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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789
한자 政治
영어음역 Jeongchi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국가 권력을 획득·유지·조정·행사하는 기능·과정 및 제도.

[개설]

한국 정치는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집권을 경계로 전통 시대와 근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통 시대의 정치는 주로 왕조 체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근대 정치는 문호 개방에 따른 외세 개입과 거기에 대한 대응 속에서 전개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제주도의 역사적 기원은 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 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청동기·철기 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마제 석기·토기·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다. 제주의 옛 명칭은 도이(島夷)·동영주(東瀛洲)·섭라(涉羅)·탐모라(耽牟羅)·탁라(羅) 등으로 불려왔다.

이들 명칭 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 신화인 3성(三姓) 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라(高乙那)’, ‘양을라(良乙那)’, ‘부을라(夫乙那)’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제주 삼성혈]이라는 땅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그 후 고을라의 15대 후손 3형제[후, 청, 계]가 당시 한국 고대 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 명칭]’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관계는 그 후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에는 고려의 행정 구역인 탐라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할을 하였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의 지방 행정 단위는 주(州)·부(府)·군(郡)·현(懸) 등의 호칭을 갖고 있는 군현 외에도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역(驛)·도(島) 등의 복합적 형태가 있는 이중 구조였다.

이들 중 후자 지역에 살던 주민은 과거 응시 자격에 제한을 받고, 또 벼슬살이를 하더라도 관직 진출에 제약을 받는 등의 차별 대우를 받았다. 또한 이들은 특정 세금도 추가로 부과 받았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경제적 부담도 컸다.

고려 시대 제주도의 첫 행정 단위도 이와 같은 복합적인 형태의 이중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도는 1011년(현종 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기(朱記)를 갖게 되었다. 주기는 내외 관부 등에 지급되었던 관인(官印)으로서 군 형태의 모든 행정 단위에 주어졌다.

중앙 정부는 군현 설치의 타당성과 자격 요건 등을 엄격히 심사한 후, 이를 통과한 지역에 대해서는 군현명과 아울러 주기를 주었으며, 군현이 철폐될 때는 주기를 반납해야 했다. 즉, 주기가 주어졌다는 것은 군현 형태의 행정 단위로 편제된 지역임을 뜻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1011년 이전에 제주도는 다른 섬 지역과 달리 어떠한 군현의 영역으로도 간주되지 않았다. 즉, 제주 지역의 지리적 격절성과 장기간 자율적으로 운영된 적이 있던 탐라국의 존재 등과 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개별적 도(島) 형태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제되었으며, 군현보다 낮은 정치적·사회적 위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종 2년 제주도가 주기를 지니게 됨에 따라 군현과 같은 대우를 받는 지역으로 승격하였으나, 이후에도 제주 지역의 실질적인 행정 단위는 계속 도(島) 형태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군현 형태의 행정 단위 편제는 먼저 군현 이름이 정해지고 나서 주기를 내려받는 절차를 밟은 뒤에야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주기를 내려받을 당시 제주도의 경우 군현명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제주도의 경우 탐라군(耽羅郡)이라는 군현명이 정해진 것은 반세기가 지난 1105년(숙종 10)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이전까지는 이곳의 공식적 행정 단위 명칭은 탁라로 불렸다.

그러나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는 80여 년간 원의 간섭을 받게 된다. 당시 제주도와 몽골의 첫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제주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 간섭기가 시작될 때 제주는 화주(和州)[함경남도 영흥]·서경(西京)[평안남도 평양] 등과 더불어 몽골의 직할령이 되었다. 1294년(충렬왕 20) 당시 고려에 환속된 적도 있으나 얼마 후 몽골에 다시 귀속되었다.

이로부터 80년간 제주는 고려와 몽골을 수차례 오가며 귀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제주에 설치한 지배 기구의 관할권 소재가 고려에 있느냐 몽골에 있느냐 하는 현상적 변화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제주가 양국에 이중 귀속되는 미증유의 처지에 빠진 것이었다.

제주 사회의 주도권도 공민왕[1352~1374]대에 이르러서는 ‘하치’라고도 일컬어지던 목호 세력이 장악했다. 즉 제주는 1267년(현종 8) 몽골과의 첫 접촉이 이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몽골의 직할령이 된 다음, 100여 년간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의 지방 통치는 역사적 전통과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이남육도(以南六道), 양계(兩界) 지역이 서로 상이하였다. 이남육도는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를 말하며, 양계 지방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지칭한다.

