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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92
한자 金時容
영어음역 Kim Siy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66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66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6년연표보기
몰년 1945년연표보기
본관 김해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김태호(金泰鎬), 어머니는 고유흠(高柔欽)이다. 외숙부는 제주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 사상가 고순흠(高順欽)이다.

[활동사항]

1925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하여 김시균(金時均)·김성온(金成溫) 등과 함께 오일회(五一會)를 조직하고 노동 야학을 운영하였다. 부친이 설립한 조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을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 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였다. 제주도의 첫 사상 단체인 신인회(新人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일본부에 입당하였다. 1928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강연대에 동참하여 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강연하였다.

건강 악화로 귀국한 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국제적색노동조합 조선협의회 부산지부를 결성하기 결성하기 위해 공장사를 조직하였다. 1931년 5월경 부산에서 조선방직 외 여러 공장의 총파업을 주도하였고, 부산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이로 인해 1931년 11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제주로 귀향하여 아버지가 경영하는 비료상 및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7년 8월에는 제주도 농민조합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순국한 부생종(夫生鍾)의 공적을 기리어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가 각종 부담금을 부가하고 군수 물자의 공출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였다. 1938년 9월에는 일제의 경방단(警防團)에 반대하여 조선 청소년을 대상으로 거부 운동을 펼쳤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육군 및 해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7월 23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유해는 목포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가 1945년 11월 조천면 민장(民葬)으로 치러졌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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