에 두면서 더글러스사로부터 장거리용 72인승 DC-4기 1대를 도입하였다. 이 비행기는 처음 서울~부산 노선을 매일 왕복 취항하다가, 같은 해 12월 25일부터 1954년 1월 3일까지 서울~홍콩 구간을 임시 시험 운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 7월 2일 한·영 잠정항공협정이 체결되면서 대한국민항공사는 같은 해 8월 2일부터 DC-4기로 서울~타이페이~홍콩 노선에 주 1회 운항을 개시하였다. 우리나라 민간 항공사상 최초의 정기 국제노선 취항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무렵 민항공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 제고로 승객이 늘어나면서 대한국민항공사는 더글러스사로부터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는 등 운항 능력을 확장시켰다. 1955년 3월부터는 서울~대만~홍콩 노선을 주 3회로 증편하였으며, 그해 9월 1일부터는 서울~홍콩 직행 노선으로 변경, 운항하였다. 또한 1957년 10월 종전의 잠정 협정을 대신할 한·미 항공협정을 정식 체결하고 대한국민항공사를 대미(對美) 항공로 지정업자로 선정함으로써 대한국민항공사의 본격적인 성장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당시 서울~부산 노선에 취항하고 있던 DC-3기 1대가 수영비행장에서 착륙하다가 돌풍에 전복되는 데 이어, 이듬해 2월에는 또 다른 DC-3기 1대가 부산을 이륙하여 서울로 향하던 중 간첩에게 납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대한국민항공사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한국민항공사는 노선 운항의 정상화와 경영의 회생을 위해 DC-3기 1대와 록히드사로부터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 도입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취항시키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항공기 이용객들의 불안 심리로 이용률이 현저하게 감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산 손실 및 항공기 추가 도입의 재정부담 과중으로 결국 대한국민항공사는 회생 불가능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62년 11월 13일 대한국민항공사는 해산되었다. 순수 민간자본으로 광복과 더불어 탄생하여 14년 동안 영욕과 부침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 민항공사를 장식하였던 대한국민항공사가 창업주 신용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 항공산업은 일단 민간의 손을 떠나게 된다.

(2) 한국항공

대한국민항공사가 빈사상태에 허덕이고 있을 때, 한진상사(韓進商事)의 조중훈 사장이 새로운 민항공의 기치를 들고 한국항공(韓國航空, Air Korea)을 설립했다. 조중훈은 1960년 8월 6일 교통부로부터 부정기 항공운송사업 면허를 획득하면서 4인승 세스나(Sessna) 180기 1대를 미국에서 도입하여 에어 택시 영업을 하던 중이었다. 에어택시 사업이 활기를 띠자 그는 1960년 11월 29일 한국항공을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1961년 1월 서울~부산, 서울~부산~제주, 서울~삼척~속초 노선에 대한 정기 항공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하고, 40인승 컨베어 240 쌍발기 1대를 미국에서 도입하여 3월 8일부터 서울~부산 노선에 취항시켰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 이후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한국항공은 정기 노선 취항 4개월 만인 1961년 7월 전면 휴항을 하게 되었다. 1962년 2월 6일자로 항공운송사업 면허를 취소 조치함으로써 한국항공은 단명하게 된다.

(3) 대한항공공사

5·16 군사 정부는 대한국민항공사를 도산에서 구제하고 민항공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결국 대한국민항공사의 회생은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군사 정부는 대한국민항공사와 관계없이 별도의 국영 항공사를 설립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1962년 1월 9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교통체신분과위원회가 마련한 국영항공사 설립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어 3월 15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대한항공공사법(大韓航空公社法)」이 통과되었고, 4월 26일에는 동법 시행령이 제정·공포되었다. 4월 30일에는 예비역 공군 준장 신유협이 공사 사장서리에 임명됨으로써 국영 대한항공공사(Korean Airline Co. Ltd.)의 설립 계획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1962년 6월 15일에는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6월 19일 정부가 공칭자본금(公稱資本金) 5억 원 중 2억 5,000만 원을 1차 불입함으로써 대한항공공사의 설립 등기를 필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국영 항공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초 정부는 항공사업의 성격상 일본항공, 에어프랑스, 루프트한자 등 세계 주요 항공사의 장점을 살려 정부 50%, 민간 50%의 출자 비율로 관민공영항공사를 설립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으로는 민간이 자본금을 충당하기에 벅찬 상태여서, 결국 정부가 100% 출자하는 국영 항공사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떻든 대한항공공사는 일본에서 DC-3기, DC-4기를 각각 1대씩 임차하고 채무로 압류되어 있던 대한국민항공사의 DC-3기 3대를 불하받아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항공공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영항공사로서, 비록 발족 당시의 의욕적인 구상대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신설 국영항공사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영업 개시 1년 만에 1억 2,000만 원의 영업 실적을 올리는 등 KNA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가 납입할 자본금의 불입이 늦어지면서 항공기 도입 계획이 흔들리게 되었고, 따라서 당초의 의욕적인 구상도 흐트러졌다.

