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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동의 지리사회환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03
한자 老衡洞-地理社會環景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노형동의 지리적 환경

노형동(老衡洞)은 1,950m의 한라산을 정면으로 하여 산북 지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어 제주시 서부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어승생과 한라산을 마주하고 있으며 배의 노를 젓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주도의 산북 지방의 지형이 그러하듯 남고북저의 자연적인 지형 특성을 나타낸다. 주로 한라산과 어승생 주변에서 분출한 용암류와 화산 쇄설물(碎屑物)로 형성된 노형동은 남쪽으로는 어승생을 자연 경계로 하여 산북 지역의 중심 자연 환경을 이루고 있다. 어승생을 분수령으로 무수내와 도감내는 각각 서쪽으로 흘러 광령 및 도평, 외도동과의 분계선을 이룬다. 동쪽으로 흐르는 머릿내(馬頭川)는 연동과의 경계선을 나타낸다. 남당천은 노형동의 서쪽 중심으로 흐른다. 한편 북쪽으로는 도두봉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노형동의 북단(일주도로)은 북위 33도 27′30″50, 남단(큰두레왓)은 33도 0′22″30, 서단(무수천)은 동경 126도 22′40″149, 동단(신비의 도로)은 동경 126도 22′30″152이다.

노형동의 산계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제주도 지형도(축적 1/5,000) 분석에 의해서, 노형동을 중심으로 인접 지역의 산계를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해발고도 0m에 위치한 도두봉(道頭峰)[화산체로 표고 65m]이 있다. 이는 제주도 형성 초기에 이루어진 기생화산(寄生火山)으로 화산 쇄설물과 용암류의 혼합에 의해 형성된 화산이며 분화구가 없는 원추형(圓錐形)이다. 남동쪽으로는 해발고도 150m에 위치한 남조순오름, 광이오름, 큰 왕릉 형태의 상여오름 등이 동일한 지역에서 형성되면서 복합 형태인 산계가 형성되었다. 남서쪽에는 해발고도 270m에 위치한 구분동산, 해발고도 790m에 천아오름이 위치하며 분화구가 없는 원추형의 형태이다. 남쪽에는 원추형의 검은오름, U자형의 노리손이, 골머리오름이 있고, 어승생은 복합적인 형태의 화산이다. 이들 기생화산들은 노형동의 지형을 형성하는데 원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산계들이다. 이들 산계들은 노형·해안인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데, 관리의 불편함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행정구역상의 편의 때문이었는지, 안타깝게도 현재 행정구역상에는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선조들이 목축, 농업에 종사하며 밀접한 생활을 해왔던 곳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이들 오름들에 대해서 매우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노형동의 수계

노형동의 수계는 한라산어승생을 정상으로 하여 북사면(北斜面) 수계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무수천[외도천]이 위치하는데, 발원지는 고도 1,880m 백록담 부근 고도 1,300m에서 발원한 지류(支流)가 어승생 서측에서 합류하여 천아오름 동측(東側)을 지나 외도 해안으로 연결된다. 도감천은 어승생 동측에서 발원하여 노형동도평동의 경계 지역을 지나 외도에서 무수천[외도천]과 합류한다. 노형동 정존마을 서쪽을 지나는 남당천은 해발 고도 200m에서 발원하여 이호 동해안(東海岸)으로 연결되며, 동쪽에 위치한 마두천은 고도 250m의 남조순오름 지경에서 발원하여 노형동과 연동을 경계를 하여 도두동 해안과 연결된다.

이들 수계들은 한라산, 어승생, 천아오름, 남조순오름, 노루생이 등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비교적 직사면이고 평행상의 하천을 이루고 있어 급류나 폭포의 발달이 빈약하지만 무수천과 도감천인 경우는 양쪽 벽에 기암과 주상절리로 된 협곡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수로는 단사면상에서 직선적이고 ‘V’자형 내지 ‘U’자형의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해안 지대에 이르기까지 하각작용(下刻作用)이 매우 활발한 편이나 유년기 지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들 하천들은 제주도의 다른 하천들과 같이 화산열곡(火山裂谷) 용암의 붕괴, 유수의 침식작용과 지하수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이들 하천들은 투수층과 하상(河上)에 발달한 열곡(裂谷)및 절리(節理)에 의항 하천수의 일부분을 복류(伏流)하여 건천(乾川)을 이룸은 물론 노형동 지경의 지하수의 원천이 되기도 하며 노형동의 자연 환경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을 흔히 내 혹은 내창이라고도 하는데 노형 지경을 흐르는 내에는 머릿내, 남당내(마을별로 부르기에 따라 함박이굴내·동내·섯내 등으로 불림), 원장내, 도감내, 무수내가 있다.