행정 구역상으로 제주도(濟州島)는 전라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전라도 지역과는 다른 대우와 통치를 받았다. 즉, 제주도는 평안도·함경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양반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약했던 양계 지방이나 제주도는 중앙 정치 무대의 외곽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사족 세력(士族勢力)보다 향임 세력(鄕任勢力) 등 토착 세력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두 지역에는 토관(土官)이라는 특수한 제도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이 개창된 이후 제주도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원에 의해 설치된 목마장에서 생산된 말이 대명 외교(對明外交)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戰時)에 필수불가결 했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의 이와 같은 인식은 제주도에 대해 강한 통치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92년(태조 원년)의 제주 향교 설치, 1394년(태조 3) 우마적의 작성, 1404년(태종 4)의 노비적 작성, 1408년(태종 8)에 제주의 공부(貢賦)를 정한 것 등은 지방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앙 정부는 대내적인 행정 개편을 통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중앙 집권적 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던 조선 왕조는 그 일환으로 제주도에 대한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1416년(태종 16)에 제주도의 군현이라 할 수 있는 제주목(濟州牧)·정의현(旌義縣)·대정현(大靜縣) 등 삼읍 체제를 형성하였다.

군현제란 중앙 집권제를 위하여 동일한 정령(政令)으로서 획일적으로 전국의 지방민을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시도된 행정 기구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제주도의 삼읍 체제는 한말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914년에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 년간이나 유지되었으며, 수령으로는 목에는 목사[정3품], 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제주목에는 제주 목사의 부관(副棺)에 해당되는 판관(判官)이 파견되었으나 이는 지방 장관인 수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주 목사를 대신해서 제주목의 행정을 주로 관장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제주 목사·정의 현감·대정 현감 외에 제주 판관을 넣어 제주4관(官)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제주 목사는 형옥, 소송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도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두 차례 보고를 해야 했다. 즉, 조선 시대의 경우 오늘날처럼 행정 구역으로서 독자적인 도(道)를 형성하지 못한 제주도는 조선의 일반적 상황과 다르게 행정이 운영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제주 목사·대정 현감·정의 현감이 그 소관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며, 상위관서인 전라도 관찰사의 명령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에는 특수했다. 제주 목사는 관찰사(전라도)의 지휘·감독만을 받고 있었지만, 대정·정의 현감은 전라도 관찰사의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주 목사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는 제주도가 전라도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라도 관찰사가 매년 제주도에 와서 삼읍 수령을 포폄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관찰사의 권한 중 일부를 제주 목사에게 이양함으로써 대정 현감·정의 현감은 제주 목사를 통하여 적절히 통치해나갔다. 때문에 제주도는 특수하게 수령 간에 명령 체계가 형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즉 제주 목사는 소관 지역인 제주목을 총괄하면서 대정현·정의현 지역을 감독·규찰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제주 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 기능의 수행이 항상 강조되어 반드시 군사적인 직책이 겸임되었다. 군사적 명칭의 변화에 따라 제주 목사는 조선 초기의 경우 주로 만호(萬戶)·안무사(安撫使)의 직책을 겸임하였고, 1466년(세조 12)부터는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라 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는 이를 고쳐 방어사(防禦使)라 했다.

1642년(인조 20)에는 절제사(節制使), 1713년(숙종 39) 이후에는 다시 방어사라는 직책이 겸임되었다. 이들은 명칭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군직(軍職)의 겸임이라는 데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어느 시대든 영향력을 주도하고자 하는 세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들 세력은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세력에 대항하거나 타협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상실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특히 지방 행정 구역의 단위였던 군현에서의 주도권 장악은 전근대 사회에서 매우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지역을 대표하는 토착 세력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제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유에서 1416년의 삼읍 설치는 제주의 토착 세력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즉,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제주 주변들을 지배하게 되면 토착 세력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의 토착 세력들은 어느 정도 중앙 정부의 일정한 보호 속에 제주도 주민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류의 계층을 토관(土官)이라 부른다. 토관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제주도를 비롯한 평안도·함경도 등의 토착 세력에게 특별하게 주었던 관직이다.

이 세 지역은 중앙 정부의 정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는 소위 변방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 탐라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의 존재, 그 이후 원의 간섭 등이 잇달아 본토와는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중앙 정부는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서 이들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해나갔던 것이다.

제주의 토착 세력에게 토관직을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1295년(충렬왕 21)에 탐라를 제주로 고쳐 목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면서이다. 토관직을 수여받은 세력들은 주로 탐라국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성주·왕자 계층이었다.

