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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783
한자 民俗工藝
영어음역 minsok gongye
영어의미역 folkcraft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김순이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생활에 필요한 조형물을 제작하는 기술이나 물건.

[개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화산섬 제주도의 중심에는 1,950m의 한라산이 서 있다. 이렇듯 독특한 자연 환경은 민속공예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제주도의 여러 민속공예품은 재료와 형태에서 육지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한라산 북쪽에 위치한 제주시 지역은 선사 시대 주거 지역이 계속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어, 탐라 시대부터 현재까지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제주시는 기타의 제주 지역에 비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으로, 외부 문물과의 접촉도 활발했으며, 그로 인해 다방면에 걸쳐 민속공예가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제주시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최초의 공예품으로 인정받는 것은 김녕리 궤내기동굴 유적에서 나온 전복 껍질로 만든 화살촉이다. 이 화살촉은 제주도만의 특징을 가진 유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공예품을 전문으로 만들던 공방이 선사 시대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제주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민속공예의 명칭은 주로 재료와 형태에 따라서 붙여진다. 재료에 따른 명칭으로는 목공예·석공예·피혁공예·풀공예·지화공예·죽공예 등으로 나눌 수 있고, 형태에 따른 것으로는 관모공예·옹기공예·수경공예·불미공예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 기술]

1) 관모공예

제주 지역에서 가장 특징 있는 민속공예는 말총으로 만드는 관모공예로서,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갓공예이다. 이밖에도 조선 시대부터 병사의 군모인 털벙것(털벌립), 패랭이(대패랭이), 정동벌립(정당벌립)이 활발하게 만들어져 진상품으로 납품되었다.

말의 고장으로 알려진 제주 지역에 말이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였다. 당시 원나라에서 들여 온 말들을 사육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 환경을 갖춘 곳이 제주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조선 시대로 들어와 제주에 10개소의 국영 목장이 경영되면서 말총을 이용한 관모공예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 털벙것: 봄이 되면 마소는 털갈이를 한다. 아울러 말의 건강을 위해서 꼬리털과 갈기털을 정리해 주는데, 여기서 나온 말의 꼬리털이나 갈기털, 그리고 털갈이에서 나온 묵은 털들은 조선 시대 병사들의 전투모인 털벙것의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털벌립이라고도 하는 털벙것은 털로 직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털과 쇠털을 콩풀과 아교로 반죽하여 모자틀에 골고루 펴놓고 이겨서 눌러 찍었다. 서양의 펠트 직조 방법과 비슷한 방법이다. 털벙것은 빗물이 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견고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수요가 없어져 제작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2) 갓: 조선 시대에서 갓은 양반 신분의 상징이었다. 갓은 모자 부분과 차양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꺼번에 짜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짜서 조립하였다.

말의 꼬리털인 말총으로는 갓의 모자 부분(총모자라고 한다)과 탕건, 망건을 짰다. 탕건은 선비들이 집에 있을 때 머리에 쓰는 모자이며, 망건은 상투를 틀기 위해 머리를 빗어 올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넓적한 띠이다.

갓의 차양은 갓양태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양태라고 부른다. 양태는 대나무에서 명주실과 같은 섬세한 섬유를 뽑아내어 결었다. 따로따로 제작된 총모자와 양태는 한 장당 값을 쳐주고 육지에서 온 상인이 수집한 뒤 통영의 전문 갓장인에게 넘기어 온전한 갓으로 만들어졌다.

총모자와 양태의 수요는 양반 제도가 타파된 일제강점기에 주춤했다가 해방 후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주로 제주시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화북, 삼양, 조천, 신흥, 함덕 지역과 서쪽 지역인 도두, 이호, 하귀, 금덕, 광령, 수산 등에서 활발히 제작되었는데 장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1971년 갓모자, 양태, 망건, 탕건 등 4개 분야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

(3) 패랭이: 대패랭이라고도 하는 패랭이는 조선 시대 때 제주의 중요한 진상 품목이었다. 갓과 거의 같은 형태의 패랭이는 대나무의 한 종류인 이대로 만들었다. 제주 지역 어디에서나 군락을 지어 자생하는 이대는 제주에서 흔히 ‘수리대’, 혹은 ‘살대’라고 불린다.

