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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용필 할아버지의 일생 의례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12
한자 -日生儀禮-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혼인

현용필의 나이 17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초상, 소상, 대상 3년상을 치렀다. 할아버지가 작고한 바로 다음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연상을 치러야 했다. 결혼은 조혼할 때이나 부모가 연상을 치르느라 정신을 못 차려 그의 결혼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23살이 되는 해에야 비로소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흥남에 직장 생활을 하러 가기 전에 결혼 약속은 미리 되어 있었다. 묵은해에 택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흥남에서 생활하면서 10월 19일까지 결혼 날짜를 기다리려니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늘 ‘10월이 와야 고향을 갈 건디……’ 하며 지내다가 날짜가 다가오자 영조 삼촌에게 결혼하고 오겠다고 하고 제주도로 왔다. 올 때에는 흥남에서 일한 월급을 몇십 원 가져 와서 결혼 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당시에는 십 원짜리가 가장 큰 돈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다시 군인으로 끌려갈까봐 노심초사했고, 농사를 지으려니 지루하기도 해서, 월급이라도 주는 흥남으로 다음해 정월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위아래 동네로 살았기에 잘 알고 지내던 웃동네 문열(1929년 음력 12월 5일생, 18살)과 결혼했는데, 지금이야 서로 만나서 오면 결혼을 허락해 주지만 당시에는 서로 아는 어른들끼리 정해서 부모가 하라고 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같은 노형동 안이었기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때는 왜정 때였기 때문에 여자들도 훈련을 받았는데, 그는 부녀회 훈련을 할 때 이미 아내 될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혼인 절차

현용필의 아버지는 잔치 수일 전에 넙은드르 동네 입구에 사는 동네 하인에게 연락하여 “심부름을 하라”고 하였다. 잔칫날 3일 전부터 동네 하인 부부는 와서 잔치 준비를 했다. 맨먼저 하는 일은 돼지를 잡는 것이었다. 하인은 돼지의 목을 밧줄로 묶어 동녘 울타리 옆의 멀구슬나무에 걸어 당겨 죽였다. 동네 어른들이 ‘춤붓’을 만들겠다고 돼지 등의 털을 얼마간 뽑아가고 나면, 하인은 그 죽은 돼지 위에 보릿짚을 덮어 불을 피워 돼지를 그을리면서 돼지털을 칼로 긁어내었다. 물을 뿌려 가면서 털을 말끔히 긁어내면 칼로 돼지를 열 두 뼈로 토막 내었다. 돼지 내장 중에 간은 이웃집 어른들이 술 한 잔씩 하며 안주로 먹고, 잡은 돼지는 하인이 큰솥에 넣어 삶았다. 한편, 여자 하인은 이호리까지 가서 져 온 바닷물로 두부를 만드는 일, 메밀가루로 전을 지지는 일 등 부녀자들이 하는 일을 도왔다. 이 하인 부부는 집 안에는 들어오지를 못하고 외양간에 보릿짚을 깔아 거기서 밥도 먹고 쉬기도 하면서 지냈다. 말하자면 동네 공동의 하인이었던 셈이다.

신랑은 관복을 입고 본가에서 나갈 때도 현관문에서 왼발을 먼저 내놓고 다음에 오른발을 내밀어야 했다. 사돈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랑과 반대로 신부는 오른발을 먼저, 왼발을 나중에 놓아야 했다. 혼동하지 않도록 그때그때 아버지가 지시를 주곤 하였다.

결혼식 날 관복과 사모관대를 갖춘 신랑을 현관문 앞에 세웠다. 상에는 돼지머리(희생)와 과일 등을 올려 향을 피우고 잔을 부어 올려, 문전에 의식을 지냈다. 관복을 입으면 보통 절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갖춰 입어도 절을 하곤 하지만 그때는 사모관대를 갖춰 입으면 절할 곳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옆에서 다 의식을 해주었다. 문전에 잔을 부어 올리는 것은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도록 신께서 도와주십사 하고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문전제를 지낸 뒤 처갓집으로 출발하는데, 말을 타고 갔다. ‘람지(이엉)’까지 걸어가서 나무 도고리(고랫도고리)를 발판으로 삼아 그 위에 올라서서 말을 탔다. 사특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액을 막는 의미로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처갓집에 거의 도착해서 ‘호령하라’고 하면 신랑과 함께 간 하인이 ‘호옹~’ 하고 권마성(勸馬聲)을 세 번 했다. 그러자 처갓집에서는 신랑이 오는 것을 알아채고 나왔다.

