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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772
한자 政黨活動
영어음역 jeongdang hwaldong
영어의미역 political party activitie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역사적으로 전개된 각 정당들의 정치 활동.

[개설]

정당은 동일한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 조직의 결성을 통해 정치 과정을 통제하고, 특히 정치권력의 획득·유지와 아울러 대중의 일반적 의사, 즉 여론을 수렴·조정하거나 조직·표출하며, 정당이 제시한 정책을 통해 정치적 책임을 다할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자주적이며 지속적인 정치적 단체이다.

우리나라 「정당법」[법률 제7683호, 전면 개정 2005. 8. 4.]에서는 정당을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 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두는 시·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정당이든 모든 정당은 크게 다섯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여론 형성 및 조직화 기능이다. 정당은 개인이나 집단이 정치 체제를 향하여 표출하는 다양한 이익 및 의사를 집약하여 정강·정책으로 국민에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잠재된 이익 및 의사를 여론으로 조직화하여 표출시키는 기능을 한다.

둘째, 정치 지도자와 엘리트 충원의 기능이다. 정당은 대통령 선거, 국회 의원 선거 등 공직 선거에 참여하여 국민들을 대신하여 국정을 수행할 대표자를 배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정당은 정치 교육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당은 당 기관지, 강연회, 집회 및 당의 교육 기관을 통하여 당원 및 유권자를 상대로 정치 교육을 실시한다.

넷째, 관리 갈등의 기능이다. 정당은 사회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신속히 파악하여 정책에 반영함으로써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섯째, 권력 통제의 기능이다. 선거에 승리한 여당은 행정부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구현하는 정책이나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을 추진하며, 야당은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을 비판 또는 견제(牽制)함으로써 권력 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제1~2공화국 시기 정당 활동]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되었던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보수파가 참패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새로운 정당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범석이 창설한 조선 민족 청년단을 기본 조직으로 하고, 사회 단체인 대한 국민회·대한 청년단·대한 로동조합 총연맹·농민 조합 총연맹·대한 부인회 등 주요 단체를 기간단체로 삼아, 1951년 12월 17일에 이승만을 당수,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제주에서는 1952년 1월 12일에 자유당 도당부가 결성되었다. 제주에도 이전에 정당이 존재하였지만, 정강 정책 등 이념에 따라 조직된 경우를 정당으로 파악한다면 제주 지역 정당사의 시발점은 자유당 도당부 결성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초대 임원은 민족 진영의 원로 인사와 청년 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1954년 1월 24일 자유당 도당부는 3대 민의원 후보자로 북제주군 갑에 김영린, 북제주군 을에 강창용, 남제주군에 강경옥을 공천하였다. 그러나 5월 20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북제주군의 두 후보는 각각 무소속의 김석호·김두진에게 낙선하고 남제주군에서만 승리하였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당 공천자를 낸 자유당은 참패하였지만, 입후보자의 당공천제는 정당의 책임 정치에 큰 진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제3대 국회 의원 선거가 있은 후 자유당 제주도당부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유당의 분규는 제4대 국회 의원 선거 제주시 선거구에서 야당 후보에게 의석을 빼앗기고 주류계가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1954년 11월 27일 이른바 ‘사사오입’을 적용하여 이승만의 3선이 가능하게 되자, 재야 세력들이 결집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제주도에서는 4월 27일 자유당을 탈당한 고담용이 중심이 되어 민주 도당부 및 시·군당부 결성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여 창당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제3대 대통령 선거일이 5월 15일이었기 때문에 시일이 촉박하여 선거가 끝난 9월에야 정식으로 창당을 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위원장은 도당 및 제주시당부에 고담용, 북제주군당에 김옥천, 남제주군당에 장수두가 맡았다.

1958년이 되면서 제주시는 북제주군 갑구에서 독립 선거구가 되었으며, 나머지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가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되었다. 민주당 도당부는 2월 8일 제주시구에는 고담용, 북제주군에는 김옥천을 공천하여 선거 태세에 들어갔다.

자유당에서는 북제주군구에서 진문종·김두진·김구·부장한 등 4명이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당시 현역 의원인 김두진 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자유당 도당부는 제주시구의 공천에 불만을 품고 강삼정 제주시구 위원장이 사퇴하고, 다른 공천 경합자들도 간부직을 사퇴하거나 탈당하는 등 내분을 겪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제주시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자유당은 북제주군에서만 승리를 했다.