이대의 특징은 마디와 마디 사이가 길고 마디가 툭 튀어나오지 않아 매끄럽고, 바닷가에서 짜디짠 소금 바람에 시달리며 자라서 웬만하면 좀이 슬지 않고 썩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 시대에서는 제주의 수리대로 만든 화살을 최상품으로 쳐주었다.

패랭이는 유배 가는 선비들이나 상주들이 주로 착용하였다. 섬세하고 우아한 모양으로, 제주에서는 주로 여성들이 오뉴월 땡볕에서 김을 맬 때 착용하였다. 성산읍 난산리에 뛰어난 장인이 있었으나, 1990년대 그가 사망하자 제작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4) 정동벌립: 털벙것과 형태가 같은 모자로, 야산에 자생하는 정동(댕댕이덩굴)의 줄기로 짰다고 하여 정동벌립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털벙것이 주로 마소를 감독하는 관리들이 착용했다면 이를 본뜬 정동벌립은 마소를 돌보는 테우리(목자)들이 주로 착용했다. 가는 줄기로 매우 촘촘하게 결어서 비가 새지 않고, 털벙것처럼 화살도 뚫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단단하다.

한라산을 돌아다니며 마소를 돌봤던 목자들에게 정동벌립은 꼭 필요한 장비의 하나였다. 비바람과 직사광선에도 내구력이 강하여 한번 장만하면 대를 물려 가며 쓴다고 할 정도로 튼튼하여,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험산 산 속에서도 정동벌립만 쓰고 있으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정동벌립은 제주도의 서쪽 지역인 한림읍 귀덕리 지역이 주요 산지이다. 현재는 파나마 모자로 변형한 형태의 정동벌립을 생산하고 있는데, 독특한 관광 특산품으로 인기가 많다. 제주특별자치도는 1986년 기능보유자를 지정하여 정동벌립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

2) 목공예

제주 목공예의 가장 큰 특징은 투박스러울 정도의 단순함과 견고한 실용성, 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제주도는 우리 나라에서 습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이 때문에 모든 목재품은 수축과 팽창, 뒤틀림이나 터짐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조록나무, 붉가시나무, 가시나무, 느티나무, 왕벚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등의 목재들은 단단하면서도 병충해에 강하여 예부터 가구 제작에 많이 이용되었다.

식생활 용구로서 대표격인 남방애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주도 특유의 형태로, 아름드리 통나무를 자귀로 파내어 만들었다. 밥이나 떡을 담는 도구리, 곡식을 되는 솔박과 작박, 수저와 젓가락을 비롯한 밥자, 국자 등은 물론이고 제기도 한라산에서 채취한 잡목으로 소박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주거에 필요한 가구 중에서 제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한 것은 옷가지 등을 넣는 궤였다. 제주 궤의 특징은 단순하면서도 튼튼한 실용성에 있다. 잘 짜인 궤는 물을 넣어도 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연기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 올 정도이다. 이밖에도 살레와 뒤주, 발뒤주, 개다리소반, 등경 등이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3) 죽공예

제주 죽공예의 정수는 패랭이(대패랭이)로서, 이는 관모공예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제주도의 죽공예는 주로 이대(수리대·시누대)를 재료로 하여 견고하고도 실용성이 높은 디자인으로, 장인들에 의해 그 솜씨가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

제주 여성들의 일상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은 구덕에는 제주의 자연 환경과 인문적 배경에서 발생한 특이한 양식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여성들은 드센 바람과 돌멩이가 많은 길의 영향으로 웬만하면 바구니에 물건을 넣어서 등에 지고 다녔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바구니의 형태는 깊숙한 장방형으로 발전하였다.

육아 용구인 애기구덕, 허벅을 넣는 물구덕, 채소를 넣는 송키구덕, 이웃의 애경사에 부조 쌀이나 떡을 담고 가던 가는대구덕, 해녀들이 잠수 도구인 테왁 등을 넣는 물질구덕, 신당에 갈 때만 사용하는 제물구덕 등등, 구덕은 쓰임새에 따라 그에 알맞은 형태로 제작되었고 적절한 명칭으로 불렸다.

