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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640
한자 濟州人-心性-童子石
영어음역 Jejuinui Simseongeul Dalmeun Dongjaseok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김유정

[개설]

동자석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형상이다. 동자석은 동제석·동석·동주석·동제상·애기동자·자석 등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 다르게 부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자석이라고 부른다. 제주의 민묘는 부등변 사각형의 산담으로 둘러져 있고, 그 속에 동그란 봉분이 있고 묘주의 심부름꾼이라 할 수 있는 소담한 동자석이 쌍으로 마주보고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동자석은 작고 귀여운 것이 특징인데 제주의 대표적인 석상으로 일컬어진다. 이 동자석은 단순미라는 현대적 미감을 갖고 있으며, 소박한 멋이 스며 있어 자연 친화적인 제주의 토착미를 대변하는 역사 미술 자료이다.

[제주적 양식으로 정착한 석물]

제주의 동자석에는 여러 종교가 습합되었는데 불교, 무교, 도교, 민간신앙의 요소가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제주의 동자석은 유교 문화의 중심권에서 잉태되어 변방인 제주에까지 흘러와서 제주 지역의 독특한 풍토와 여러 신앙과 만난 결실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반도의 동자석이 불교적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채 지역마다 약간의 특징만을 남기고 있는 데 반해, 제주의 동자석은 분명 한반도로부터 온 입도 시조나 부임하는 제주목사, 제주 출신의 양반 토호, 유배인들에 의해 전파되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제주의 풍토와 사상에 의해 재탄생한 제주적인 석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제주에 유입되는 시기는 15세기이다. 이때 유교식 지방 관료들에 의해 유교식 상장제례(喪葬祭禮)가 시행되면서 지금과 같은 무덤이 만들어지게 된다. 현재 조사된 동자석 지표 조사에 의하면, 동자석은 조선 중기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발흥기(17세기), 융성기(18~19세기), 쇠퇴기(20세기~1970년까지), 소멸기(1970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주의 동자석은 17세기에 서서히 발흥하기 시작하여 18~19세기에 이르러 최고의 정점에 달하였고, 20세기 후반까지 그 맥을 이어오다 현재에는 한반도에서 완성되어 들어온 화강석 동자석으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동자석들은 제주의 동자석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자연과의 부조화 때문에 제주의 무덤을 더욱 어색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영혼의 벗 동자석]

동자석의 기능은 무엇일까. 무덤 앞에 세워진 동자석은 사자(死者)를 위한 예를 갖추고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사자(死者)를 위한 제례를 행하기 위한 숭배적 기능, 영혼의 심부름꾼이라는 봉양적 기능, 영혼을 지키는 수호적 기능, 가문의 권위(權威)를 알리기 위한 무덤의 치장(治裝)을 위한 장식적 기능, 사자(死者)를 달래기 위한 주술적 기능, 영혼의 벗으로서의 놀이꾼으로서의 유희적 기능 등 영혼의 벗으로서의 여러 기능을 묵묵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생김새의 동자석]

동자석의 형태는 동남형(童男形)·동녀형(童女形)·금수형(禽獸形)이 있고, 내용에 따라 문자형(文字形)·기물형(器物形)·기하학 무늬형·배례형(拜禮形)·무사형(武士形)·의례형(儀禮形)·해학형(諧謔形)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자석은 시대에 따라 양식이 변하였다. 원통형 동자석은 편년이 오래된 발흥기의 동자석이다. 반원형은 앞면은 부드럽게 각이 지고 뒷면은 반원형이거나, 앞면은 반원형이고 뒷면은 각진 동자석으로 융성기의 동자석이다. 각주형은 쇠퇴기의 동자석으로 사각기둥 형태이거나 민머리가 많고 조형성이 떨어지고 거칠며 표현이 조악하다.

동자석의 크기는 보통 지상에 세웠을 때 40㎝~90㎝ 정도이며 땅속에 묻힌 정도가 10㎝~20㎝가 된다. 동자석의 비례는 2.5등신에서 4등신으로 얼굴부분이 전체 몸에 비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동자석이 세워지는 위치]

동자석은 일반적으로 산담 안 상석과 묘비 앞 배계절(拜階節)에 세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세운다. 묘지에 동자석을 세우는 형식에는 기본형·변형형·특수형으로 나눌 수 있다.