1960년 3·15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투표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다. 제주도에서는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이 있는 고위직 공무원과 자유당 인사에 대한 사퇴 요구 시위가 계속되었다.

결국 과도 정부는 4월 20일 전인홍 도지사를 해임하고, 이창훈 경찰국장을 파면함과 동시에 경찰 기능을 대신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1960년 6월 15일 국회는 민주당의 당론이었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22일에 「국회 의원 선거법」을, 23일에는 민·참의원 양원을 동시에 선거하자는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하였다.

총선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 정수의 75%에 해당하는 175명이 당선되었고, 참의원 정원 58명 중 31명이 당선되었다. 새로운 헌법과 국회 의원 선거법의 제정 이후 실시한 총선에서는 새로운 정당의 탄생과 입후보자의 난립으로 인한 과열 현상을 보였다.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기 전인 과도기적 정부 아래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 대중당과 한국 사회당이 탄생하였다. 새로운 국회가 열리고 국회 내에서의 대통령은 구파인 윤보선이 국회 의원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당선되었고, 국무총리는 신파인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8월 23일 내각을 발족시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국무총리 선출로 양극화된 민주당의 구파측이 8월 31일 민구 동지회(民舊同志會)를 결성하여 분당에 대비한 조직 확대를 꾀하였다. 당시 임명된 도지사의 부정 선거 관련 여부 때문에 구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민주당에서 구파가 분열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자, 제주의 신파들은 그들만으로 11월 23일 연차 대회를 열어 위원장에 홍문중, 부위원장에 최수진·안정립·김일용을 선출하여 조직을 정비하였다. 구파도 12월 6일 신민당 제주도당 창당 준비 대회를 열어 위원장에 강재량, 부위원장에 임병수·신현범을 선출하였다.

[제3 공화국 시기 정당 활동]

민주당의 내분과 국민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는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이러한 와중에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포고 4호를 내려 의회를 해산시키고 정당 활동을 중단시켰다.

제주도에서는 5월 18일 계엄사령부 제주도 분소가 설치되었는데, 분소장에는 해군 대령 박경철이 임명되었다. 30일에는 해군 준장 김영관이 제주도지사에 임명되었고, 6월 4일에는 계엄 사령부에서 관장해오던 행정 사무가 도지사에게 이관되었다.

1963년 박정희는 5·16쿠데타 세력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2월 26일에 창당 대회를 개최하여 5·16 세력뿐만 아니라 폭 넓은 인사들을 포섭하여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중앙정보부 장관이었던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의 기초 조직을 이용하여 당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 집권적 정당 체제를 갖추었다.

제주도에서는 1963년 1월 10일부터 민주 공화당 제주 지부 결성 작업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지부 창당 준비 위원회는 1월 20일 이승택을 책임자로 사무국을 설치하고, 2월 20일에 창당 대회를 열었다.

위원장에는 김영호, 부위원장에는 홍성효를 선출하였다. 국회 의원 선거법의 개정으로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제주1지역구로 되어서 제주도의 선거구가 하나 줄었다. 민주 공화당 제1지구당은 5월 8일 대표자로 김종희를 선임하고, 그 해 6월 27일 임병수를 대표로 선임하였다.

다른 정당들은 조금 늦게 결성되었다. 5월 14일 구신민당계 김병로와 윤보선은 민정당을 창당하였는데, 제주도에서는 3월에 제1·2지구당(위원장 강재량·강보성)이, 5월에는 도지부가 결성되었다.

범국민단일정당운동에서 이탈한 박순천·홍익표 등 구민주당계는 1963년 7월 18일에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김옥천이 제1지구당을 설립하였다. 1963년 9월 3일에는 단독 제휴에 의한 안정 세력 구축을 표방한 소선규·김재춘·송요찬 등이 자유 민주당을 창당하였는데, 제주도에서는 8월 27일 강재량이 제1지구당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군정 종식과 민주 정치 재건을 표방하여 단일 야당을 구축하려 했던 김병로·허정·이범석·이인 등은 9월 6일 ‘국민의 당’을 창당하였는데, 제주도에서는 9월 27일 제1지구당이 오달인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재야 정당의 소장 정치인을 중심으로 보수당 창당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어 10월 10일 김명윤 위원장을 선출하였고, 제주도 제1지구당 위원장에 고담용, 제2지구당 위원장에 강용삼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보수당은 별다른 활동 없이 1966년 2월에 자진 해산하였다.