변화된 노형동의 모습

노형동은 농촌에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어 놀랄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주시가지 확대 시책에 따라 1977년도부터 시행된 신제주 지구 토지 구획 정리 사업, 노형 지구 택지 개발 사업 등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영향이 미쳐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으나, 제주시 지구 중심권으로서의 현대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노형동은 본래 농촌 지역이면서도 예의와 도덕을 존중하는 선비마을로 널리 알려져 왔다. 또한 예전에 제주향교의 선구적 역할을 거의 노형인이 맡아왔다고 한다. 이는 우리 노형이 유명한 선비촌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선인들의 숭고한 숨결은 이곳에 영원히 살아남아 노형의 훌륭한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유림으로 유명했던 노형의 이러한 전통은 소중히 계승 창조되면서 후손들에게 이어져, 오늘날 인재 배출의 토대를 이루었다. 사법고시 합격의 영예를 안고 14명이나 법조계로 진출하였으니 우리 마을이 판·검사의 마을, 준재의 마을로 전국에 알려짐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박사, 의사, 학자, 교육자, 작가, 예술가, 법조인, 행정가, 사업가 등 실로 다양한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다.

1980년대 이전까지 노형동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광평과 월산을 제외한 원노형·월랑·정존에는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주택지 조성과 제주-중문간 산업도로 및 제2횡단도로의 출발지가 되고 있고, 서부고속화도로가 해안과 월산 지경을 지나고 있어 서부 지역 문화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노형 로터리를 중심으로 병원, 상가, 호텔,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으며, 방송통신대학, 한라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제주일고, 관광산업고, 한라중, 제주서중, 노형초등학교, 한라초등학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노형은 농촌의 모습에서 교통, 문화, 교육, 관광 중심의 복합도시 양상으로 발전하여 미래에는 하나의 커다란 노형타운으로 성장하리라 기대된다.

머릿내(馬頭川)

남조순오름 지경에서 발원하여 노형동연동을 경계로 도두동 해안으로 흘러간다. 예전에 성안(예전의 제주 성안)을 가려면 노형인들이 이 내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매우 친근한 감정이 서려 있다. 특히 월랑에 근접해 있으므로 월랑 사람들이 많이 활용했고 혈지(血池)가 가마통(지금의 노형다리 남쪽 깊은 곳인데 파괴되었음) 동쪽에 있어 이 곳이 묏자리로는 최고로 알려졌었다. 그래서 이댁(李宅)에서 산을 썼었는데 신제주 개발로 없어졌다. 지형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刑)이라 해서 ‘머릿내’라 명명되었다. 혹자는 *〉〉마을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의 축약형이 ‘’이므로 마을(노형)의 관문이란 뜻으로 사용된 지명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무수내(무수천, 無愁川)

무수내는 제주시 근교에선 심산유곡의 운치를 맛볼수 있는 산북 제일의 계곡이다. 광령계곡 무수천(無愁川)은 도내에서 발원지가 가장 높은 용암열곡(熔岩裂谷)이다. 한라산 정상 서쪽 해발 1,600m의 장구목 즉 윗세오름 서북벽 계곡에서 시작된 동·남 어리목골과 영실 북쪽, 그리고 서쪽 볼레오름이 그 발원지인데 계곡이 온통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상절리(板狀節理)와 주상절리가 비교적 발달하여 풍광이 무척이나 수려하다. 그러나 계곡은 본연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쉽사리 드러내지는 않는다. 발원지에서 어승생 북서쪽으로 내려와 해발 350m의 치도(治道)에 이르러서야 계곡은 비로서 자신이 간직한 신비경을 숨길 듯 말 듯 내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리목골을 따라 내려온 지류와 영실 쪽에서 두 줄기 지류가 이곳 ‘치도’에서 합류하고, 그 외로 소수의 개울이 모여 대천(大川)으로서의 무수천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너비 29여m에 절벽 높이 10~20m의 웅장하고 가파른 계곡이 시작되는데, 이런 계곡은 광령 1리 동쪽 600m 지점을 가로질러 외도동 앞바다까지 장장 20여㎞나 계속된다.

문헌상 “무수천(無愁川)”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로는, 1653년(효종 4년) 8월에 제주목사 이원진과 전적 고홍진이 편찬·간행한 제주의 역사 지리서인 『탐라지』 처음이다. 이를 인용하면 무수천의 하류는 조공천(朝貢川)[현 외도 월대 북쪽 포구가 조공포이므로 이에서 유래된 명칭]이라 하고, 그 조금 상류로 올라가면 ‘수정천(水精川)’ 또는 ‘도근천(都近川)’이라고도 하는데 주민들의 말이 난삽(어삽 : 語澁)하기 때문에 조공이라는 음절이 와전(음와 : 音訛)되어 도근이라는 말로 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상류에는 폭포가 있어 수십척을 비류낙하(飛流落下)하고, 물은 땅 속으로 숨어 흐르는데 7~8리에 이르면 다시 암석 사이로 솟아나 드디어 큰 내를 이룬다. 내(川) 밑에는 깊은 못(沼)이 있다. 못 가운데 이상한 물체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달구(韃狗 : 집터 다지는 데 쓰였던 기구)와 같으며 잠복변화(潛伏變化)하여 때로는 사람에게 보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탐라지』에 의하면 “이 내가 도내의 모든 내 중에서 제일 큰 내(諸川中乙大者)이며, 제주시 서남쪽 18리에 있고 특히 냇가 양쪽 석벽이 기괴, 천험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無愁川 : 在州西南十八里朝貢川之上流雨岸石壁奇險多勝處)”고 요약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무수천은 계곡 양쪽 절벽이 가파르기 때문에 다른 계곡들처럼 봄철 화입(火入)을 입지 않아 난대림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건기에도 이곳저곳 바위 틈 사이로 맑고 차가운 계류가 흘러내려 휴양지로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듯 물이 맑고 수림(樹林)이 울창하니 희귀조류와 야생동물이 서식하기에 알맞고, 특히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등 상록난대수와 제주 특산인 섬오갈피가 주 수종을 이루는 원생림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또한 계곡 내 곳곳에는 작은 호수처럼 맑은 물이 고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데, 이 계곡의 풍부한 수량은 일찍부터 인근 주민들의 생활용수로서 음료수나 축산에도 많은 도움을 주어 왔다.

