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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974
한자 濟州道制
영어음역 Jejudoje
영어의미역 Jejudo Provincial System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946년 7월 4일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946년 8월 1일연표보기
시행처 미군정청

[정의]

1946년 제주특별자치도의 행정 구역을 도(道)로 두었던 제도.

[개설]

군정청 법률 제94호에 따라 제주도(濟州道) 설치를 1946년 7월 2일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제1조. 제주도는 전라남도 관할에서 분리한다.

제2조. 제주도는 도(道)로서 전 권한·직무·직능 및 권리를 구비한 도를 구성한다. 그 도의 이름을 제주도라 칭한다.

제3조. 제주도는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의 명칭을 가진 두 개 군(郡)으로 구성한다.

제4조. 북제주군은 다음 면(제주읍·구좌면·한림면·조천면·애월면)으로 구성한다.

제5조. 남제주군은 다음 면(성산면·중문면·대정면·표선면·서귀면·안덕면)으로 구성한다.

제6조. 본령은 1946년 7월 31일 24시에 효력을 발생한다.

[제정경위 및 목적]

1946년 7월 12일 제주도를 전라남도로부터 분리하며 도(道)로 승격시킨다면서 군정청 공보부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통치 잔재가 또 하나 소멸되었다. 제주도가 섬으로서 그 목사(牧使)의 지배를 받았던 왕조 시대 이래 처음으로 제주도가 다시 본래 자체로 돌아간 것이다. 군정청 법률 제94호에 의하여 제주도 및 부근 여러 작은 섬과 추자군도는 분리된 한 도(道)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전라남도 관하로부터 이탈된다. (중략)

제주를 도(道)로 승격하는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주민의 최대 복리를 고려하여

2. 상업·공업·재정·교육 및 보건 후생 등의 문제에 관하여 밀접한 연락과 신속한 관리를 하고자 중앙정부 기관이 직접 관할하고

3. 공업 및 농업 방면에서 가능한 한 내부적 발전을 도모하고

4. 무역 및 무역 기관을 촉진하고 제주도 생산업자협회의 발전을 기하여 본도로부터 원거리에 있으므로 제주도 도청 각국의 할당과 도로, 각 학교, 각 세무서, 토지 등지 세입 세금으로부터 나온 재원의 할당과 도로 보수 기타 등을 감독하는 데 한층 유리한 처지에 있다.”

[내용]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함에 따라 승전국인 미군이 한국에 진주한 것은 같은 해 9월 8일이었으며, 12일에는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임명되어 남한 지역에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한편 미군이 제주 지방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제주에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28일이었다.

제주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제도 정비가 늦었다.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지방 행정 기관을 접수한 뒤 조선군정청에서 각 도 단위의 군정지사를 임명하고, 요원을 현지에 파견한 뒤에야 비로소 군정 업무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에서 미군정이 실시된 것은 1945년 10월 27일이었으며, 제주도는 그 다음날인 28일에 군정청이 설치되고 스타우트 소령이 군정관이 됨으로써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 초기의 주요 업무는 치안 유지, 적산 관리, 교통·통신 시설 유지 등으로 다른 지방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군정 요원인 미군 장교들의 제주도에 대한 정보 부재, 통치 경험의 결여, 언어 장벽에 의한 효율적 의사소통의 미흡, 한국인과의 가치관 등이 달라 실제로 통치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특히 미군정 하에서 제주도는 무엇 하나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미군정 하의 지방 행정 제도는 초기에는 읍회, 면협의회 등이 폐지되는 등 일부 개편이 있었으나 나머지 부문에서는 전혀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정상으로 전라남도 관할이었기 때문에 자치 활동이 인정되지 않고 제한된 행정 업무만이 수행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제주 지방에서는 해방 한 달 뒤인 1945년 9월부터 정치·사회 단체들이 결성되고 좌익과 우익 세력간의 대립으로 인하여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었다. 당시의 제주 지역 상황은 일본과 교류가 막혀버린 데다 본토와의 교통도 불편하여 생필품이 크게 모자라서 주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제주도민들의 가장 큰 열망은 사회 안정과 자주성 있는 지방 행정의 수행이었으며, 지방 행정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도제 실시가 필수적이었다.