그러나 중앙 집권을 강력히 추진했던 조선은 지방 통치를 강화하게 되자, 오히려 토관 세력이 지방 통치의 걸림돌이 되었다. 때문에 토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토관 세력들은 제주에서 주로 연변 방어, 군마 고찰 및 목장 업무를 책임지면서 제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해나갔다.

그러나 1416년 삼읍이 설치되어 영향력이 축소되자 이들은 수령권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즉, 중앙 정부는 제주 주변에 대한 지방 통치를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 주도형으로 운영하고자 한 반면, 제주 지방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토착 세력은 제주민에 대한 지배를 향촌 주도형으로 운영함으로써 제주 지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와 토착 세력 간의 대응은 조선 중기까지 계속되다가, 1601년(선조 34)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소위 문충기의 난]을 계기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앙 정부는 제주 토착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및 연좌제를 강력히 실시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제주 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 차별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이전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식민지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1915년 제주에는 도제(島制)가 실시되어 초대 도사(島司)로 이마무라가 부임하였다. 도사는 제주 경찰 서장을 겸임함으로써 행정과 경찰을 일원적으로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모든 관공서에 일본인이 배치되었고, 교육 기관의 교장 및 교사들도 일본인으로 충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국 정치사는 ‘반탁과 친탁을 둘러싼 정치 논쟁과 격렬한 좌우 대립’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신탁 통치 문제를 두고 처음으로 1946년 1월 초순 제주읍에서 대대적인 신탁 반대 궐기 대회가 열렸다.

각 면 단위 반탁 대회가 열렸는데, 대회는 건국 준비 위원회와 인민 위원회 조직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주도 좌파 세력은 이후 ‘모스크바 삼상 회의 지지’ 입장을 밝히게 된다.

한편 광복 이후 좌파 정당 단체로서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 조직은 조선 공산당 전남 도당 제주도 위원회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하여 결성했다.

이후 조선 공산당 제주도 위원회는 이듬해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남조선 신민당 등 3개 좌파 정당이 통합하여 남조선 노동당(약칭 남로당)을 결성하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반면 제주도 우파 진영에서는 8·15 홍순영을 중심으로 한 건국 준비 위원회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점차 좌파 세력에 밀려 인민 위원회 활동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김구의 귀국과 반탁 운동을 계기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7일에는 이승만 계열의 대한 독립 촉성 위원회 제주 지부가 발족되었다. 회장에는 박우상, 부회장으로는 김문희·임기봉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중앙의 우파 진영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미묘하게 세 갈래의 틈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 합작의 움직임, 나머지 하나는 반탁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이승만김규식의 중간 위치에 놓인 김구의 노선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같은 해 7월 14일 김구가 제주를 방문, 현지의 우파 진영을 고무시켰다. 김구의 제주 방문은 그가 당수로 있던 한국 독립당[약칭 한독당] 조직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날 한독당 제주도 당부 개편 대회도 열렸는데 새로운 위원장에는 홍순용이 선출되었다. 이 같은 우파 진영의 세력 확장에도 불구하고 1947년 초까지 좌파 세력에 밀렸다. 우파 진영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밖에 1947년 11월 서북 청년회 제주도 단부, 12월에는 조선 민족 청년단 제주도 단부가 결성되었다. 제주도 우파 진영은 1947년 3·1 사건 이후 좌파 세력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면서 좌익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더욱 활기를 띠고 세력 확장에 나섰다. 그럼에도 당시 국내 우파 정당 핵심의 하나인 한국 민주당은 제주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제6 공화국 이후의 정치 쟁점]

제6 공화국 이후 제주도 정치의 주요 쟁점을 살펴보면, 우선 민주화 운동 이래로 한국에서의 다양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지방 자치제의 부활로 정치의 새로운 국면이 등장하면서 그간 억눌렸던 정치 민주화의 열망과 지방 자치 단체의 각종 개발 사업이 뒤를 이었다.

특히 1990년대는 각종 개발 사업의 활성화로 인해 해당 지역과 개발 주체 간의 갈등이 매우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 제주에서는 「제주도 개발 특별법」과 관련한 도내의 각종 개발 사업이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으로 이어져 뜨거운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1948년 발생한 제주 4·3 사건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2004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를 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고르바초프 구(舊) 소련 대통령의 방문 이후에는 제주가 정상 회담 장소로 사용되면서, 평화의 섬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북 간의 각종 회담이 제주에서 개최되었고, 남북 긴장 완화 내지는 남북 평화 지대를 위한 제주도민들의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결국 지방 자치의 부활로 인한 지역 정치의 등장, 지역 개발과 주민 운동, 제주 4·3 사건의 해결, 제주 평화의 섬에 대한 각종 정책과 실행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제주민의 정치적 성향과 특징]