이밖에도 죽공예 제품으로 뚜껑이 있는 차롱 종류, 바구니보다 작으면서 속이 얕은 구덕 제작은 제주시의 동쪽에 위치한 멘촌(梅村)[현재의 제주시 도련동]이 조선시대부터 유명하였다. 한때 이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죽공예 장인이거나 중간 판매자로 오일장 전날은 물건을 실어 나가는 마차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플라스틱 그릇이 출현하면서 급속히 사양길에 접어들어 현재는 그 맥이 잇는 사람이 거의 없다.

4) 옹기공예

선사 시대 유적지에서 나오는 토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 지역의 옹기공예는 그 전통이 꽤 오래되었다. 찰흙으로 기와·허벅·항아리·단지 등을 구워내는 기와가마는 제주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지세허벅, 지세항, 지세단지, 지세요강 등 그릇의 명칭에 흔히 ‘지세’가 붙은 그릇들은 빛깔이 짙은 회색 질그릇을 말한다. 이렇게 어두운 빛깔의 그릇을 구워 내는 가마를 ‘검은굴’이라고 하였다. 불때기의 마지막 과정에서 생솔가지와 함께 천연 왕소금을 집어 넣어 ‘연기를 먹인다’는 이 질그릇의 가장 큰 기능은 정화 기능이다.

샘이 없어 항아리에 빗물을 받아서 저장하면서 사용하였던 산촌에서는 지세항아리가 매우 긴요한 생필품이었다. 지세 그릇은 물기를 머금으면 약해서 쉬이 깨졌다. 그래서 차츰 강도 높게 구어진 옹기가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옹기를 굽는 가마는 질 좋은 찰흙이 많은 제주시 광양과 애월읍 광령리, 한경면 고산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었다.

가볍고 입자가 붉은 흙으로 돌로 축조된 가마에서 구워진 제주 옹기는 밝은 벽돌색을 띠며 어디에서나 눈에 확 들어온다. 또한 솔가지를 때면서 생긴 녹갈색의 자연유가 그릇 표면에 달라붙어서 빗살무늬와 천연의 조화를 이룬다. 이렇듯 밝고,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땡땡 하는 맑은 쇳소리가 나는 강도 높은 옹기를 구워 내는 가마를 ‘노랑굴’이라고 했다.

옹기는 문방구인 벼루나 연적에서부터 젓갈을 담는 단지나 물허벅, 고소리, 간장을 보관하는 능생이 등, 물과 간장, 된장 등을 담는 데 사용되었다. 더군다나 습기가 많고 쥐가 많았던 제주에서는 대부분의 곡식을 목제품인 뒤주에 하지 않고 지세항아리에 갈무리하였다. 그러나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기 시작하는 1970년대부터 옹기가마들은 하나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나, 제주 옹기만의 특질이 알려지면서 2000년대로 접어들어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기능보유자를 발굴, 지정하여 전승을 꾀하고 있다.

5) 피혁공예

피혁공예는 주로 조천읍 교래리와 같은 산촌에서 이루어졌다. 말, 소, 개 등 가축의 털가죽과 사냥에서 얻은 사슴, 여우, 오소리, 산돼지 등 야생 동물의 털가죽을 가공하여 외투, 모자, 신발, 주머니 등을 만들었다.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복식 형태는 사냥에서 얻은 짐승의 가죽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가장 호사스러운 복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또한 피혁을 이용한 제품이다.

피혁공예에는 피(皮), 즉 짐승의 털가죽을 털이 달린 그대로 가공하여 이용하는 것과 혁(革), 즉 짐승의 털가죽에서 털을 제거하고 가죽만을 무두질하여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조선 시대에 제주목이 진상했던 품목 중에는 적잖은 종류의 피혁이 있었는데, 이를 장만하는 고도의 기술자들, 곧 갖바치들이 제주 지역에 상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산간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방한복인 개가죽두루마기는 북방계인 고구려의 복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마리의 개가죽을 꿰매는 실은 말이나 소의 힘줄을 건조시켜서 사용하거나 말가죽이나 소가죽을 가늘게 오린 갑실을 사용했다.