기본형에는 비석과 동자석 2기를 세우는 경우와 비석·동자석·망주석을 세우는 경우, 그리고 비석·동자석·문관석·망주석 등의 순서로 세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변형형에는 비석·동자석 4기·문관석이 있거나, 그리고 비석 없이 동자석만 있는 경우나, 비석과 문관석만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원래 제주의 묘지의 석물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상석과 토신단이다. 상석은 그야말로 망자를 위한 제상(祭床)이고, 토신단은 토지신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필수로 갖추어야 한다. 그나마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어야 비석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과거 진상과 탐관오리의 착취, 가뭄에 시달리던 제주의 경제적 조건에서는 동자석·문관석·망주석은 기본적인 재력이 있어야 세울 수 있는 고급 석물이었다.

산담이 웅장하게 만들어졌거나 그곳에 석물을 골고루 갖추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 집안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결국 묘역의 크기와 거기에 맞게 잘 갖춘 석물은 가문의 위세를 나타나는 기념비적 조형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동자석이 모시는 묘주의 신분]

동자석이 세워진 무덤의 묘비에는 묘주의 신분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부녀자의 직급은 부(夫)에 준한다고 했다. 그러나 호적상의 직역(職役)의 신분적 지위는 통시적(通時的)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다. 제주의 무덤 중 동자석이 있는 무덤을 대상으로 묘비에 기록된 벼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자의 묘비에 기록된 벼슬

학생(學生)은 일반 서민을 일컫는 말로 아들이 벼슬할 경우 아버지의 무덤에 동자석을 같이 세우는 경우가 있다. 처사(處士)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선비나 속세를 떠나 사는 야인을 가리킨다. 진무(鎭撫)는 진무리(鎭撫吏)의 줄임말로 조선시대에 병영, 수영, 진영 등에 딸린 서리(書吏)를 말한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조선시대 무관 벼슬로서 정3품 당상관의 첫째 품계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는 문관, 무관에게 주는 종2품의 벼슬이다. 통정대부는 문관 벼슬의 정3품 당상관의 첫째 품계이다. 제주 무덤의 신분 중 비교적 많이 나타난다.

이 품계는 장수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수직(壽職)으로 증직(贈職)하는 경우가 있고, 진상품 운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증직한 경우, 그리고 구한말 매관매직의 병폐가 심할 때 가장 많이 유행하던 직위이다.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는 예조의 정3품의 벼슬이다.

유학(幼學)은 벼슬하지 못한 양반층을 이르는 말이다. 업무(業武)는 중인 신분으로 조방장이나 초관(哨官: 군영에 소속된 종9품 벼슬)에 임명된다. 선무랑군자감주부(宣務郞軍資監主簿)는 군자감에 소속된 종6품의 벼슬이다.

호장(戶長)은 각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 아전들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이다.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고 부른다. 유향별감(留鄕別監)은 유향소라는 향청(鄕廳)의 한 벼슬아치로 좌수(座首) 다음의 직책이다. 유향좌수(留鄕座首)는 각 고을에 있는 향청의 우두머리, 지방 토호 세력의 우두머리로서 고을 수령의 통치를 도와준다. 후일 주사로 고쳐 부르게 된다.

훈장(訓長)은 글을 가르치는 선비이다. 사과(司果)는 오위(五衛)의 종6품 벼슬이다. 경희궁위장(慶熙宮衛將)은 궁을 지키는 벼슬이다. 공생(貢生)은 향교에서 공부하면서 심부름하던 사람이며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은 무과 시험을 조직하며 군사 훈련과 병서(兵書) 연구 등을 맡아보는 훈련원의 종5품 벼슬이다.

무과천총훈련원봉사(武科千摠訓練院奉事)는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조직하며 군사 훈련과 병서(兵書) 연구 등을 맡아보는 훈련원의 종5품 벼슬이며 천총(千摠)은 훈련도감, 어영청 등의 정3품 벼슬이다.