노형동의 오름 어승생

한라산 북서쪽 아랫동아리에 당당한 산용(山容)을 자랑하며 우뚝 선 독립봉, 어승생오름은 표고 1,169m로 노형·연동·해안의 3개 동에 발을 뻗치고 있다. 몸집이 커서 그 저경이 약 2㎞에 이르며 비고(比高)도 북쪽을 기준으로 하면 350m 정도가 된다. 아마 제주도의 기생화산 중 가장 큰 산체일 것이다. 한라산의 주봉이 ‘오름왕국’의 군주라면 이 오름은 원근에 웅거하는 제후들의 맹주라 할 위풍을 지니고 있다. 제2횡단도로의 등산 길목인 어리목으로 접어들면 여기서부터는 국립공원 구역이다. 눈이 많이 쌓일 땐 차량 통행이 힘들기도 하는데 모처럼 설경을 옹색한 차 안에서 썩혀 버릴 것도 아니려니와 등산객이라면 겨울철이 아니더라도 워밍업으로서 알맞은 보행거리이다. 어리목 계곡을 끼고 왼편에 수로의 세찬 물소리를 들으며 봉 남쪽으로 15분쯤 들어가면 푸르른 산줄기에 원형극장처럼 둘러싸인 잔디밭이 포근히 맞아 준다. 산장, 매점, 주차장 등 시설에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고 등산객의 조난에 대비한 경찰 구조대도 상주하고 있다. 잔디밭 앞의 습원을 낀 개울 지대는 수태(水苔)의 자생지이며 제주도 특산인 솔비나무 등의 독립목 임상(林相)을 볼 수 있고 그 밖에 고유의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어 식물학자들이 이의 보호를 강조하는 지대이기도 하다. 울창한 천연림에 싸여 첩첩이 높은 산봉이며 사방에서 피부에 느끼게 감싸오는 냉기가 벌써 산 속 깊숙함을 느끼게 한다.

이 산록 일대는 예부터 명마(名馬)의 산지였다. 풍수설에도 상제가 말을 타고 하늘을 달린다는 궁마어천형(宮馬御天形), 천마유주형(天馬遊駐形)이라 한다지만 임금이 타는 어승마(御乘馬)가 이 산 밑에서 났다 하여 어승생악(御乘生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조 때(1797년) 이 곳에서 용마(龍馬)가 태어나 목사 조명집이 왕께 진상하자 노정(盧正)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가자(加資)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승 혜일, 기(妓) 만덕(萬德)과 더불어 이른바 제주도 3기(奇)의 하나인 마노정(馬盧正)이다.

외도천 주변 상류부(어리목 계곡)의 원류는 크게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다. 흔히 Y계곡으로 불려지는 어승생 남동쪽 민대가리동산 밑에서 두 가닥의 골짜기가 Y자형으로 합류하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는 아곡(丫谷) 또는 아동(丫峒)으로 표기돼 있다(아는 두 갈래길 아, 가닥날 아), 한자와 영자가 공교롭게도 그 모양이 똑같다. 이우형(지도편집인)은 그 동쪽 가닥을 동어리목골, 남쪽 가닥을 남어리목골로 구별했다. 구체적이고 우리말이어서 ‘Y계곡’ 보다는 훨씬 낫다. 동어리목골은 한라산 주봉 직하의 장구목에서 발원하고, 남어리목골은 한라산 정상 서북벽에서 발원하여 윗세오름 산장 북쪽을 거치는데 두 계곡은 민대가리동산을 사이에 두고 잠시 흐르다가 그 밑에서 합류, 어승생 남~서쪽을 끼고 제주시 애월읍의 경계를 이루면서 북류하여 외도동으로 들어간다.

동어리목골은 속칭 안막은다리골째기, 남어리목골은 웃막은다리 골째기이다. ‘막은다리’란 이 경우, 분수령이라는 개념의 지형을 생각하면 된다. ‘다리’는 길의 요소를 ‘목다리’라고 하듯 어떤 지형의 요소라는 개념으로 보여지므로, 계곡이 거슬러 올라가 상부에서 막힌 곳이 ‘막은다리’인 셈이다. 위치상으로 제일 위쪽이어서 웃막은다리, 안쪽이어서 안막은다리인데 안막은다리 바깥쪽(제일 아래 쪽)엔 밭막은다리가 있다.

