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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513
한자 農業
영어음역 nongeop
영어의미역 agriculture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성보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식물·가축의 재배와 생산 및 품질 관리.

[개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농사지천하지대본(農事之天下之大本)’이라는 중국의 옛 말에 따라 농업을 인간 생활의 텃밭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 말이 가진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천하지대본’에서 종종 도외시되었다.

특히 현대의 기계·물질 문명의 발달,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세계적인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농업의 생산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관련된 여러 식생활 분야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농업 환경]

제주도는 지리적 여건으로 토착 경제 기반이 없고 전도적으로 농업과 축산, 수산업에 의존하여 생활하여왔다. 일제강점기에는 고구마·맥주맥·제충국·박하·담배·공업원료 작물 생산에 중점이 두어져 식량작물 생산은 뒤로 밀렸고, 생산기술도 발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했다.

1970년대가 되면서 도시 대자본이 제주도 감귤산업에 투자되기 시작하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규모가 30㏊ 이상 되는 대규모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제주도의 감귤산업은 최대 번성기를 맞으면서 제주농가 소득의 50~60%를 점유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때 제주도의 전통적인 식량작물인 보리 재배는 자취를 감추었다.

1990년대 제주도 농가 총 조수익의 67%를 점유하던 감귤산업은 2000년대 들어 점차 쇠퇴사업으로 전락하면서 농가 총 소득의 40% 이하에 이르렀다. 감귤산업을 위협하는 산업이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 즉 외국 농산물의 수입에 있음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감귤산업의 틈바구니에서 감귤 재배가 어려운 제주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하여, 감자가 제주도의 경제작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1년도에는 감자가 농가 총 조수익의 4.4%를 점유하여, 감귤 다음으로 제주도 농가의 소득 작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제주 농업의 선도 작물이 사라지면서 대응작물이 출현되지 못했다. 다만 감자의 비중이 13% 수준, 마늘이 7.7% 수준까지 이르기는 하였으나 많은 종류들이 조수익 구성비에서 평준화되어가는, 즉 다품목 소량생산 현상이 제주도 전체 농업의 현상이었다.

8·15 광복 후 제주 농업의 발전상은 보리 재배가 주된 농업에서 고구마 재배에 밀려나고, 고구마는 유채에 의해, 유채와 고구마는 감귤에 의해 밀려 주종의 자리를 넘겨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2000년 이후 감귤이 쇠퇴하면서 그 자리를 어떠한 작물에 물려주어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매우 불투명하여 제주 농업은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 구조]

제주도의 농업 인구는 1953년도 인구 대비 90.5%였으나 1961년에는 83.4%로 감소했다. 이는 도내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농민의 비율이 낮아졌고, 1953년도 제주도 인구에 비해 1961년도에는 113.1% 증가한 반면, 농업인구는 104.2%로 증가하여 농업인구증가율보다 전체 인구증가율이 높아 전체 인구에 대한 농업인구의 비율이 결과적으로 낮아진 때문이다.

1961년을 기준으로 연도별 전체 인구증가율을 보면 1980년에는 164.4%, 2000년에는 193.0%로 증가하였으나, 농업 인구의 증감률은 1980년대 103.6%, 2000년에는 55.0%로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는 비율로만 감소한 것이 아니라 절대 농업인구수가 감소한 것으로, 특히 2000년에 농업 인구는 1965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농민 1인당 경지면적은 1961년 551.7평으로, 이후 연도별로 1975년까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980년이 되면서 1인당 경지면적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80년 112%에서 1990년 181.5%, 2000년 1,375.3평으로 약 2.5배 증가했다. 1인당 경지면적이 이렇듯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은 그간 경지면적이 점차 증가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농업인구의 급속한 감소에도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업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료 생산과 공급을 살펴보면, 1960년대 들어서 비료의 수요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행정적으로도 연도별 자급비료 생산계획을 수립하여 생산을 독려하여왔다. 하지만 1975년 이후가 되면서 자급비료의 생산 독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학비료의 공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화학비료의 공급은 1988년 1월 판매자유화가 되면서 1990년 이후 비료 사용량을 급속하게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2000년에는 비료의 적정시비 교육과 유기농업이라는 관점이 등장하면서 비료 사용량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기계 도입은 1966년 처음으로 경운기 6대가 보급된 것을 시발점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10년 후인 1976년에는 2,574대, 2000년에는 2만 6,598대가 보급되었다. 트랙터의 보급은 1971년 43대를 시작으로 2000년에 2,330대가 보급되었으니 2000년 기준 트랙터 1대당 25.4㏊, 경운기 1대당 2.2㏊, 동력분무기 1대당 2.7㏊를 관리하게 되어, 전국 평균치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동력분무기는 감귤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과수원을 개원하면 필수 농기계로 갖추도록 권장되었다. 1995년 이후에는 감귤 농가에 스프링클러의 보급이 이루어졌으나, 방제의 효율성이 낮아 많이 보급되지 못했고, 농가에 부담만 안겨주고 말았다.

[농업 생산]

제주도에서 식량작물은 맥류·조·쌀·두류가 주종을 이룬다. 1950년대 이후 1965년까지 식량작물의 생산은 점진적으로 증가했고, 이후 점차 감소하여 1995년 생산량이 1953년도 생산량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1965년도 전후는 제주도 식량작물 생산의 전환점이 되고 있으며 이는 곧 농업생산이 식량작물 생산에서 경제작물 생산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식량작물의 주종을 이루던 나맥의 경우 1975년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90년 이후에는 전체 식량작물의 생산량 비율에서 5% 이하가 되어 식량작물의 의미는 상실되었다. 1980년 이후에는 대맥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맥주원료로 판매되기 때문이고 식량의 의미는 전혀 없었다.

1960년도를 전후하여 특용작물로 고구마·유채 등을 생산하던 것이 무·양파 등으로, 식량작물에서 경제작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원예작물이 경제작물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제주도의 농업은 1980년대가 되면서 원예작물 중심으로 크게 바뀌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 제주도의 농업은 감귤이라는 단일작물로 집약되었다면, 1980년대에는 원예작물 생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파인애플 생산과 바나나의 생산을 시도하여, 1988년도에는 농가 조수익 구성비에서 이 두 작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10.4%에 달하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는 그 비율이 2.8%, 5년 후에는 0.04% 이하로 낮아지면서 결국 제주 농업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농산물 개방과 우르과이라운드(UR) 협상이라는 국제적 개방환경에서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1~2년 사이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가 제주도 최대 경제작물에서 물러나면서 남기고 간 것은 철재 파이프 비닐하우스 시설이다.

제주도에서 화훼 재배는 역사가 매우 짧아 공식적으로는 1988년도부터 집계되었다. 화훼에 대한 연구와 소규모의 재배는 1980년경부터 양란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백합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제주도에서 경제적 의미의 화훼가 생산·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훼의 분류별로는 재배 면적에서 절화류가 40%를 점유하고 있으나, 단위면적에 대한 소득에서는 분화류가 가장 높아 1㏊당 3억 100만 원에 이른다. 절화 재배인 경우는 1㏊당 1억 7,000만 원으로, 분화재배에 비해 56.5%에 지나지 않아 분화류 재배가 조수익률이 가장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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