신유협에 이어 제2대 사장으로 예비역 공군 중장 장성환이 1967년 10월에 취임하였다. 장성환 사장은 취임 후 우선 기구를 축소하고 인력을 대폭 감축하는 등 자구 노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 당국에서도 탈직자를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창설 직후부터 누적된 국영업체의 폐단과 자본금 부족으로 인한 경영난은 이미 구제불능의 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정부로서는 항공정책의 일대 전환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항공 사업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민영체계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당시 국내 유수의 기업들에게 인수의사를 타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국영 대한항공공사는 1962년 6월 창설된 이후 6년 8개월여 만인 1969년 2월 28일의 정기 주주총회를 끝으로 한진상사의 조중훈 사장에게 인수된다. 또 다시 민항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4) 본격 민항시대의 개막(대한항공)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의 민항은 국력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선진국 항공사들은 대형 최신예 제트기로 여객·화물 수송체계를 갖추면서 ‘하늘에서의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항공공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는 한편, 민간에 불하하는 방안과 외국 항공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였다.

한때는 대한항공공사와 미국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의 합작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명분과 실리 상 외국 항공사와의 합작보다는 민영화의 방안을 선택하였다.

정부는 1968년 6월부터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만한 능력이 있는 기업들을 개별 접촉하며 수용의사를 타진하던 중, 당시 베트남에서의 성공적인 사업수행으로 주목을 끌던 한진상사에 눈을 돌렸다. 이 시기에 수퍼 컨스텔레이션 4발기로 베트남으로의 인력 송출을 자체적으로 해오던 한진상사는 B-727제트 여객기의 도입계획을 밝히면서 동남아시아 노선의 운영권을 정부 당국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정부 당국에서는 한진상사에게 대한항공공사의 인수를 강력히 요청하였고, 마침내 1969년 대한항공공사는 한진상사의 조중훈 사장에게 불하되었다. 1979년 3월 6일 대통령은 「대한항공공사법」에 따라 대한항공공사의 제3대 사장에 조중훈을, 부사장에 조중건을 임명하였다. 같은 날 오후 김포공항에서 인수식이 거행되었고, 경영권은 조중훈에게 이양되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공사법」이 존속하는 한 실질적인 민영화가 진척될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공사 민영화의 최종 조치로 「대한항공공사법」 폐지안을 제70회 임시국회에 제출하였고, 1969년 7월 10일 국회 제18차 본회의에서 의결·통과되었다. 국회는 또한 동의안에 첨가된 대한항공공사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신설되는 주식회사 대한항공이 포괄적으로 승계한다는 항목도 의결·통과시킴으로써 대한항공공사 시대는 법적·제도적으로 막을 내렸다.

(5) 경쟁체계 구축, 복수 민항시대(아시아나항공)

1969년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된 이후 1988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항공 운송사업은 대한항공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운영이 지속되었다. 아세아 항업, 중앙항업, 우주항공 등 정부의 면허를 획득한 운송사업사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부정기 항공운송사업 또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항공기 사용사업을 영위하던 소규모 업체였다.

그 동안 대한항공은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 운용을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 굴지의 항공사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제선 수송실적 기준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항공 산업 규제완화 조치 이후 국제적 경쟁이 더욱 격화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복수(複數) 항공사 체계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국내에서도 1사 독점체계로는 국제 교역의 증대, 해외 여행자유화, 소득 증대에 따른 항공수요의 폭주, 외국 항공사의 국내 항공시장 잠식, 국제 경쟁력 강화 등의 문제 및 과제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지적되면서 제2민항의 설립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부에서는 제2민항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시기 등을 검토해오다가 1988년 2월 12일 금호그룹에 제2민항의 설립을 허가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금호그룹은 새로 설립할 제2민항의 사명을 (주)서울항공으로 결정하고, 그해 2월 17일에는 자본금 50억 원으로 설립 등기를 마쳤다. 이어 2월 24일 정부가 서울항공에 국내·국제 정기 및 부정기 항공운송사업 면허를 발급함으로써 우리나라 민항공업계에도 복수 항공사에 의한 경쟁체계가 구축되었다.

서울항공은 같은 해 6월 B737-400 여객기 4대의 도입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8월에는 사명을 ‘아시아나항공’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988년 12월 23일 김포국제공항에서 200여 명의 항공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취항식을 가지면서 서울~부산, 서울~광주 노선에 취항하였다. 또한 취항 당시 1대의 항공기로 국내의 2개 노선만 운항하던 아시아나항공은 1989년 말까지 1년 동안 수차례 증자를 통하여 자본금을 7,000억 원으로 늘렸으며 항공기도 8대로 늘렸다. 그리고 첫 취항 1년 만인 1989년 12월 23일에는 국제선 부정기 운항을 개시함으로써 국제선에서도 복수 민항 경쟁 체계가 구축되었다.

[헬기 운항]

1988년 2월 20일에는 제주~추자 간 부정기 헬기노선이 개설 후 첫 취항했다. 한국항공은 20일 상오 8시 제주국제공항 헬기 이착륙장에서 조상필 등 탑승객 11명을 태운 제주~추자 간 헬기를 첫 취항시켰다. 소요시간은 20분이며 요금은 편도 성인 1인당 1만 6,780원이었다.