도근천 상류의 골머리골짜기는 아흔아홉골의 제일 서쪽 계곡으로 그 발원지가 바로 어리목 산장 앞의 습지대이다. 어승생은 남~서쪽을 무수천 상류로, 동~북동쪽을 도근천 상류로 둘러 있는 셈이다. 골머리골짜기는 일명 생수층(生水層)이라 불리며 중류에 선녀가 내려와 멱을 감았다는 선녀폭포가 있는데, 식물학자 부종휴가 ‘희소한 선주식물(先住植物)의 피난처’라 했을 만큼의 비경이다. 등성이 너머 동쪽의 석굴암~천왕사로 흐르는 금봉곡과 함께 다른 지류들이 모아들이며 북서향으로 흘러서 무수천과 합류, 한 하구를 이룬다. 속세를 잊게 하는 계곡미와 보배로운 식생을 아울러 가진 어승생은, 그 품자락에 있는 수원지로 하여 더욱 아껴져야 할 오름이다.

은드레 오름(족은두레왓, 金峰, 小斗理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어리목 광장은 해발 1,000m 가까운 지대로서 천연림 산줄기에 둘러싸인 등산 기지이다. 이 곳에 들어서면 우선 맞은편에 우뚝 버티어 서서 앞을 가로막듯 압도해 오는 우람스런 산을 마주하게 된다. 광장을 두고 어승생오름과 마주보는 ‘금봉’, 속칭 은드레오름이다. 표고 1,339m로 어승생(1,169m)보다 170m 높으며 비고 280m 안팎의 상당한 높이와 경사를 가졌다. 그러나 이 비고는 가장 낮은 남서쪽 계곡으로부터의 높이이고 동쪽의 완만한 벌판으로부터의 그것은 40m에 불과하다.

은드레(작은들)라 함은 벌판을 말하며 그 서쪽 끝에 솟아 있으므로 은드레오름이라고 부른다. 은드레란 벌판을 일컫기도 하고, 때에 따라 오름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벌판을 은드레왓(왓=밭)이라 부르고 있으며, 오름은 은드레오름, 또는 뒤에 생긴 한자 이름으로 금봉(金峰)이라고 불린다. 금봉이란 이름이 무엇에 연유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지도에는 소두리(小斗里, 은드레왓), 소두리봉(小斗里峰, 은드레오름)이란 표기로 나타난다. 행정구역상 오름은 제주시 해안동연동 경계에 걸쳐지며 오라동 구역인 은드레왓까지 오름자락이 펼쳐져 있다. 화구 없는 원정구(圓頂丘)로서 서사면은 어리목 광장에 면해 있고 남사면은 급경사를 이르며 동어리목골로 내리지른다.

북녘 자락에 여러 가닥으로 뻗친 등성이는 제주시 산록도로와의 사이에 유명한 아흔아홉골을 형성한다. 아흔아홉골의 제일 서쪽 부분이 이른바 ‘골머리’로서 여기에 천왕사가 있으며 이 동쪽 능선을 따라 은드레로 올라오는 길이 희미한 대로 숲 속에 남아 있다. 도중 금봉곡이라 불리는 기암 경승의 계곡과 안경샘으로 이름난 석굴암을 거치게 된다. 칠성바위, 보살바위, 세존동 등을 간직한 이 일대의 계곡은 경승이 빼어날 뿐더러 그 이름으로 보아도 예로부터 불자들의 도량이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금봉곡이란 이름은 계곡의 발원지가 되고 있는 은드레왓의 금봉이란 산명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진다. 은드레오름이란 이름은 구전으로만 남아 있을 뿐 지도에는 올라 있지 않고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4년)에 금봉이라 나오며 은드레는 들의 지명으로 설명돼 있다. 이것이 흔히 불리는 은드레왓이다.

골머리 오름(洞山, 笏頭岳, 아흔아홉골)

골짜기가 수없이 많아서 아흔아홉골. 으슥한 미로 지대를 연상케 하는 이름 그대로 이 안에서는 어디를 가나 험한 산등성이 아니면 깊은 골짜기에 맞닥뜨린다. 지도를 펼쳐 보아도 이 곳처럼 수십 갈래의 산줄기, 골줄기가 밀집해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며 울창한 숲 속 곳곳에 인적 드문 비경이 감춰져 있다. 갖가지 형상의 우뚝우뚝한 바위들은 영실기암(靈室奇巖 ; 오백나한)에 버금간다 하여 소오백나한이라고 일컬어지며 그 사이사이 산록의 언덕을 불긋불긋 수놓은 참꽃나무에 새소리 물소리 어우러지고 숲 속 깊숙한 낭떠러지에 폭포가 걸려 있기도 하다.

