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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46
한자 柑橘
영어음역 Gamgyul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개설]

감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동안 가장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감귤이 진상되면 중앙 정부에서는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여 경축했을 만큼 귀하디귀한 과실이었다. 그러나 감귤 진상은 제주도민에게는 크나큰 노역과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제주민에게 감귤의 의미는 전혀 달라졌다. 진상으로 인한 노역과 부담의 존재가 아니라, 제주도민 특히 제주 농가의 가장 큰 수입원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이 개방되면서 감귤 생산은 위기에 처해 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진상품]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감귤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1052년(고려 문종 6)에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11세기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을 진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감귤이 재배되었을 것이므로 제주 감귤의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중앙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수취 체제도 강화되었다. 수취 제도 중 진상 제도는 고려 초 이래로 행해졌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더욱 정비되었다. 제주도의 진상물 중 과실의 진헌을 위하여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제주목사는 5개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였고, 이후 1530년(중종 25)에는 과원이 30개소에 달하였다. 이는 기존에 파악되지 않았던 과원의 수에 이수동 제주목사의 과원 설치 이후 파악된 수이다.

17세기 중반에는 과원이 37개소에 이르며 각 과원의 위치 및 설명이 나타난다. 18세기 전반에는 과원이 42개소로 증가하고,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원의 증설은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감귤의 진상은 감귤의 익는 정도에 따라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이루어졌다.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봉진되었다. 『남환박물』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귤은 2월이 되어야 맛이 좋아 2월에 진상하였다. 감귤은 생과 외에 약재로도 중요하여 12월에 세초 진상이라 하여 진피·청피·귤핵 등이 꾸준히 바쳐졌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감귤 진상 액수가 줄어들었다. 1801년 공노비의 해방으로 과직을 구하기 힘들어져 공과원(公果園)의 감귤 생산 액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과원(私果園)의 감귤 징수를 늘리게 되자, 부담이 가중된 농가에서 감귤 재배를 기피하게 되어 차차 감귤 생산이 줄어들고 진상 액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일부 감귤의 생산이 특히 저조하여 19세기 중반에는 특정 감귤류에 대해서 대봉(代奉)이 이루어졌다. 금귤을 대신하여 당금귤과 유감으로 봉진하였고, 등자귤 대신에 동정귤, 산귤 대신에 감자를 봉진하였다. 그러나 『제주계록』에는 대봉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동정귤 대신에 등자귤을, 유감 대신에 금귤을 진상하였고, 후에는 금귤과 등자귤의 생산도 많지 않아 모두 산귤로 대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감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이 많아져 급제자가 증가하여 폐단이 생겼을 때, 다른 과거 시험들은 줄였으나 황감제만큼은 계속 시행했을 만큼 감귤 진상은 의미가 컸다.

[감귤 진상의 부작용]

감귤은 천신이나 진상으로 바쳐지는 공식적인 용도 이외에도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사사로이 감귤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폐단이 있었다. 즉 중앙의 재력가에게 바치는 뇌물로 쓰이거나 사적인 용도를 위해 징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수취 이외에 사적 용도로 사용되면서 감귤의 진상 액수는 규정보다 많아지게 되고, 진상 액수의 과다로 인한 폐단이 있었다.

또한 관에서는 더 많은 감귤을 징수하기 위해 8월경에는 직접 감귤나무의 열매 개수를 기록하여 열매가 떨어지거나 나무에 손상이 있을 시에는 감귤나무 주인에게 책임을 물었으니, 이 또한 제주도민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감귤이 풍작을 이루어도 멀리 떨어진 섬 제주에서 진상을 위한 운송 또한 어려움이 많았다. 바람의 때를 기다려야 했으며,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감귤이 썩어서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풍랑을 만나 표류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외래 감귤나무의 식재]

현재 많이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과 만감귤은 도입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 출신 엄탁가[Emsile, J. Touguet] 신부가 제주에 오게 되어 서귀포시 서홍동 성당에 13년간 근무하면서 제주산 식물을 연구하였다. 그는 벚나무의 원종을 한라산에서 발견하여 벚나무 원산지가 제주임을 규명하기도 했다.

1911년 제주산 벚나무를 일본에 있는 신부에게 보내고 그 대가로 온주밀감 15주를 심은 것이 현재 제주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의 효시이다. 같은 해 서홍동 출신 김진려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접목 강습을 받고 온주밀감과 워싱톤네이블을 가지고 와서 식재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규모를 갖춘 큰 농장으로 개설된 것은 서귀읍 서홍리에 일본인 미네[峯]가 개원한 현재의 제주농원이다. 1913년에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 식재하였는데, 그때 심은 고목이 일부 남아 수확을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온주밀감을 비롯하여 하귤 기타 잡감(雜柑) 등이 재배에 성공하자 감귤 재배에 관심을 가진 농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제 탄압 하의 농가의 여건으로 보아 고도의 기술과 자본 조달이 필요한 감귤원을 개원한다는 것은 특수한 농가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 농가에서는 개원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단지 몇 그루씩 정원수로 심는데 그쳐 재배 면적 16㏊에서 80여 톤을 생산했을 뿐이다.

