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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22
한자 九鎭城
영어음역 Gujinseong
영어의미역 Nine Coastal Fortification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적
건립시기/연도 1439년(세종 21)연표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9개의 진(鎭)의 외곽을 둘러서 축조한 성곽.

[개설]

진은 삼국 시대 말부터 조선 시대까지 설치되었는데, 둔전병(屯田兵)이 주둔하던 무장 성곽 도시, 또는 군사적 지방 행정 구역이다. 시기별로 진의 설치 목적은 다르지만, 북방의 변경과 해안 지대에 구축되었다.

즉 진은 신라 말기 상업적인 필요에 의하여 설치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무장 성곽 도시, 또는 지방 행정 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순수한 군사적 거점 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북방의 변경 못지않게 남방 해안에도 많이 설치되었고, 진을 빙 둘러 성곽이 축조되었다.

제주도에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이 설치되고, 읍성이 축조, 개축됨과 더불어 9진과 봉수도 구축되었다. 제주도에 있는 9진성은 화북진성, 조천진성, 별방진성, 애월진성, 명월진성, 수산진성, 서귀진성, 모슬진성, 차귀진성이다.

[건립경위]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설치되고 읍성이 축조, 개축됨과 더불어 9진이 구축되었다. 1439년(세종 21)에 제주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의 건의로 방어 시설이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가면서 성곽이 축조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에 수산, 차귀진에 진성이 축조되었다.

1510년(중종 5)에 별방진, 명월진성, 서귀진에 진성이 축조가 시작되었고, 1676~1678년에 모슬진과 화북진에도 진성이 축조되었다. 그 외 조천진성애월진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위치]

일부 진성은 군사적인 요인 등으로 위치를 옮겼다. 별방진성은 당초 김녕 방해소에 있었으나 1510년(중종 5)에 장림 제주목사가 우도에 왜선이 자주 정박하자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김녕 방해소를 현 위치로 옮겨 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수산진성은 1439년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의 건의로 축조되었다. 1597년 이경록 제주목사가 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수산진을 폐진하였으나 2년 후인 1599년에 성윤문 목사가 다시 수산진으로 환원하였다.

모슬진성은 1510년 장림 제주목사가 가래 방호소에서 동해 방호소로 이전하여 진성을 축조하였다. 그 후 1678년에 윤창형 제주목사가 동해 방호소를 모슬진으로 옮겨 진성을 축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9진성 중 서귀진성과 모슬진성 터는 대부분 훼손되었고, 나머지 진성은 성곽, 혹은 그 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진성은 석성으로, 형태는 방형과 타원형(원형)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축조된 진성은 방형의 형태로 내륙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 축조된 진성은 타원형(원형)으로 해안에 접하고 있다.

진성의 성문은 성곽의 규모에 따라 1~3개이다. 조천진성과 모슬진성은 성문이 한 개이고, 별방진성과 명원진성은 성문이 세 개이며, 나머지 진성은 두 개이다. 성문은 훼손되어 터의 일부만 남아 있다. 진성 안팎으로 당시의 생활 옹기와 백자편 등이 산포해 있지만, 정밀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의 진성은 왜구 침입이 많았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축조, 정비되었다. 진성은 당 시대의 핵심적인 관방 시설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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