개가죽두루마기의 제작자들은 남자들이었다. 개가죽두루마기에 털모자, 가죽버선은 해방 후까지도 산간 지방 사람들에게는 부의 상징과 같은 겨울옷이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전통의 맥이 끊어져 박물관에 유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6) 수경공예(水鏡工藝)

제주 지역에서의 수경공예란 주로 해녀들이 사용하는 물안경과 관련한 작업을 의미한다. 예부터 해녀들은 물안경을 ‘눈’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눈은 안경처럼 두 알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족은눈이라고 불렀다. 그 후 발전해서 보다 시야가 넓게 열리는 큰눈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타원형 안에 두 개의 눈을 다 덮어쓰는 형태이다. 현대의 해녀들은 모두 이런 형태의 물안경을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물안경을 만드는 공방이 제주시 관내에 두 곳이 있었다. 구좌읍 한동리애월읍 구엄리로, 흔히 한동리에서 제작한 물안경은 ‘궤눈’, 구엄리에서 제작한 물안경은 ‘엄쟁이눈’이라고 불렀다. 이는 구엄리의 옛지명 ‘엄쟁이’와 한동리의 옛지명 ‘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녀들은 이 물안경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날을 잡아 장인을 찾아가 맞추었다. 해녀들이 잠수 도구를 제작할 때 선택하는 행운의 날은 개날〔戌日〕이다. 개날에 눈을 맞추면 해산물이 눈에 잘 뜨이고 많이 잡힌다고 믿었다.

한동리의 장인은 여러 가지 물안경 틀을 가지고 있어서 해녀의 얼굴형에 맞는 틀을 골라서 만들어 주었다. 이 때문에 깊은 바다에서도 유리가 깨지거나 안경틀이 우그러들지 않고, 시야가 맑게 보여서 편안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엄쟁이눈보다 갑절이나 비쌀 뿐만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맞추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엄쟁이눈은 값이 저렴하고 오일장에 많이 나왔으므로 시간이 없는 해녀들은 엄쟁이눈을 많이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수경의 제작 기술은 동그란 유리알에 구리판이나 놋쇠판을 오려 끼워 납땜하는 과정으로 제작되었다. 구리판의 두께가 얇으면 깊은 바다에 잠수했을 때 수압의 영향으로 우그러들면서 유리에 금이 가기도 하고 얼굴에 찡겨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1960년대부터 값싼 고무안경이 대량으로 나오면서 수요가 끊어지고 전승의 맥도 끊어지고 말았다.

7) 석공예

석공예는 제주 지역 어디에나 흔한 현무암을 이용해서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제주도에서 돌은 무한대의 천연 자원이었다.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짓는 밭담을 비롯하여 무덤에는 마소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산담을 둘렀고, 울타리에는 바람을 막는 울담을 둘렀으며,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환해장성의 축조도 돌을 이용했다.

제주의 석공예품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연자마로 몰방애라고도 한다. 연자마는 냇가에서 커다란 너럭바위를 골라서 가공한 후 온 마을 사람이 모여들어 협동으로 끌어와 설치했다. 연자마를 제작하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 될 수 없었으므로 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제작하고,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연자마의 제작에서부터 이동,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적어 놓은 ‘입록(立錄)’이 성산읍 신풍리와 애월읍 고내리 등에 아직도 전하고 있어 공동체의 운영의 묘를 엿볼 수 있다.

현무암으로 만든 식생활 용구로는 돌솥을 비롯하여 돌솥뚜껑, 돌기름틀, 돌쟁반, 돌확 등이 있다. 주생활 용구로는 대문의 용도로 사용했던 정낭돌, 마당에나 부엌에 놓아 두고 불을 켰던 솔칵등돌과 돌화리, 물구덕을 놓아 두는 물팡돌 등이 있다.