제주시 공원묘지 남쪽 수림지대에 주로 집중된 이 골짜기들은 가까이는 어승생오름 동쪽, 멀리는 한라산 북서사면의 꽤 높은 지대에서 발원하는 것도 있으며 크고 작은 그 대부분이 서쪽 도근천의 상부 지류를 이루고, 더러 동쪽 골짜기들은 밑에서 한천으로 모아져 들어간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이 ‘골머리’이고 골머리 위쪽에 있는 오름이 골머리오름이다. 골머리란 아흔아홉골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현재 충혼묘지 줄기 동쪽 오름으로 99곡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즉 천백도로에 가까운 천왕사 일대를 일컫는 말로 이 곳이 곧 아흔아홉골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천왕사는 양쪽에 계곡을 낀 언덕 아래 위치하며, 생수층이라 불리는 그 서쪽 계곡을 필두로 동쪽으로 밭고랑처럼 골짜기들이 펼쳐진다. 그 우두머리격인 생수층은 어리목 광장 동녘의 습지대에서 발원, 어승생오름 동쪽을 끼고 천왕사와 한밝저수지 사이를 북서로 흘러 나가는데 어리목~천왕사 중간에서 바위 낭떠러지 위를 흘러 떨어지는 산중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울창한 숲 속,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 맑고 푸른 이 곳, 용못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선녀폭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이 부근에는 한라산의 토박이 식물들이 숨어살 듯 자라고 있어 식물학자 부종휴는 이를 가리켜 ‘제주도 선주식물들의 피난처’라고도 했다. 골머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계곡은 천왕사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금봉곡으로, 아흔아홉골을 명승으로 이름나게 한 곳이다. 금봉곡이란 호칭은 위쪽에 있는 금봉(은드레오름의 별칭)에 연유하는 듯하다. 계곡의 동쪽 등성이 따라 위로 올라가면 거기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크게 본다면 아흔아홉골의 대부분이 그 은드레오름을 머리로 하는 북서쪽 사면의 연장 지대에 형성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골머리오름은 금봉곡 동쪽 능선상에 있다. 표고는 850m 안팎, 이것이 확실치 못한 것은 분명한 기록이 없을뿐더러 정확한 지점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름 자체도 돌출한 산릉 위에 숲에 덮인 채 두두룩할 뿐 뚜렷한 산형은 갖춰 있지 않다. 그러나 북사면은 급경사로 벼랑져 있어 북쪽 공원묘지 부근에서 바라보면 오름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오름에 올라가는 길은 천왕사 진입로 중간의 주차장에서 숲 속으로 나 있다. 양쪽이 깊은 계곡인 좁다랗고 가파른 능선길이다. 수려한 계곡 경치를 내려다보며 30분 가량 올라가면 골머리오름을 만나고 길은 그대로 무성한 잡초를 헤치며 은드레왓(은드레오름이 있는 벌판)쪽으로 이어져 올라간다. 골머리오름은 그 자체는 보잘 것이 없다 해도 경승 빼어난 계곡들을 펼쳤다는 데에 아흔아홉골 오름으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계곡은 예부터 산승들이 수행하던 이름 있는 도량이기도 하다. 고려 때 도근천 상류에 있었다는 서천암도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지 못하나- 어쩌면 지금 천왕사나 석굴암이 있는 이 부근 어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도근천 상류라는 것과, 그 절에 자주 머물렀던 시승(詩僧) 혜일(慧日)의 서천암시(逝川庵詩) 내용이 이 계곡 어딘가에 있었을지도 모를 한 산사를 상상케 하는 것이다.

석굴암은 골머리오름 서쪽 협곡의 급사면 깊숙한 아래 호젓이 들어앉아 있다. 깎아지른 벼랑바위 아래가 궤(암굴)를 이루고 있고 그 안에 불당이 모셔진 색다른 암자이다. 높이 10m쯤 됨직한 암벽에는 큼직큼직한 글씨로 ‘나무십육대아라한성중(南無十六大阿羅漢聖衆)’이라 새겨진 마애명이 고개가 젖혀지게 올려다 보인다. 이 암자는 또 안경샘으로도 유명하다. 바위 그늘에 두 군데 나란히 차디찬 약수가 파랗게 고여 있으며 위쪽 바위틈으로도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다. 석굴암이 위치한 곳은 천왕사에서 거슬러 올라온 금봉곡의 상류로서, 그 사이 숲에 덮인 양, 안의 기암 노송과 참꽃나무로 경승을 자랑하는 계곡이다. 우뚝우뚝 선 바위들에는 산신바위, 보살바위, 칠성바위… 갈라진 계곡에도 삼장동, 세존동 등 수도승에 의한 불교적인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천왕사를 중심으로 한 이곳 일대를 나한도량이라 일컫기도 한다.

노형동의 수도 시설

노형동의 일부 마을에 상수도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64년 8월이었다. 제주시 중심부가 상수도 혜택을 받은 지 7년만의 일이었고, 이웃 연동 마을에 상수도가 시설된 지 2년 후였다. 상수도가 시설되기 전에는 마을마다 구릉(못)을 파서 고인 물을 허벅으로 길어다 마셨다. 마소는 마을 중앙에 못을 파서 못물을 먹였으며, 그 이외로 채소를 씻거나 세수 또는 빨래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구릉이나 못물도 고갈되어버리기 때문에 물로 인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해안마을[도두리, 이호리 등]까지 가서 용수를 길어다 마셔야만 하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마을의 큰 과제는 어떻게 하면 물을 오래도록 저장할 수 있는 구릉을 팔 수 있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큰 구릉도 나타났는데, 월랑의 ‘깊은구릉(지금의 서중 부근)’, 월산의 ‘녹남당’은 마르지 않는 샘물로서 매우 긴요하게 이용하였다.