현용필은 예장을 집에서 직접 써서 가져갔다. 미녕 한 필과 예장을 함께 함에다 넣었다. 홍세함을 지는 여자하인은 말을 타고 신랑보다 앞서 가서 함을 드리고 신랑은 그 뒤를 따라갔다.

함 속의 예장의 글자가 혹시 한 자라도 틀리면 퇴짜를 당한다. 그러므로 홍세함 우시로는 예장이 잘못되면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라가곤 하는데,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알아야 가능했다. 예전에는 예장이 잘못되면 매우 큰 결례였으므로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현용필의 홍세함 우시로는 고모부와 계부가 함께 갔다. 두 사돈이 만나서 절하고 예장을 펼쳤다. 예장이 통과되자 신랑이 말에서 내렸다. 내릴 때 발을 내려 밟도록 나무 도고리를 엎어놓았고, 방으로 걸어갈 때 땅을 밟지 않도록 ‘람지’를 깔아 놓았다.

신부집에선 함을 받아들이면 중방이 신랑을 청하여 들어가고, 상객들도 거기의 대반의 청으로 들어가 주연이 벌어졌다. 신랑상, 상객상을 사람마다 따로따로 차려 여자하인이 상을 들어다 올렸다. 신랑상에 올릴 때는 상을 들어다 신랑 앞에 놓고 여자하인이 밥그릇 뚜껑을 열어 그 뚜껑에 밥 한 술, 국 한 술, 그리고 각 찬을 조금씩 뜯어놓아 상 밑에 넣은 후 밥을 뜨도록 한다. 신랑에게 술을 권하는 일은 중방이 해야 했다. 이렇게 신부집에서 잔치가 끝나고, “갈 시간 되었저.”라고 하면 신부가 밖으로 나왔다. 처갓집 사람들도 그날 신랑이 집으로 돌아올 때 같이 따라왔다. 신부를 데려다주는 우시(들러리)가 족두리와 원삼으로 치장한 신부를 가마(독교)에 태우고, 신랑 말 뒤로 따라왔다.

신랑집에 다다르자 신부집에서와 같이 잔치가 베풀어졌다. 신부가 상을 받을 때도 여자하인이 상을 들고 와 놓고 모든 음식을 밥그릇 뚜껑에 조금씩 떠놓아 상 밑에 넣은 후 숟갈을 들게 했다. 상을 받고 난 신부는 시어머니가 해주신 옷으로 갈아입고, 택일하는 곳에서 정해 주는 방향으로 앉아 있게 되는데, 보통은 그 집의 ‘고팡(광)’쪽을 향했다. 본가에 오면 신랑은 신랑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육지에서 하듯이 신랑을 거꾸로 달아매고 발바닥을 때리는 풍습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다고 했다. 옛날 어른들이 엄숙하게 여기는 통과의례인 혼인 의식에서 그런 문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뤠(7일)잔치’라고 하여 일주일 동안 잔치를 했다. 결혼하는 날을 중심으로 앞뒤로 사흘씩 잔치를 하는데, 우선 전전날엔 집안을 치우고, 결혼 전날엔 돼지를 잡고 일가들이 모여서 일을 차려주고, 잔칫날엔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고, 잔치 뒷날은 설거지를 하게 된다. 사흘걷이는 해야 다 치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식당에 가서 후다닥 하고 오면 되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잔칫날에는 본가에서 신랑신부가 함께 잤다. 그런 뒤에 다음날에는 신랑하고 신랑 아버지가 처갓집으로 가서 자고, 다시 다음날 본가에 신부와 신부 아버지가 와서 잠을 자고 대접하고 나면 결혼식이 완전히 끝났다.

요즘에는 잔치 때에 윷놀이 등 많은 놀이가 이루어지지만, 현용필이 장가들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는 것은 글 읽고 풍월하는 것밖에 없었던 유림 마을이어서 그다지 흥겹게 놀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전에는 넙은드르의 경우 행사에 따르는 놀이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 잔치 음식

잔치음식은 주로 돼지, 닭 등을 이용했다. 특히 손님상에 돼지고기 몇 점 올려놓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예전에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결혼식 2일 전에 꽤 많은 이바지 음식을 보냈는데, 그래야만 신부집이 그것으로 잔치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용필 집에서는 문열의 집으로 돼지 한 마리, 계란 30개, 닭 두 마리, 술 한 추니 등을 보냈다. 지금 제주도에서 하는 것을 봐서도 그렇지만 신랑측이 부담을 많이 하는 경향이었던 것 같다. 당시 살림들이 어려웠기 때문에 신랑상에는 갈비(7점), 계란(3-4점), 둠비(두부), 과일(썰어놓음), 고깃국(고기 삶았던 국), 순대 등과 서너 달 걸려 정성으로 빚은 고소리술(좁쌀로 담은 술)을 내었다. 30여 년 전쯤까지는 집에서 직접 술을 담아서 내는 경우가 많았다.