제주 지역의 도 승격 운동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 1945년 10월 김홍석을 중심으로 이윤희, 최남식, 양홍기, 김종현 등 지역 유지들이 ‘도제실시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도제실시추진위원회는 김문희 도사와 협조하여 아놀드 군정장관에게 진정서를 보내, 제주의 지리, 역사적 배경, 생활 실태 등을 밝히고 도로 승격시키는 것이 백년대계를 위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진정서의 제출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판단한 도제실시추진위원들은 직접 군정 요인을 만나 탄원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상경 대표로 김홍석을 선정하였다.

그는 1945년 10월 29일 서울에서 아놀드 군정정관을 만나, 도 승격을 실현시켜 줄 것, 노련하며 공정하고 지식과 도덕을 겸비한 사람을 도장관에 임명하되 지방 인사를 고문으로 둘 것, 제주와 목포 간에 대형 여객선을 취항시켜 해상 교통난을 해소시켜 줄 것 등 세 가지 사안을 건의하였다.

이와 같은 도 승격 운동은 아놀드 장관의 후임으로 군정장관이 된 러치 장군이 제주도의 실정을 살피기 위해 1946년 6월 2일 제주를 방문하면서 급진전하게 되었다. 러치 장군은 같은 해 7월 2일 군정청 법률 제94호를 제정·공포하고 8월 1일부터 제주도에 도제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제주 지역에는 도 승격 추진 운동이 일어난 지 10개월 만에 역사적인 도제 실시가 이루어져 남한에서 아홉 번째 도가 되었다. 제주 지역에서 도제의 실현은 1915년 도제가 실시된 후 31년 만의 일이었다.

1. 행정구역 및 기구

도제 시실로 제주도의 행정 구역은 2군, 1읍, 12면이 되었으며, 도 기구로는 3국(총무, 산업, 보건후생국), 12과를 두었다. 우선 총무국에는 서무, 인사, 회계, 재무, 소방의 5개 과를, 산업국에는 농무, 축정, 산림, 상공, 수산의 5개 과를, 그리고 보건후생국에는 보건, 후생의 2개 과를 소속시켰다.

초대 도지사에는 도사 박경훈이 승진, 임명되었으며, 북제주 군수에 박명효, 남제주 군수에 김명진이 임명되었다.

도의 청사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도청 건물(구 제주경찰서 본관 자리)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북군청은 마땅한 사무실을 구하지 못해 관덕정을 이용했으며, 남군청은 서귀면사무소(구 서귀포시청 자리)를 활용하였다.

2. 도제 실시 당시 제주도세

- 인 구 : 26만 6,419명(남자 11만 4,758, 여자 15만 1,661)

- 가 구 : 5만 4,011호(농가 4만 3,302, 비농가 1만 1,709)

- 공 무 원 : 83명(도본청)

- 예 산 : 당시는 미상이며 1954년에 149만 원이었음

- 가 축 : 소 2만 5,193마리, 말 3만 200마리, 돼지 3만 3,313마리, 양 171마리

- 수 산 : 동력 어선 41척, 어획고 5,796톤

- 전 력 : 245kw, 전화 호수 5,560호

- 전화보유 : 자석식 206회선

- 학 교 : 초등학교 68곳, 중학교 4곳, 고등학교 1곳

- 자 동 차 : 영업용 113대

- 의료기관 : 3개소

- 공 연 장 : 1개소

[변천]

제주도는 1946년 도제가 실시되었으나 면적의 협소, 인구의 과소 등으로 인한 도세의 열세에 따라 1956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자유당 정부의 행정 기구 간소화, 예산 절감 시책과 결부되어 도지 폐지론이 제기되었다.

1956년 8월 6일 정부는 기구 간소화 방안의 하나로 제주도를 폐지하고 전라남도 관할로 이관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안을 자유당 정책위원회에 회부시켰으나 도민들의 거센 반발로 좌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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