선거 후 야당에서는 정당의 난립이 선거 패배의 원인이라는 결론 아래 합당 작업에 착수하였다. 1964년 9월에 ‘국민의 당’이 민주당에 흡수되었고, 11월에는 자민당이 민정당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 한일 협정 비준을 반대하기 위하여 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한일 협정이 비준되자 의원직을 사퇴하자는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주장하는 온건파 간의 갈등으로 강경파들이 민중당을 탈당하여 신한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1967년 2월 11일 야당 후보 단일화의 합의에 따라 재통합하면서 신민당을 창당하여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유진오를 당 대표로 뽑았다.

제주에서도 중앙 정당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창설과 통합이 거듭되었다. 1967년 2월 17일 신민당 제주1지구당(대표자 김두진)이 창당되었는데, 대통령 선거 후인 1968년 5월 13일에 김욱이 대표를 맡았다.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을 반대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던 조재천은 1967년 5월 6일 구 민주당 인사를 규합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제주 제1지구당은 4월 22일 고담용을 대표자로 하여 창당되었다. 민주당은 1970년 12월에 신민당에 합류하기 위하여 자진 해산되었다.

민주 공화당은 1967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 대비하여 선거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7년 2월 15일 제주 제1지구당에서는 공천 후보로 김도준·김보근·임병수·양정규 4명을 추천하였고, 3월 13일 임병수가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며칠 후 양정규로 바뀌는 일이 연출되었다.

1969년 새해에 민주 공화당에서는 3선 개헌에 관한 논의가 있음을 발표했으며 8월 8일 개헌 발의를 위하여 임시국회를 열었다. 이튿날 122명 국회 의원의 서명[민주공화당 108명, 정우회 의원 11명, 신민당 3명]으로 발의되어 국무 회의 의결을 거쳐 개헌안 발의를 공포하였다.

신민당은 3선 개헌을 끝까지 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9월 7일 당을 형식적으로 해체시켰다. 그 해 9월 정기 국회에 개헌안을 상정한 민주 공화당은 신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하여 표결이 불가능해지자, 14일 새벽 2시경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 투표법안을 기습 통과시켰다.

신민당은 9월 20일에 창당대회를 열어 과거 신민당의 조직과 체제를 그대로 복원하여 총재는 유진오, 부총재는 유진산 등이 맡았다. 제주에서는 9월 23일 김욱이 제1지구당 대표자로 지구당을 창설하였다. 3선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 투표에 회부하여 유권자 77%의 투표에 65%의 찬성을 얻어 통과시켰다.

1970년 윤보선을 중심으로 신당 작업이 추진되어, 1971년 1월 23일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제주도는 제1지구당 대표자로 1970년 12월 22일 신두완이 선임되어 창당되었다가, 1973년 7월 2일 자진 해산하였다.

[제4~5 공화국 시기 정당 활동]

제주는 국회 의원 선거법의 개정으로 2개 선거구였던 것이 1개 선거구로 바뀜에 따라 민주 공화당의 지구당이 하나로 개편되어, 1973년 5월 17일 홍병철을 대표자로 선임하였다. 1977년 3월 28일에 지구당 직무 대행으로 고유진을 임명하였고, 1979년 5월 17일 현오봉을 지구당 위원장에 선임하였다.

10월 유신 이후 당시 신민당의 총재였던 유진산의 사망으로 1974년 8월 27일 김영삼이 대표자가 되었으며, 제주에는 1974년 12월 16일에 오정보를 대표자로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한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의 하야 성명 이후 8월 27일 대통령 보궐선거가 행해졌고,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이듬해 새 선거법에 의하여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전두환은 임기 7년의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여 제5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의 시행으로 기존의 정당인 민주 공화당·신민당·통일당 등은 해산되었지만, 정치 활동의 재개에 따라 새로운 정당들이 설립되었다.

먼저 12·12 쿠데타를 일으켰던 신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 정의당(약칭 민정당), 구 신민당 계열이 중심이 된 민주 한국당[약칭 민한당], 구 민주 공화당 및 유정회 의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 국민당[약칭 국민당],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주 사회당과 사회당 등이 출현하였다.

제주에서는 먼저 민정당에서 변정일을 대표자로 하여 1981년 1월 6일 지구당 등록을 하였고, 민권당이 1월 15일 김일용을 대표자로 하여 지구당 등록을 하였다. 국민당은 강창호를 대표자로 1월 21일 등록했으며, 민한당은 김택환을 대표로 24일에 지구당 등록을 하였다.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가 3월 25일 있었는데, 선거에 대비하여 민권당은 3월 9일 대표를 신두완으로 바꾸었다. 제주 지역은 해남과 더불어 유일하게 민정당 소속의 당선자를 내지 못한 지역이었다.