[항공기 사고]

제주공항에서 일어난 항공기 사고 중 특기할 만한 사고는 태풍 ‘더그’가 북상하는 가운데 제주공항에 착륙하던 대한항공 소속 A300 2033편 여객기(기장 우드) 사고였다. 이 여객기는 1994년 8월 10일 오전 11시 23분 경 비바람에 밀려 활주로를 이탈하면서 인근 용담 레포츠공원으로 추락, 엔진이 폭발하여 기체가 두 동강이 났다. 이 사고로 부기장과 승객 7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다른 승객 및 승무원들은 사고 즉시 긴급 대피해 더 이상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항공요금]

2002년 3월 이후 항공요금 인상에 대한 반발이 많았다. 이는 대한항공이 2002년 4월부터 제주기점 11개 국내선 중 6개 노선의 항공요금을 최고 22.2%까지 인상하겠다는 발표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대한항공이 2001년 3월 20일 국내선 항공요금을 평균 12.1%, 인상한 지 1년 만에 이루어지는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정석비행장]

정석비행장에 대한 활용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제주국제공항의 경우 시간당 운항편수 제한, 대형기 투입에 따른 주기장 부족, 여객 처리능력 등이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 데 따른 것으로, 당장 월드컵 등을 맞아 수송난이 우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월드컵 등에 대비해 시간당 1편 정도 운항을 조건으로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정석비행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건설교통부에 사용승인 요청을 했다. 제주도 역시 월드컵 교통대책의 일환으로 정석비행장 이용을 건교부에 건의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이 정석비행장에는 2002년 6월 8일 오전 9시 5분께 처음으로 중국 응원단 등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착륙했다. 정석비행장에는 건설교통부에서 파견한 운항감독관 2명을 비롯해 제주항공관리사무소와 제주공항 경찰대, 제주공항 기상대 등 관계기관의 관리요원들이 배치되었고, 군 당국은 비행장 외곽경비를 지원했다.

2002년 11월 17일에는 대한항공 사장을 역임하면서 제주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조중훈이 사망했다. 조중훈은 ‘교통학의 기본’을 좌우명으로 제주를 ‘수송보국’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의 노력으로 제주공항은 길이 2,00m, 폭 45m의 활주로와 보조활주로를 갖추게 되었고, 조종사 훈련시설, 관제탑, 자동착륙 유도장치 등의 첨단장비를 갖춘 국제수준의 공항으로 변모가 가능했다.

[제주 지역항공사 설립]

2002년 11월 20일에는 제주도는 제주도 주최로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지역항공사 설립 도민설명회를 개최했다. 「제주도를 거점으로 하는 국내선항공운송사업의 타당성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는 국제선 위주의 운영되고 있는 양 항공사의 문제점과 항공요금 인상의 가능성, 도민의 항공료 부담 증가 등의 이유를 들어 지역항공사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제주도 지역항공사 설립 행정지원단에서는 자본금 200억 원으로 「항공법」에 의한 부정기 항공운송사업 등록 후 정기 항공운송사업 면허 취득을 병행할 계획이다. 또 초기에는 저비용 터보프롭 소형 항공기 5대를 도입, 제주~서울과 제주~광주 2개 노선에 운항하고, 공익성과 채산성을 고려해 항공기 보유대수를 10대로 늘리면서 가장 효율적인 노선을 추가 운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4년 9월 제주도의 항공사업 파트너 공개모집 참여 및 제안서 심사에서 애경그룹이 지역항공사업자로 선정되었고, 2005년 1월 애경그룹(75%)과 제주도(25%)의 공동출자로 민관 합작법인 형태의 (주)제주항공이 설립되었다. (주)제주항공은 2005년 8월 정기항공사업 면허를 획득,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이어 제3의 정기항공사로 출범하여 2006년 6월 5일 첫 비행을 시작했다. 제주항공은 2006년 말 현재 총 수송실적이 총 4,810회에 25만 2,750명(탑승률 71%)을 기록하는 등 우리나라 제3의 민항으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제주국제공항 이용 현황]

2002년 제주국제공항이 국내 16개 공항 가운데 항공기 운항횟수 및 여객수송 실적이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집계되어 국내 3대 공항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사에 따르면 지난해 제주국제공항 항공기 운항횟수는 6만 8,685편이며, 여객수송 수는 993만 8,051명으로 인천국제공항(운항횟수 12만 6,049편, 여객수송 수 2,092만 376명)과 김포국제공항(운항횟수 12만 8,428편, 여객수송 수 1,709만 2,095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1년까지는 제주국제공항과 김해국제공항을 비교할 때 여객수송 수는 제주공항이 많은 반면 운항횟수가 적었으나, 이후 제주공항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여객수송 수와 운항횟수 모두 김해공항(운항횟수 5만 8,350편, 여객수송 수 916만 3,421명)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도 제주국제공항 여객수송 수는 932만 337명으로 김해국제공항 여객수송 수 916만 8,089명보다 15만 2,248명이 많았지만, 운항횟수에서는 제주국제공항이 6만 597편으로 김해국제공항의 6만 1,242편보다 645편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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