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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815
한자 濟州三-一運動
영어음역 Jeju3·1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Jeju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금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조천 미밋동산
관련인물/단체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배|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정의]

1919년 3월에 제주도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벌인 항일 운동.

[개설]

제주 3·1 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목적]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발단]

조천의 유림 세력들은 전국의 독립운동 시위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당시 조천 출신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 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경과]

김장환·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은 3월 17일경 조천리 미밋 동산에서 거사를 결행할 것을 다짐하고 3월 19일까지 고재륜(高載崙)·김형배·김연배·황진식(黃鎭式)·김용찬·백응선(白膺善)·박두규·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 1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장과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날이 밝자 미밋 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김시범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천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제주성 내를 향하여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시범·김시은·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되었다.

3월 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박두규·김필원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전날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주동자는 연행되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3월 23일에도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다시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백응선·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다.

3월 24일 조천 오일장날에도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이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고 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 14명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만세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결과]

만세 시위 운동으로 1심에서 29명이 기소되어 그중 23명이 1919년 4월 26일 광주 지방 법원 제주 지청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다시 공소하여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 법원 형사 제1부에서 김시범김시은은 각각 1년형, 김용찬과 고재륜은 각각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 14명은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고, 조천에서 교직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 3·1 운동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 출신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 지역에서 민족 교육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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