무소속인 현경대와 강보성이 당선되었는데, 당선 후 현경대는 민정당에 입당하여 6월 25일자로 제주도 지구당 대표 서리로 등록하였으며, 강보성은 민한당에 입당하였다.

1984년에는 정치의 해빙기가 도래된 시기였다. 2월 25일 2차 해금과 11월 30일 3차 해금을 통하여 286명에 해당하는 정치인들이 정치금지에서 풀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존 제도권 정당에 정면 도전하는 신한 민주당의 태동을 보게 되었다. 제주에서는 1985년 1월 7일 고수문을 대표자로 하여 신한 민주당 지구당 등록이 있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신한 민주당은 당시 전국에서 황색바람을 일으키면서 민한당을 누르고 제1야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서울·부산·대구·인천 등지에서 민정당을 앞지르는 이변을 속출하였다.

친여적인 민한당의 참패로 소속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신한 민주당에 입당하여, 민한당은 존립이 어렵게 되었다. 당의 참패로 유치송 총재가 물러나고, 새로 당을 맡은 조순형 총재는 결국 4월 3일 신한 민주당과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민한당 제주 지부도 11월 9일에 당의 지부의 법정수 부족으로 등록이 취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권당도 선거 후 중앙당의 등록 취소로 인해, 1985년 2월 15일 제주도 지구당도 등록이 취소되었다. 1986년 신한 민주당 총재로 있던 이민우는 당의 실질적인 실세인 김영삼·김대중의 의견에 반하여 민정당과 내각제 개헌에 대한 물꼬를 트려고 했다.

이에 신한 민주당은 내분을 겪었고 급기야는 양김에 반대하는 세력만 남고 의원 74명이 탈당하여 1987년 5월 6일 대표를 김영삼으로 하여 통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개편은 국민의 가슴 속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간접 선거제를 수호하겠다는 전두환의 의지에 반대하여, 4월 13일 고려 대학교를 시발로 하여 전국에 대학교수들의 호헌 반대 성명이 계속 이어졌고, 학생들의 호헌 반대 시위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에 6월 29일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새로운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하였고, 새로운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민정당에서는 노태우가 전두환에 이어 총재직을 맡았다. 통일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였고, 결국 김대중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1987년 11월 13일 김대중을 대표로 하는 평화 민주당[약칭 평민당]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흐름에 따라 신한 민주당 제주도 지부는 지구당의 당원 부족과 법정 지구당 수의 부족으로 1987년 7월 22일 등록이 취소되고, 1987년 11월 13일 고한준을 대표로 평민당 제주도 지구당을 설립하였다.

[제6 공화국 시기 정당 활동]

1988년 국회 의원 선거법의 개정으로 지역 선거구가 재조정되었다. 종전의 중선거구 제도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거구도 제주시, 북제주군, 서귀포와 남제주군으로 3분되어 지구당도 각 선거구별로 창설되었다.

민정당 제주도 지부는 1988년 3월 24일 제주시 지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북제주군 지구당은 양정규를 대표로 1988년 4월 8일 등록하였다.

한편 김종필이 해금되고 대통령 선거를 위하여 구여권 인사를 중심으로 1987년 11월 11일 신민주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1987년 12월 10일 강창호를 대표로 신민주 공화당 제주도 지부를 등록하였다가, 1988년 4월 4일 북제주군 지구당으로 변경하였다.

평민당 제주도 지부도 4월 4일 제주시 지구당으로 변경하면서, 이양화를 대표로 4월 14일 북제주군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통일 민주당은 강봉찬을 대표로 4월 15일 북제주군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당시의 정국은 여소야대의 국회여서 정국 운영이 어려웠고, 여당에 의한 정권의 재창출이 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정국 안정과 여당에 의한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방법으로 노태우는 민정당을 신민주 공화당·통일 민주당과 통합하여 새로운 거대 여당인 민주 자유당[약칭 민자당]을 창설하였다.

지구당들도 이에 따라 통합하여 제주에서는 1990년 2월 15일 고세진·김성범·신두완을 공동 대표로 제주시 지구당을, 이기빈·강봉찬·강창호를 공동 대표로 하여 민주 자유당 북제주군 지구당을, 강지형·강보성·변정일을 공동 대표로 서귀포시·남제주군 지구당을 등록하였다.