선략장군오위장(宣略將軍五衛將)은 오위의 우두머리 벼슬이다. 처음에는 종2품이었으나 후에 정3품으로 직급을 내렸다. 감찰(監察)은 사헌부(司憲府)의 정6품 벼슬이다. 의관(議官)은 중추원(中樞院)의 한 벼슬로서 1895년(고종 32)에 설치되어 1905년(광무 9년)에 찬의(贊議)로 고쳐 불렀다. 시정(侍正)은 정3품의 벼슬로 아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직급이다. 통사랑(通仕郞)은 문관 벼슬의 정8품의 품계이며 승사랑(承仕郞)은 문관 벼슬의 종8품의 품계이다.

이조참의(吏曹參議)는 이조의 정3품 당상관 벼슬이다. 현감(縣監)은 작은 고을 현(縣)의 우두머리 벼슬이며 종6품에 해당한다. 호조참의(戶曹參議)는 호조의 정3품에 해당하며 당상관 벼슬이다. 군수(郡守)는 군(郡)의 우두머리 벼슬로 외관직이며 종4품의 벼슬이며 1467년(세조 12)부터 군수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참봉(參奉)은 봉상시, 사옹원, 군기감, 전옥서, 활인서와 각전, 능, 원 등에 소속된 종9품의 벼슬이다. 자헌대부중추동지사(資憲大夫中樞同知事)는 문관, 무관 벼슬아치들의 정2품 둘째 품계에 해당한다. 만호(萬戶)는 각 도의 진(鎭)에서 군사를 통솔하는 종4품의 무관 벼슬이다.

병절교위(秉節校尉)는 정5품의 무관직 벼슬이고, 가의대부청사공신(嘉義大夫靖社功臣)은 문관, 무관 벼슬아치들의 종2품 첫째 품계로서 영조 때 가정대부(嘉靖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이다.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은 오위도총부 종4품 벼슬인데 현직이 없는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임명한다.

전적(典籍)은 성균관의 정6품 벼슬인데 성균관의 정원은 16명이었다. 도사(都事)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관직이다. 조선시대에는 각 감영에서 관찰사의 일을 돕는 한 벼슬로서 종5품으로 관찰사 다음 가는 벼슬이다. 지방 관리의 불법을 규찰(糾察)하고 과시(科試)를 맡아보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2. 여자의 묘비에 기록된 벼슬

정부인(貞夫人)은 조선시대 정2품 또는 종2품의 문관·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에게 주는 외명부(外命婦)의 직위에 해당한다. 숙인(淑人)은 조선시대 정3품 당하관인 문·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와 종친의 처에게 주는 정3품 또는 종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공인(恭人)은 조선시대 정5품 또는 종5품의 문관·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에게 주는 외명부의 한 직위이다. 의인(宜人)은 조선시대 정6품 또는 종6품의 문관·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에게 주는 외명부의 한 벼슬에 해당하며. 1865년(고종 2)부터는 종친의 처에게도 주었다. 단인(端人)은 조선시대 정8품 또는 종8품의 문관·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에게 주는 외명부(外命婦)의 한 직위이다. 유인(孺人)은 조선시대 정9품 또는 종9품의 문관·무관 벼슬아치의 처(妻)에게 주는 외명부(外命婦府의 한 직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제주 무덤에 나타난 품계를 종합해 보면, 무덤의 석물은 정확히 벼슬한 사람들의 몫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무덤의 크기나 석물의 수효는 직급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나 제주는 중앙과는 먼 변방이어서 왕족이나 종친, 고위 관리가 상대적으로 드물어 무덤 석물의 규모에 큰 차이는 없다.

간혹 입도 시조의 묘역이 크게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한반도의 묘역보다는 작았다. 특히 무덤의 석물 중에서도 동자석이 많이 세워진 것은, 문인석이 그 벼슬이 명확하게 나타난 사람들의 무덤에 세워지게 되면 의당 동자석도 함께 세워졌기 때문이다. 동자석만이 세워진 것은 비교적 하위직 벼슬이나 서민에 가까운 향청의 서리, 여성의 묘 등의 경우이며, 달리는 경제적인 이유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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