농기구로는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땅을 다져 주는 돌테와 돌절구, 돌방아, 돌도구리, 맷돌 등이 있다. 이밖에 무덤의 석물로 상석, 향로석, 동자석, 문인석, 석등, 망주석 등이 있다. 특히 동자석은 과감한 간결성과 천진성 등, 독특한 미감을 발산하는 조각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공예품은 무겁긴 하나 반영구적이며 형태가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한 돌멩이에도 상하 좌우가 있고 나름의 무늬와 결이 있다. 이를 적절하게 다루어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야말로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돌을 다루는 장인들을 제주 지역에서는 ‘돌쳉이’라고 불렀다.

8) 풀공예

육지에서의 풀공예는 거의 대부분 볏짚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민속공예품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주도는 논으로 경작 가능한 면적이 2%도 채 안 되어 볏짚이 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육지와 달리 풀공예의 재료로 볏짚 대신 산디(밭벼)짚이나 어욱(억새)과 새(띠) 같은 야생풀을 이용하였다.

산디는 밭 중에서도 가장 기름진 밭을 골라 재배하였다. 산디짚은 볏짚에 비해 길이가 짧고 푸석거려서 멍석이나 짚신을 삼는 재료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초신이라고 하여 짚신 대용으로 만들어서 남녀 모두 신고 다녔다.

제주에서 가장 흔한 풀은 어욱(억새)과 새(띠)였다. 억새는 새의 일종으로 새보다 키가 크고 억세어서 억새라는 이름이 붙은 풀로 제주도의 중산간 어디에서나 무성하게 잘 자란다. 억새를 이용한 화심, 띠를 이용한 우장, 댕댕이덩굴로 짠 정동벌립, 억새의 속잎으로 짠 망시리 등은 바람 많고 비 많은 제주 지역의 특징을 잘 말해 준다.

이밖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물가에서 자생하는 자오락의 잎으로 망시리나 멱서리를 만들었고, 칡이나 갈대·대싸리·모시풀·왕모시풀 등등 야생의 풀과 덩굴들을 알맞은 계절에 채취해 두었다가 농한기에 여러 가지 생활 용구로 제작하였다.

9) 불미공예〔鑄物工藝〕

불미는 풀무의 제주 방언이다. 불미공예는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용광로의 쇠를 녹여서 일정한 틀에 부어 농기구 등을 만드는 기술이다. 제주 지역에서는 이렇게 쇠를 다루는 일을 불미질이라 하고, 그런 장소를 불미간, 또는 ‘불미대장간이라 부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불미쟁이라 하였다.

불미에는 손불미와 토불미, 두 종류가 있다. 손불미는 한두 명이 하는 소규모로 손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쇠를 녹이거나 달구어 호미나 식칼 같은 작은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땜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똑딱불미라고도 하였다. 똑딱불미는 도구가 간편하므로 마을이나 오일장터에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수선도 해주고 주문도 받았다.

토불미는 골풀무라고도 하는데,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대형의 기물을 대량으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을의 장정 대부분이 소속되어 나름의 역할을 맡아 일을 거들게 된다. 땅바닥에 장방형으로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가로박고, 그 위에다 골에 맞는 널빤지를 걸쳐 놓아 한쪽에 세 사람씩 서서 널빤지의 두 끝을 널뛰기 하듯 디뎌 가며 바람을 일으켜 용광로의 쇳물을 달구어 내는 것이 골풀무이다.

이렇게 바람을 일으켜 둑(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미리 만들어 놓은 뎅이(기본(器本))에 부어 넣으며 솥이나 볏, 보습 등을 주조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이러한 토불미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안덕면의 ‘덕수리불미공예’를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하여 보호·전승하고 있다.

[전승 현황]

현재 민속공예 부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제주시에서 모두 네 명으로, 제4호인 갓일 양태 장순자와 총모자 김인, 제66호 망건장 이수여, 제67호 탕건장 김혜정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지정 무형문화재 공예 부문 기능보유자로는 제7호 덕수리 불미공예 송영화, 제8호 정동벌립장 홍달표, 제12호 고분양태 송옥수, 제14호 허벅장 신창현 등 네 명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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