구릉이나 못에는 돌을 던지거나 비누로 빨래를 하지 않는 것이 관습화되었으며, 어린이들도 멱을 감지 못하도록 어른들의 관리가 철저하였다. 어쩌다가 실수로 익사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고인 물을 모두 퍼내야만 하는 번거로운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역경은 상수도의 시설로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노형의 수도 시설은 제주경비사령부의 대민 사업과 마을 주민 및 재일교포의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각 마을에서는 수도 시설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을 벌이면서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구릉이나 못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던 실정에서 수도 시설이 이루어진 것은 문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노형에 상수도가 처음 들어 온 것은 월랑마을이었는데, 이는 열안지 수원지로부터 급수받는 연동의 급수선을 연결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상수도는 공동 수도 형태로 이루어졌고 각 가정에 상수도가 가설된 것은 1969년 어승생 수원지가 개발되고 난 이후이며, 그 후 월산정수장이 들어서면서 지수관을 통해 개인 수도가 확대 급수되기 시작하였다.

가) 원노형

원노형은 월랑과 함께 노형에서 상수도가 처음 들어온 곳이다. 1964년 8월 일본에 거주하는 송동현[송홍도 맏형]의 60,000원(1964년 금액) 헌금으로 월랑의 고질새왓[노형로터리 동북쪽 월랑 입구]에 시설된 수도전의 지선을 끌어당겨(중가름과) 알가름에 1개소씩 2개소의 공동 급수전을 시설하였다. 공동 수도의 시설로 구릉물을 마시는 신세가 차츰 해소되었지만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부엌의 물항아리에 붓는 일은 얼마간 계속되었다. 가정에 수도가 보급되면서 물허벅과 물구덕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각 가정용 수도는 1982~1984년까지 거의 시설되어 문명의 혜택이 온 가정에 미치게 되었다.

나) 월랑

상수도 시설을 추진하게 된 경위는 이 당시 혹독한 가뭄이 전도를 내습하였는데 월랑마을에는 먹을 물이 고갈되어 도두 마을에 있는 오래물을 길어다가 먹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 제주시 연동까지는 열안지물이 수도로 연결이 되어 월랑마을에도 이 물을 연결할 수 없을까 하고 마을 회의를 수차례 열고 추진위원을 선정하여 하였는데, 추진 책임자로는 마을협의위원인 현만종 씨와 청년회장인 송태우 씨를 선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던 차 전(前) 도의회 의원인 현희영 씨(광평 출신)의 주선으로 당시 노형동 동장인 고(故) 양석규, 현만종, 송태우가 도건설과장인 홍성림(애월읍 수산리 출신)을 방문하고 협조를 요청했더니 그가 노형의 형편을 잘 알고 있다면서 선처를 약속, 연동과 거리가 가까운 쪽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시설을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월랑 사람들이 임시방편으로 고무 호수를 연동 박원택 댁 앞 수전(월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곳)에다 연결, 월랑 고질새왓에 위치한 웃밭구릉에서 물을 받아먹기로 했었다. 그런데 제주시 당국자와 협의했더니 그 비용 외로 경비를 두 배만 더 들이면 월랑마을 한 곳에 더 수도 시설을 할 수 있다 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착공, 준공 연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964년 전후로 기억하고, 고질새왓에 시설된 수도는 월랑, 정존 사람들이 식수로 활용했다. 그 후 월랑마을 15곳에 공동 수도가 설치되면서 점차적으로 각 가정용 수도로 확대되었다.

다) 정존

정존의 상수도 시설은 월랑보다 2년 후인 1966년에 이루어졌다. 원래 정존은 다른 마을보다 깊은 구릉(못)이 없어서 식수 문제로 가장 고통을 겪은 지역이다. 가뭄이 심하여 구릉물이 모두 말라 버리면 다른 마을의 구릉으로 물을 길러 갔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고, 물허벅을 지고 도두 오래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 오는가 하면 조금만 비가 와도 빗물을 대야로 받기도 하고, 냇물을 조금씩 모아 물허벅을 채짐 더러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라 나무라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물을 마셨다고 앓아 눕거나 병 들어 죽은 사람은 없었다. 사실 제주도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산이나 들로 일하러 나간 사람들은 냇가나 들에 고인 물을 그냥 그대로 마셔도 되는 청정한 물이었다. 정존마을의 상수도 시설은 군 대민 지원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열안지가 수원지인 수돗물을 연동을 거쳐 월랑 부락 고질새왓에 공동 급수전이 시설되었고, 이 지선을 1,800m 파이프로 연결하여 3곳에 공동 급수전을 시설하였는데, 노형교 서남쪽 도로 남쪽에 1곳, 마을의 중심지인 노형교 동북쪽 울타리 건너 1곳, 그리고 수덕에 1곳을 시설하였다. 그 후 마을 공동 기금으로 원쟁이 동네, 정존 만주왓 입구, 알못 팽나무 동편에 공동 급수전을 시설하여 이용하였다.