[감귤 재배의 비약적 확대]

해방 후 감귤 재배에 대한 의욕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1948년 발생한 4·3사건은 제주도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고, 심어져 있던 감귤도 폐작(廢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방 후 1955년까지 10년간은 감귤 산업이 침체되어 면적의 확대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외국산 감귤의 수입 금지로 수익성이 보장되고 4·3사건의 여파도 가라앉은 1955년부터 감귤 재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감귤 묘목의 도입을 서두르는 한편, 도내에서 묘목을 생산·보급하게 됨에 따라 감귤 재배 농가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1955년부터 1964년까지 10년간에 389㏊가 증식(增殖)되어 제주도의 감귤 재배 면적은 407㏊까지 확장되었다.

제주의 감귤은 1965년부터 증식 붐이 조성되어 그 식재열이 최고조로 달한 1970년에는 매년 제주도에 식재된 본수가 282만 본에 달하였다. 최대 증식기에 해당하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5년간 식재된 본수는 1,016만 본으로 연간 평균 203만 본이 되었다. 1964년에 413㏊에 불과했던 감귤 재배 면적이 10년 후인 1974년에는 11,200㏊에 달하게 되어 27배라는 전례 없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인 발전은 감귤이 다른 작물이나 과수보다 월등히 수익성이 높은데 기인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64년 2월 연두순시차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는 여건이 다른 지역인 만큼 전국 공통 사업인 식량 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정부의 특별 지원을 계기로 1965년부터 재배 붐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감귤 증식 사업을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책정하여 저리 융자로 감귤원 조성 자금을 지원하게 되면서 1969년부터 획기적인 증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육묘업자를 육성하여 감귤 묘목 생산을 장려하였으나 육묘업자의 생산 묘목만으로는 연간 수요량 200만여 본을 충족시킬 수 없어 일본산 묘목을 재일교포 기증으로 대량 도입하여 수요를 충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량 도입 과정에서 불량 묘목이 혼합되었을 뿐 아니라 운송 과정 중 발효로 인한 활착 불량 등의 문제점이 많아 1971년부터 묘목의 도입을 제한토록 조치하였다.

[생산 확대와 가격 폭락의 위기]

제주도는 표고 해발 200m 이하는 특별한 저해 요인이 없는 한 재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해수 피해 지역인 해안선을 제외하고는 도 지역 어디를 가나 귤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1973년 감귤 재배 농가는 36,073농가로 제주도 전체 농가 39,822농가의 91%나 되고 있다.

1977년에 처음으로 10만 톤을 돌파하면서 불과 5년 만에 생산량이 배 이상 증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2년에는 32만 톤, 89년에는 46만 톤을 생산하였으며 1989년에는 75만 톤을 생산하여 제주에서 감귤을 재배한 이래 최대의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가격이 대폭락하여 감귤 생산 정책에서 생산 과잉과 유통 처리에 큰 문제가 나타났다. 가격 폭락과 유통 처리로 인해서 감귤 재배 농가들이 처음으로 감귤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 후 간벌과 적과 운동 등으로 감산 정책을 꾸준히 펴왔으나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 증가와 특히 오렌지 수입 급증으로 인해 가격은 계속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1999년에는 64만 톤을 생산하였다. 감귤 재배 면적은 1965년에 551㏊에서 1968년에는 1,471㏊로, 1975년에는 11,000㏊, 1992년에는 22,000㏊로 늘어났고 1999년에는 25,823㏊로 증가하여 제주도 전체 경지 면적 56,812㏊의 46%를 차지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0.31 내용 수정 해방 후 1945년까지 10년간은 감귤 산업이 침체되어 ->해방 후 1955년까지 10년간은 감귤 산업이 침체되어
이용자 의견
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31
김** 제주감귤의 역사에 관한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다만, 한 군데 오타로 판단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감귤 재배의 비약적 확대] 아래 두 번째 줄에
'해방 후 1945년까지 10년간은 감귤 산업이 침체되어' <--- 이 부분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 글을 남깁니다.

해방이 1945년이니 해방 후 10년간이라 하면 <1955년>으로 적혀 있어야 옳다고 보여집니다.
감사합니다^^
201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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