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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서원 묘정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292
한자 橘林書院廟庭碑
영어음역 Gyulim Seowon Myojeongbi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in Gyullim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오현길 7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원비
건립시기/일시 185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김정|송인수|정온|김상헌|송시열|장인식|김희정
높이 129㎝
너비 60㎝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오현길 75]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제주도 기념물 제1호
문화재 지정일 1971년 8월 26일연표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

[개설]

귤림서원 묘정비는 1850년(철종 1) 제주목사 장인식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그 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892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 김희정 등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건립경위]

서원비라고도 하는 묘정비는 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이다. 귤림서원 묘정비는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충암 김정·규암 송인수·동계 정온·청음 김상헌·우암 송시열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며, 교육 기관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던 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92년 ‘오현단’과 함께 다시 세워졌다.

[형태]

비신(碑身)의 너비는 60㎝이며 두께는 18㎝, 전체 높이는 129㎝이다.

[금석문]

전면에는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라고 적혀 있고, 후면에는 장인식(張寅植)귤림서원의 내력과 비석을 새긴 연유를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피면,

“탐라성의 남쪽에 예부터 충암의 사당이 있어 평정공 이약동과 함께 배향하였는데, 평정공은 바로 이 제주에서 목사를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이 드러났었다. 숙종 1년 을묘년(1675)에 지호 이선이 순무하는 길에 충암 선생의 도학과 절의로 볼 때 한 사당에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옆에 향사를 별도로 짓고 평정공을 옮겨 봉안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영해사’이다.

숙종 8년 임술년(1682)에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세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서원을 세우고 편액을 하사하여 ‘귤림서원’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을해년(1695)에 우암 송시열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다섯 선생은 학문은 비록 길을 달리했으나 도의 귀착점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인의를 성으로 삼고 충효를 행으로 삼으며, 성현을 법으로 삼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을 공으로 삼았다.

충암 김 선생은 휘가 정이요, 호는 충암이며, 시호는 문간공이다. 중종 때에 요순시대와 같은 다스림에 뜻을 두어서 정암 조광조 선생과 마음을 합하여 도와서 삼대처럼 성인의 교화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곤심정의 무리들이 하룻밤 사이에 신무문으로 몰래 들어와 기묘년(1519)의 측량할 수 없는 사화를 빚어냈다…….

(耽羅城南 古有冲庵廟 與李平靖公約東同享 而平靖公卽刺是州 以淸白著名者矣 肅廟乙卯 芝湖李公選巡撫之行 以爲冲庵先生道學節義 一廟同餟 有所未安 別搆鄕祠右傍 移奉平靖公 是所謂永惠祠也 肅廟八年壬戌 合享宋圭庵 金淸陰 鄭桐溪三先生 立書院 而賜額曰橘林 後十三年乙亥 追享尤庵宋先生 五先生學雖殊轍 道則同歸 盖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 聖賢爲法而辭闢爲功 夫冲庵金先生諱淨字冲庵諡文簡 當中廟有意於堯舜之治 與靜庵趙先生協心贊襄 期復三代聖化 不辛袞貞輩 一夜之間 從神武門…….)

[현황]

귤림서원 묘정비가 있는 오현단은 현재 제주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귤림서원 묘정비는 유학과 유교 문화의 전당으로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하였던 귤림서원의 의의를 일깨우는 유서 깊은 유적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