제주도민의 정치적 성향과 특징은 매우 독특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한국 정치 문화라는 모태적 성향에다 제주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복잡하면서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정치 문화를 해방 이후의 시기부터 생각할 때 사상적 기반에는 격세적 불교와 사회적으로 제도화한 유교가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권력의 상층부부터 도입된 구미의 정치 제도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터여서 굳건한 의식 기반을 가진 국민 전반에는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정치 문화의 성향 및 특징을 가름하는 기준에는 늘 가족을 위시한 혈연·지연·학연 등 제1차적 집단을 중시하는 인격주의(personalism)를 기본적으로 하여, 가족주의·권위주의·의식주의·운명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적 의식 구조를 기본으로 한 제주도민의 정치적 성향은 1990년대 이후의 정치의식 조사는 없었지만, 몇몇 발표를 통해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주민들의 대다수가 지역 사회의 제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나, 제반 문제의 해결에 대한 주민 합의와 협력 상태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높게 나타난다.

그 이유로는 그간의 의타적 해결 방식에 익숙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정당과 같은 공식적인 통로를 통한다기보다는 권력적 친분 관계에 의뢰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둘째, 사적 동기 중심의 지방 자치관과 그에 따른 지방 자치의 수단화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중앙 집권주의 체제하에서 지역 사회의 공익을 위한 지방자치와 민주주의 의식을 육성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따라서 사리사욕을 위하여 사적 사회관계나 정치 관계를 중시하면서 중앙 권력에 의존하고, 경쟁적으로 이에 접근하려는 생활이 타성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혈연·지연·학연 등에 바탕을 둔 제1차 집단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의한 발상으로, 최근의 지방 선거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기주의의 특성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서 보편화되어 있으며 판단의 비합리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지정학적 특성상 그러한 사적 관계의 정도가 다른 지역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지정학적 특성상 인구 이동이 적고 정체적 성향이 강해 주관적 비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가 더욱 현저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합리주의적 정서주의(emotionalism)에 토대를 두고, 목적에 있어서 사리사욕을 동기로 하여 미이즘(me-ism)이나 나우이즘(now-ism)이 앞서고 있다. 따라서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 공정한 경쟁이 배제된 채, 공적 기준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는 지역 및 혈연적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전근대적 판단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이는 결국 정치적 합리성은 물론, 경제적 합리성마저 배제되는 폐쇄성으로 나타나 지방 자치의 장래를 우려하게 하고 있다.

셋째, 도민들의 정치적 판단에 있어 저항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그간 중앙 집권적 발상에 의한 제주 지역 개발은 소득간·지역간 불균형 발전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중앙 주도형 개발의 여파로 제주도의 개발지상주의는 빈약한 지역 경제력에 따른 중앙 의존성을 심화시켜 주민의 자생력을 상실하게 했다.

이의 결과는 불로 소득의 증대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상대적으로 빈곤감으로 이어져 결국 감정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적 저항의 표출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시기적으로 6·29 선언 이후에 두드러진다.

특히 1990년부터 1991년에 걸쳐 「제주도 개발 특별법」의 제정을 둘러싼 도민의 저항 운동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1990년 9월 3일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제주도 행정 당국의 「제주도 개발 특별 조치법」 시안과 건설부 시안이 정부에 제출되고,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는 도 전체에 걸친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민의 저항 운동은 도지사의 경질을 가져오게 했고, 법안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명칭도 「제주도 개발 특별법」으로 변경되어 1991년 12월 18일 심야 야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반대 운동은 제주도 저항성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할 수 있겠다.

넷째,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지방 자치에 대한 높은 정치적 기대치를 들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현실 의원들의 의정 활동에는 매우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의원 불신도는 매우 높게 나타난다. 이는 물론 제주 지역뿐만이 아닌 전국의 공통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나타난 제주도민들의 정치적 성향에 관한 의식적 특징을 보면 주민과 지방 자체 단체와의 관계에서 하향식 체제에 익숙해 있고, 공적 판단의 영역에 사적 동기가 여전히 개입하고 있다. 주민의 의식은 정부와의 관계에서 정서적 의존성에서 이기적 저항성으로 변하였고, 정치적 기대 수준이 매우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제주도의 현실을 살펴보면 역사적인 피해 의식과 상의하달식의 의사 전달 체계, 정서적 저항이 어우러져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정치 성향은 지방 자체 단체의 정책 결정에 있어 주민 의사의 수렴 및 전달 체계 미비와 함께 제주 지방 자치의 발전에 큰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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