혼인 예단

현용필이 결혼식을 할 때에 신부집에서는 신랑집에 예단으로 이불, 요, 베개 등만을 했다고 한다. 요즈음에 이루어지는 예단, 즉 신랑측에 옷을 해주고, 이불을 해주고 친척들에게 하는 예단은 약 30여 년 전쯤부터 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현용필의 큰아들이 지금 쉰여덟 살인데 큰며느리에게 이불, 옷 등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출산

현용필의 자녀 5명(3남2녀)은 전부 집에서 출산했다. 손자손녀들의 경우에는 병원에서 낳았지만 예전에는 거의 집에서 낳았다. 아내가 출산할 때 어머니가 주로 간호해 주었다. 금줄을 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현용필의 어머니가 출산할 때에는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기 때문에 해산약을 달여서 먹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도 아내가 출산할 때 몸 풀기 위한 약을 사다가 해주었다. 보리짚을 바닥에 깔아야 했기에 그것도 그가 준비해야 했다.

돌·생일

현용필이 자녀들을 키울 때는 백일, 돌잔치는 챙겨주었다. 사진은 백일에는 못 찍고, 돌에는 사진관에 가서 찍어 기념을 했다. 그때는 상 차리고 밥하고 촛불 켜고, 돌잽이도 했었다. 요즘 손주들 돌잔치에 가보면 돈이 뭔지 돈을 집으라고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금전이냐 지식이냐 토론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 생일도 거의 챙겼다. 어렵게 살아도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사다가, 남들 하는 만큼은 차려주어 섭섭지 않게 하노라고 했다. 현용필은 환갑 때에는 자식들이 함께 모여 축하해 주었다. 집에서 잔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향교에 가서 석전에 분장할 때처럼 관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녀들은 선물로 양복을 해주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할아버지 상시의 풍경은 현용준의 『한라산 오르듯이』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는 1939년 음력 5월 13일 향년 67세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온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모든 집안에서 만장을 쓰느라고 분주했고, 며칠 있더니 경성(서울)의 약국에서 과자 상자와 만장을 보내오고, 일본에 가 있는 마을 어른들한테서 만장이 왔다. 대상 때에는 그 만장들을 불사르게 되어 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여러 날 동안 산야를 헤매며 묏자리를 찾았으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토롱(임시 가매장)을 해놓고 본격적으로 묏자리를 고르기로 했다. 그래서 충청도의 지관 유시천(柳時天)이란 분을 찾아 집에 모셔왔다. 이 지관은 동녘거리 큰구들에 아버지와 같이 자면서 아침이면 조반을 먹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와 셋이 명당을 찾으러 집을 나서고 저녁 해질 무렵이 되면 돌아오곤 했다. 밤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이 유명하다는 지관의 이야기를 들으러 집에 모여와 밤늦게까지 놀다가 가곤 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이 지관이 일어나면 식전에 달걀 하나씩을 꼭꼭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한 달 쯤이나 돌아다녀 정한 것이 지금 할아버지를 모신 방살뤼이다.

장사 날, 장의 행렬은 맨 앞에 명정이 나가고 다음에 만장이 줄지어 가는데, 그 만장이 우리 집에서 폭남목이 위쪽까지 알락달락하게 번들거렸다. 방살뤼에 가서 봉분을 만들 때도 동네 어른들이 다 모여들어 진토굿소리를 휘늘어지게 부르며 흙을 나르고, 달구소리를 서로 합창하며 묘를 빙빙 돌면서 달구를 찧었다. 그때 만장의 화려한 행렬, 매장할 때의 그 군중들의 노랫소리와 작업 광경은 할아버지의 훌륭함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상·대상 때도 조객들이 북적거렸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 영혼을 모신 방 앞 배석(拜席) 옆에 굴건제복(屈巾祭服) 차림으로 서서 “아이고, 아이고” 종일 곡을 하는데, 조객들은 이 배석에 엎드려 지촉(紙燭)을 상에 올리고, “어이, 어이”하는 곡을 한참 한다. 곡을 끝내면 재배(再拜)를 하고, 상제에게 돌아서서 엎디어 또 “어이, 어이” 곡을 하여 맞절을 하였다. 조객의 대접은 술, 돼지고기, 두부, 전, 순대 그리고 별미로 잘 대접한다고 밀가루 국수를 대접했다.

