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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환 씨의 일생 의례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20
한자 -日生儀禮-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혼인

강덕환은 1992년 10월에 결혼했다. 서른두 살이 되는 해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으로는 조금 늦은 편이었다. 그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월간 제주』라는 잡지사의 기자로 근무하던 1991년이었다. 당시 그의 아내는 제주시 중앙 로터리 부근의 나사로병원에 간호보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해 3~4월경에 동아리 후배가 소개시켜 줘서 인사를 나눴으나 그 후에 만남을 이어가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말에 양용찬 열사가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며 투신자살을 했을 때 중앙로에서 집회가 있어서 취재를 하러 갔더니 그 현장에 아내가 있었다. 그가 시간 있으면 잡지사 사무실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했더니 아내가 찾아와서 얘기를 나누고 갔다. 이튿날 다시 서귀포 시내에서 집회가 있어서 취재를 갔더니 거기에도 아내가 앉아 있었다. 그때 집회 현장에서 찍어둔 사진을 나사로병원에 찾아가 건네주면서 다시 만났다. 양용찬 열사 장례식까지 끝나 취재를 마치고 밤 11시 무렵 제주시로 넘어왔는데 갑자기 휑한 기분이 느껴졌다. 병원에 전화했더니 마침 아내가 야간 근무를 하고 있기에 찾아가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며칠 후인 12월 2일 첫눈 오는 날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나오라고 전화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부터 퍽 가까워졌다. 칠성통의 ‘소금창고’라는 술집에서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1992년 초쯤에 그가 농담처럼 청혼을 했다. “너 나한테 시집 올래?” 했더니 “가쿠다(가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에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택일해서 결혼했다. 특별히 반대하는 이도 없었으며 결혼 과정은 순조로웠다. 1992년 10월에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연동의 명주주택에 전세를 얻어 살았다. 비키니 옷장에 단칸방에서라도 출발하고 싶었지만, 모아둔 돈도 없었던 데다 아버지가 강권하여 방 두 개 있는 다세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기서 2년 정도 살다가 아버지가 지은 다세대(현재 사는 곳)로 입주하였다.

세 마리 잡아 결혼 잔치

1992년 2월 신구간 무렵에 강덕환의 아버지가 사돈집에 가서 둘이 사귀고 있으니 결혼시키자고 했다. 이어 사주단자를 받으러 가고, 생년월일에 맞춰 택일하였다. 입춘을 넘어서 5월과 10월 두 날을 잡고서 택일기를 가져갔다. 신랑신부의 의견을 들어서 10월 6일로 확정하였다. 약혼식은 따로 하지 않았다. 신부가 마련한 예단은 당시 제주도에서 하던 방식으로 평범한 것이었다. 부모에게는 솜이불, 셋아버지·작은아버지·고모·이모·외삼촌·형제들에게는 담요를 드렸다. 사촌들에게는 하지 않았다. 신랑 집에서는 신부측에 현금 500만원을 주어 예물 등을 마련하게 했다.

잔치는 집에서 했다. 옥상과 골목길에 천막을 쳐서 음식 만드는 곳으로도 이용하고 손님 접대 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친구들이 솔문을 세워 풍선을 매달고 오색 테이프를 감아 잔칫집 분위기를 띄웠다. 결혼식을 올리기 이틀 전에 돼지를 잡았다. 100kg 정도 되는 것으로 세 마리를 사다가, 동네 사람들과 부모의 친목회 사람들이 함께 잡았다. 신랑 친구들은 ‘넉둥배기(작은 윷을 종지에 담아 던지는 윷놀이)’도 하고 ‘섯다’와 카드 등을 하며 놀았다.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함께 모여 노는 자리가 되었다. 전날 밤 손님들이 거의 다녀간 9시경에 신랑 친구 10명 쯤이 용담2동 월성마을 신부집에 찾아갔다. 다음날 일정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다. 몇 시에 방문하고 몇 시에 예식장으로 떠난다는 것 등을 부신랑이 신부측과 의논을 했다. 부신랑은 초등학교 동창이 맡았다. 부신랑은 도감에게 10만 원 넘는 돈을 주었다. 10시 쯤 되어 신부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식 당일이 되자 신랑은 새벽에 일어났다. 6시경에 함을 상에 올려놓고서 신랑이 직접 문전제를 지냈다. 7시에 신부집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작은아버지가 함을 들었고, 형, 형수, 누나, 큰이모부, 8촌 친척 1명, 어머니 사촌 1명, 동네 친구 7명이 신랑과 함께 신부집으로 갔다. 형수와 누나는 돼지 뒷다리를 바구니에 담아 신부집에 전달하였다. 신부집에서는 그 바구니에 다시 음식을 담아 보냈다. 결혼식 직후 드라이브 가서 먹을 음식도 쌌다. 신부집에서는 한경면 저지리에 살던 집안 어른이 예장을 받아 읽었다. 사돈들끼리 서로 인사하고 나서, 잘 살게 도와주자는 덕담을 나누고 식사를 하였다. 한편 다른 방에서 신부 친구들은 신랑 친구들에게 손수건을 팔았다. 다소 승강이를 벌이다가 손수건과 돈을 각기 봉투에 넣어 주고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10시에 신부집에서 나왔다. 결혼식은 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원앙타운예식장에서 진행되었다. 주례는 소설가 오성찬 선생이 맡았고, 사회는 동네 친구가 보았다.