공동 급수전의 시설로 용수 문제는 해결된 셈이지만 정존마을은 지대가 높은데다가 열안지 수원이 마지막 지선이 되다 보니 아침저녁 물을 많이 사용할 때는 연동이나 월랑마을에서 밸브를 잠가버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이 나올 때도 물허벅을 지고 가서 20~30분씩 기다려야 했고 새치기하는 사람 때문에 다툼이 벌어지곤 하였다. 부녀자들은 밤중에 수돗물을 길어 날라야 했으며 낮에 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공동 급수전에 물허벅을 져다 놓고 차례를 매긴 후 밭으로 일을 하러 가면서 집안을 지키는 꼬마에게 물 받는 차례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개인용 수도는 수익자 부담으로 1984년 초에 시설하여 그 해 3월 1일을 기하여 전 가정에 수돗물이 공급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사정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개인 수도를 시설하지 못하고 이웃집 수돗물을 얻어다 쓰기도 하였다.

라) 광평

광평마을인 경우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는, 웃동네에서는 맥구릉, 알동네에서는 다방구릉, 섯동네에서는 섯가름구릉, 유치동산가름에서는 유치동산구릉, 굴왓가름에서는 굴왓구릉을 이용했고, 종나물(정존에서도 이용했음)까지 물을 길러 다녀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정존에 수도가 들어오면서 광평마을에서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외선 경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중, 현희영(제주도의원 역임)씨의 주선으로 군 대민 지원 사업에 힘입어 1㎞를 시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광평에도 수도 시설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웃못(양정중 댁 서쪽), 중카름(현영택 댁 뒷목), 알못 섯지름(현철휴 댁 앞), 섯가름(양성숙 댁 앞)등 4곳에 공동 수도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1968년 제주경비사령부의 대민 지원 사업과 마을 주민 및 재일교포, 그리고 현희영의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다. 공적비는 광평마을에 세워져 있다.

마) 월산

월산인 경우도 노형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수도를 시설하기 이전에는 샘물이나 못을 파서 빗물이 고이면 생활용수로 사용하여 왔으나, 그것도 오랫동안 날씨가 가물면 물이 충족하지 못하였다. 마을 근처에 생수가 나는 곳은 새빌이의 고봉기물과 름의 녹남당물이 있었으나 걸어서 왕복 약 30분 거리로 물허벅을 등에 지어 물을 운반하는 것은 여간 힘들고 고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수도 시설 사업은 월산마을의 숙원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상 처음에는 각 가정마다 시설할 수는 없었고 공동 수도를 몇 군데씩 시설하여 이용하였다. 공동 수도 시설에 재일교포들의 도움이 많았기에 그들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다.

전기 가설(電氣架設)

노형동에 전기가 공급되기 전 어둠을 밝혀주는 불은 등피불과 각지불이 거의 전부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송진이 많이 있는 소나무를 잘게 쪼개어 불을 태우는 ‘솔칵불(관솔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4·3사건 이후 삶이 어려웠을 때는 보릿짚으로 솥에 물을 끓이면서 이 불빛으로 저녁밥을 먹은 후 아예 불을 밝히지 않는 집안도 더러 있었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사 때만은 촛불을 켜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유림촌의 후예라 할 만한다.

등피불(남포등)이나 각지불(호롱불)은 석유를 사용하는데 석유는 1960년까지만 해도 완전 배급제였다. 반별로 두 허벅(물 항아리) 정도 배정되면 수요량에 따라 돈을 모은 후 입금 전표를 들고 외도나 시내까지 가서 석유를 허벅에 길은 후 등짐으로 지고 걸어서 반장집까지 운반하였다. 반장은 반원을 소집하여 정확하게 반원에게 나눠주곤 하였지만 가끔 양이 모자라서 옥신각신하기도 하였다.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 집안은 석유가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밤늦게까지 불을 켜지 못하도록 부모님이 잔소리하였다. 등피불은 심지를 아래로 내려 소위 알불을 켜면 불이 밝지만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삼갔다. 또한 등피불의 등피는 얇은 유리로 제조되어 있어서 그을음이 끼어 4~5일에 한 번씩 닦아야 하는데 힘을 쓰거나 실수로 깨지기가 쉬워서 부모님께 책망을 듣고 등피를 새로 끼우기 전까지는 각지불 신세를 져야만 했다. 각지불은 불완전 연소로 그을음이 많아서 각지불 밑에서 밤늦게 공부를 하고나면 집안의 옷가지는 물론 콧구멍까지 시커멓게 그을음이 끼어 있을 정도였다.

1887년 우리 나라 궁중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이후 38년만인 1926년 4월 21일 드디어 제주도에 전기회사가 설립되어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제주도 내 전력 공급의 시초였다. 제주읍 일부 지역의 전력 공급은 40kw 발전기로 이루어졌으며, 1956년에는 제주시 건입동 내연 발전기 250kw 3대가 설치되면서 시내 중심으로 전기가 공급되었다. 그 후 정부의 본격적인 전화 개발 계획에 따라 1966년 8월 말까지 제주내연의 발전 용량이 크게 향상을 보았고, 1970년 3월에는 더욱 시설을 확충하여 외곽동까지 전력 수요를 충족하게 되었다.