제수 음식

예전에는 어려운 집에서는 제사상에 갈치도 올리곤 했다. 돼지고기, 쇠고기 적(炙)도 아주 작았다. 먹어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옛날과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지금은 적이 매우 길고 커졌다는 것이다. 물론 떡반, 묵적 등도 올렸다. 제사를 지낼 때 예전에는 음식은 여자들이 준비했지만, 적은 남자들이 꿰곤 했다. 그런데 음식 준비를 여자들이 하면서 주방 기구도 좋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15년 전쯤부터는 여자들이 모두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제사떡으로는 송편 대신 솔변, 절편(주먹을 반쯤 쥐었을 때 만큼의 반죽을 둥글게 굴려 두 개를 마주 붙여 둥근 떡본으로 누르면 된다), 전지 지진 것, 기름떡, 침떡(윗부분은 희고 아랫부분은 좁쌀), 편바틈(삼의떡), 인절미, 동그랑헌떡, 곤떡(지름 4-5센티 높이 1.5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원의 1/3 정도를 엄지와 식지로 집어 만드는 것으로 육지부의 송편과 다르다) 등을 유교 풍습에 맞춰 준비한다. 침떡(시루떡)은 땅을 세미떡은 하늘을, 인절미는 땅을 곤떡은 해를, 솔변은 반달을 절편은 달을, 기름떡은 별을, 전지 지진 것은 구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제사 때 과일은 유자 정도를 준비하였다. 우영밭에 있는 유자나무에서 따서 올렸다. 윗부분 3분의 1 정도는 깎아서 상에 올렸다. 일부는 문전상에 올리고 나머지는 제사상에 올렸다. 지금은 사과, 배 등을 함께 올린다. 옛날에 배운 대로 지금도 과일을 올릴 때는 홀수로 놓는다. 아래가 4개이면 위는 3개와 같은 식인데 사과는 보통 5개 정도 놓는다. 지금도 묘제 때면 예전과 같이 준비를 하고 제를 지낸다. 물론 올리는 음식의 가지 수는 늘었다. 정월 명절이나 추석 때도 거의 비슷하다.

술을 집에서 담아먹으며 제사상에 올린 지는 거의 60년이 지났다. 어머니가 좁쌀로 고소리술을 담곤 했으나 현용필은 직접 담아서 술을 마셔본 적은 없다고 한다.

명절 음식

설 명절 음식은 제사 때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떡국은 근래에 와서야 끓여먹는 것이라고 한다. 추석에 송편을 해서 먹은 지는 오래지 않았다. 예전엔 고운 쌀을 빻아서 만든 ‘소랑곤떡’을 ‘솔변’이라 하고, ‘동그랑곤떡’을 ‘절변’이라 해서 해먹었다. 시대가 변해가니까 송편을 해먹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는 집에서 떡을 하지 않고 떡집에서 사다 먹고 있다. 바쁘다보니 편하고 쉬운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제사·명절 분배

현용필의 형제들은 재산을 균분했고, 제사와 명절도 나누었다. 처음에는 용석을 제외한 3형제가 제사 한 번, 명절 한 번을 치르도록 했다. 큰아들인 용관 형은 아버지가 맡아 해오던 할아버지 제사와 설 명절을 맡고, 현용필은 아버지 제사와 단오 명절을, 동생 용준은 할머니 제사와 추석 명절을 해왔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자 할머니 제사를 사촌 영도가 맡아가는 대신 용준이 어머니 제사와 추석 명절을 맡았다. 한식 명절은 큰아들이 맡아 했는데, 이것은 영조 오촌(당숙)의 밭(‘고송이’ 지경)을 경작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영조 오촌을 대신해서 한 것이다.

한식과 단오 명절은 10여 년 전에 일반적인 시류에 따라 폐지되었다. 4·3에 연루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용석에게 조카 봉환이를 양자로 놓았으나 너무 어려서 윗대의 제사나 명절은 맡기지 않았다. 큰형이 지내던 명절과 제사는 작고 후에 자연히 그 아들에게 승계되었다. 제사와 명절 때는 담당하는 집으로 가서 차례를 올린다. 이처럼 현용필이 고희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의 집에서는 단오 명절도 쇠곤 했는데, 추석 명절을 하듯이 제물을 차리고 지냈다. 과거의 노형 사람들은 한식, 청명, 정월, 단오, 추석을 다 지냈다. 지금 명절을 보내듯이 다들 명절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제사 시간

현용필의 집에서 제사 지내는 시간은 보통 자시(子時), 1시가 다 되어 지냈다. 그는 요즘 주변에 보면 11시가 되기 전에도 지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면서, 적어도 11시는 넘어서 지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11시 전에 제를 지내려면 다음날 당일제로 지내야 날이 맞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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