결혼식 후에는 신천지미술관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신랑신부와 그 친구들이 함께 갔다. 당시에는 웨딩 사진을 미리 찍지 않아서, 드라이브를 가서 신랑신부가 예복 입은 채로 사진들을 찍었다. 부케 던지기도 거기서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신부측의 친척들이 신랑집에 방문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신랑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경이었다. 신랑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신랑신부 친척들에게 절을 했다. 신부측에서는 신부의 형부, 언니, 5촌 당숙, 5촌 당숙모, 외가 친척 1명 등이 자리에 있었고, 신랑측에서는 아침에 신부집에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참석했다. 신부측 친척들이 떠난 것은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였다. 신랑신부 친구들은 신랑집의 방 하나를 차지해서 식사하고 술도 마시며 놀았다. 신랑과 신부는 도감과 심부름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음료수를 제공하면서 고마움에 대한 인사를 하였다. 신랑신부 친구들 뒤풀이 비용은 30만 원을 줬다. 나이트에 간다고 하였다. 신혼여행 떠나는 비행기가 저녁 7시에 출발하게 되어서 뒤풀이자리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신혼여행은 서울로 갔다. 당시 MBC가 파업할 때여서 취재도 할 겸 서울로 간 것이다. 여의도 파업 현장에 가본 후 강원도 쪽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신부가 멀미를 하여 그만두었다. 결국 2박3일 동안 서울에서만 지내다가 돌아왔다. 신혼여행 가서 부조금 내역도 정리했다. 부조금으로 들어온 돈은 둘이 합쳐서 550만~600만 원 정도였다.

돌잔치는 평범하게

큰아들 돌 때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했다. 하지만 둘째와 막내 돌 때는 특별히 초대하지 않았다. 가족끼리 모여 사진 찍고 식사하는 정도로 치렀다. 돌상은 셋 다 거의 비슷하게 마련했다. 과일, 떡 등의 음식을 차려놓고, 다 그렇듯이 연필, 실, 돈, 쌀, 공책을 앞에다 놓아서 그 가운데 하나를 집게 했다. 큰아들은 연필을 집어 들었다.

환갑·칠순잔치

어머니 환갑 때는 특별히 행사를 치르지 않은 채 그냥 넘겼다. 그러나 아버지 환갑 때는 형제들이 비용을 분담하여 치렀다. 집에서 음식을 차리고 가까이 지내는 분들을 초대했다. 초대 대상은 작은아버지 내외와 고모 내외, 아버지의 갑장들과 유림 친구들, 어머니 친목 등이었다. 선물로 부부동반 여행을 보내드리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고사하여, 나중에 친목에서 중국 여행을 갈 때 여비와 용돈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칠순은 집에서 식구끼리만 식사하는 형식으로 치렀다. 식사를 마치고는 모두 같이 한라수목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말뼈제골을 선물로 드렸다. 물론 비용은 형제들이 분담하였다.

일찍 세상 떠난 할아버지

강덕환의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인 1955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그는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가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을 따름인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말년의 일화이다. 큰손자(그의 큰형)를 낳았을 때의 일로, 당시 할아버지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매우 기뻐하셨다고 한다. 양자를 들인 처지에서 대를 이을 손자를 얻은 터였으니 크게 기뻐할 만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편찮은 와중에도 애기구덕을 흔들며 흐뭇해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채 한 달도 안 되어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특별한 의미를 남긴 할머니

할머니는 강덕환에게 특별한 의미를 많이 남긴 분이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많아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하는 그의 부모를 대신해서 손자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할머니의 손 맵시가 아주 좋았다는 얘기를 주변에서도 많이 한다. 옷을 손수 지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재봉틀도 없이 말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볼 때, 할머니에게는 긴 자, 인두, 가위 같은 재봉 도구가 많았음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호상옷이나 한복 같은 것을 주로 만들곤 했다. 갈중이나 반바지 같은 것도 만들었다. 할머니는 그와 딱 80살 차이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아흔넷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당시로선 동네에서도 몇 째 안 가는 고령이었다. 그래서 생전의 설날 때면 동네 사람들이 거의 빠짐없이 할머니에게 찾아와서 세배를 드리고 갈 정도였다. 할머니가 장수하면서 고모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 할머니는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종종 아버지가 담배를 사다드리곤 했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할머니는 길거리의 종이를 주워다가 담배를 말아 피우는 데 사용하곤 했다. 그는 할머니와 한 방에서 잠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퍽 각별하다. 할머니는 이런저런 재미있는 설화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할머니에게 들은 ‘마퉁이 이야기’는 지금도 그의 기억에 있다. 그는 할머니 심부름도 잘 하면서 할머니를 좋아하고 따랐다. 건강하게 생활하던 할머니는 1970년대 초에 눈길에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었다. 90세의 고령에 얻은 골절상이라 그때부터 삼사 년 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임종 때까지도 귀가 멀거나 정신을 놓은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배례도 하지 않고 ‘촐눌(건초 낟가리)’에 숨어 있다가 잠들어버렸다. 두건도 쓰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았으며 발인하는 날에도 장지에 가지 않은 채 새벽에 학교로 가 버렸다. 나중에는 그것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할머니 산소를 공동묘지에서 가족묘지로 이장할 때(1989년)에 그는 직접 뼈도 추스르는 등 모든 일을 앞장서서 처리했다. 결혼 후에는 할머니의 제사도 그가 맡아서 지낸다. 성가집의 할머니(아버지의 친모)는 세상 떠난 지 5~6년밖에 안 되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다. 어쨌든 생활의 공간과 범주가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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