삼당 통합을 반대하는 통일 민주당 잔류세력은 그대로 당명을 유지하다가, 신정치 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잔류 야당인의 평민당도 재야 세력을 규합하여 1991년 4월 5일 신민주 연합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가 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다.

제주시는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을 김태화로 1991년 9월 16일 등록을 하였고, 남제주·서귀포시는 김홍수를 위원장으로, 북제주군 평민당 지구당도 중앙의 절차를 거쳐서 대표자는 이양화로 그대로 유지한 채 1991년 9월 16일 민주당 북제주군 지구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문민정부 시기 정당 활동]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정당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2월 10일 정주영을 대표로 통일 국민당이 세워졌다. 통일 국민당의 경우 제주도에서는 서귀포시·남제주군이 변정일 대표자로 가장 먼저 등록하였다([992. 6. 30]. 북제주군지구당은 1992년 10월 5일 윤태현을 대표로, 제주시지구당은 10월 6일 김창구를 대표로 등록하였다.

그리고 박찬종을 중심으로 신정치 개혁당이 1992년 3월 4일 창설되었다. 1992년 3월 24일 시행된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정당 소속의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하고, 3개 지역구 전 지역에서 무소속이 당선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통일 민주당과 신정치 개혁당이 합당하여 1994년 7월 8일 신민당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민자당은 밀실 정치의 소산이어서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고, 김종필과 그 지지자를 중심으로 탈당하여 1995년 4월 3일 자유 민주 연합[약칭 자민련]을 결성하였으며, 신민당과 합당하였다.

제주도 지부는 1995년 5월 31일 변정일을 대표로 등록을 하였으며, 1997년 11월 27일 고한준으로 대표를 변경했다. 제주시 지구당은 1996년 3월 27일 송재훈을 대표로 등록하였으며, 북제주군 지구당은 강봉찬을 대표로 하여 1999년 1월 22일 등록하였다.

한편 민자당은 1995년 제1회 동시 지방 선거에서 참패한 후 당 분위기 쇄신을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고, 도지부에서는 1996년 7월 23일 양정규를 대표로 등록하였다.

이 기간에 당명의 변경 여부를 살펴보면, 1991년 4월 15일 평민당은 신민주 연합당으로 변경되었고, 민자당은 1996년 2월 7일 신한국당으로, 통합 민주당은 1996년 6월 13일 민주당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국민의 정부 시기 정당 활동]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기 위해 김대중은 1995년 9월 11일 새정치 국민 회의[약칭 국민 회의]를 창당하였는데, 제주도 지부는 1996년 10월 16일 김창진을 대표로 등록하였다.

김대중 지지자들이 빠져나간 민주당은 1995년 12월 21일 장을병이 공동 대표를 맡은 개혁 신당과 통합하여 통합 민주당을 결성하였는데, 양승부가 제주시 지부장을 맡아 1995년 12월 31일에 등록하였다. 통합민주당은 이듬해 6월 13일에 민주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신한국당은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3김 정치 청산을 들고 나오면서 1997년 11월 24일에 민주당과 신설,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 1997년 11월 24일 한나라당 제주시지구당은 현경대와 신두완을 공동대표로, 서귀포시·남제주군은 변정일이 대표로 등록했다. 북제주군은 양정규·강희찬을 공동 대표로 하였으나, 1998년 2월 26일 양정규를 대표로 변경하였다.

결과적으로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 회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이러한 중앙의 흐름에 맞추어 새천년 민주당[약칭 민주당]을 설립하였는데, 2000년 1월 19일 장정언을 대표로 북제주군이, 정대권을 대표로 제주시지구당이, 서귀포시·남제주군에서는 고진부가 1월 24일 등록하였다.

[참여 정부 시기 정당 활동]

민주당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국민 경선을 치르면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기존의 조직과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의 당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2004년 3월 12일 「정당법」부칙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주도지부는 제주도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이는 지구당 제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황]

2006년 현재 제주도에서 공식 활동하고 있는 정당으로는 한나라당 제주도당[대표 강상주, 등록일 1997. 11. 24], 민주당 제주도당[대표 공석, 등록일 2000. 1. 27], 열린우리당 제주도당[대표 강창일, 등록일 2004. 2. 20], 민주노동당 제주도당(대표 김효상, 등록일 2002. 11. 25], 새시대 참사랑 연합 제주도당당[대표 김승혁, 등록일 2006. 5. 16]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제주도지』3(제주도, 2006)
  •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http://www.nec.go.kr)
  • 제주특별자치도 선거 관리 위원회(http://jj.electi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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