노형동에서는 1970년도에 들어서면서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전기 가설을 마을의 역점 사업으로 선정, 각 마을별로 전력 사업 개발 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기 사업 공사를 추진하였다. 전력 사업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 실현이 그리 쉽지 않았다. 이웃 마을들은 전부 전기를 가설하여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뒤떨어질 수 없다고 발분하고 일어섰지만 마을 공동 기금이 마련되지 못한 마을에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어떤 마을에서는 재일교포의 지원으로 자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어느 마을은 마을 공동의 계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마을민 전원의 부담으로 여러 차례에 나누어 분납제로 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가) 원노형

원노형은 전기 시설 당시 가구수가 적은데다가 본선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거리가 길어서 수요자 부담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시설비 마련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공유지 2필지(속칭 고장빌레, 더렁굴)를 매각하여 모자란 금액만 호당 각출하여 시설비로 충당하고 1972년 여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10월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나) 월랑

마을회의에서 전기 시설을 하기로 협의, 추진 위원장에 고성주, 위원에 강회수, 송태욱, 현태욱, 양상범 등을 선정하여 추진하였는데 성사가 되었으나 자금 조달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각 세대별로 분담키로 하면서 해결되었다. 마을 재산(전: 알솔밭 800여 평)을 매매하고, 한전 융자(20년 상환) 등을 재원으로 착수하여 준공을 보았는데 확실치는 못하나 1972년 전후로 추정되며, 정존보다 3개월 정도 후에 사용되었다.

다) 정존

1970년에 전화사업 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력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자금 조달 방법은 마을 공동 소유인 큰성물머세[한라전문대 자리] 소나무를 베어 팔아 그 매각 대금으로 일부를 마련하고 나머지는 공동 부담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 가구별 배당 금액은 위의 솔계에 가입한 가구는 15,000원, 그 외의 가구는 25,000원으로 하고 10,000원씩은 솔계의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1971년에 5,000원, 1972년에 10,000~20,000원씩 수금하여 총금액 2,566,754원을 마련하고 외선 공사비 및 기본 내선 공사비로 하여 1972년 7월부터 시설 공사에 착수하고 1972년 12월 11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점화를 하게 되었다.

라) 광평

1970년 전화사업 개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71년 3월 1일부터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972년 5월 26일 마을회의에서 추진위원장으로부터 그간의 경과보고를 듣고, 외선비를 부락 공금으로 사용하고 만일 부족한 경우에는 수용자가 부담키로 하였다. 또한 1차분은 수용자에게 부담시키며, 2차분 5,000원씩 부락 공금으로 사용키로 결의되면서 광평마을에도 전기 가설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1973년에는 가로등 15개소를 가설키로 결정하여, 2개소는 제주시에서 보조를 받고 나머지 13개소는 마을 공금으로 처리하여 어두운 골목길을 밝혀주는 가로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에 도움을 준 재일교포들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고자 공적비문을 세웠다. 공적비는 광평 마을회관에 있다.

마) 월산

형설지공이란 옛말이 있듯이 옛 조상들이 사용해 오던 각지불(호롱불), 등피불(남포불), 초롱불을 이용하며 살던 어두웠던 시대를 하루바삐 마감하고,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전기불이 우리 마을에도 들어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은 마을민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그러나 전기 가설을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예산 확보가 어려웠던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마을민, 재향회, 재일교포들의 모금을 토대로 숙원 사업인 전기 가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기 가설은 월랑, 정존을 시발로 그 뒤를 이어 광평, 월산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에도 재일교포들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타국에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성금을 보내주신 재일교포들의 은공을 기리며 그들의 애향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노형동의 행정 단위의 변화

노형동은 원래 원노형·월랑·정존·광평·월산마을로 이루어졌었는데 현재는 해안동도 행정 구역상으로 포함되어 있다. 노형의 행정 구역상의 소속은 중앙정부의 자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어졌다. 1995년 9월 1일에는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어 40개 행정동을 설치하였고, 이 때 제주시 노형리와 해안리를 각각 노형동(老衡洞)해안동(海安洞)으로 개칭하였다. 1962년 1월 1일에는 제주시의 40개 동이 14개 동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이 때 행정 구역 조정으로 해안동·도평동을 합병 관할하였다. 1978년 8월 1일 도평동외도동에 합병함으로써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는 해안동만이 노형동에 소속되고 있다.

자연부락별 설촌은 원노형·월랑은 1500년경(더렁굴 유래 근거), 정존은 1400년경(배리가름 유래 근거), 광평은 1600년대 중반(연주현씨 족보 근거), 월산은 1700년대(남양홍씨 세보 근거), 해안은 1400년경(주루레 설촌 유래 근거)에 설촌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를 근거로 하면 노형의 설촌은 60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 이전까지 노형동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광평과 월산을 제외한 원노형·월랑·정존에는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주택지 조성과 제주 - 중문간 산업도로 및 제2횡단도로의 출발지가 되고 있고, 서부고속화도로가 해안과 월산 지경을 지나고 있어 서부 지역 문화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노형 로터리를 중심으로 병원, 상가, 호텔,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으며, 방송통신대학, 한라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제주일고, 관광산업고, 한라중, 제주서중, 노형초등학교, 한라초등학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노형은 농촌의 모습에서 교통, 문화, 교육, 관광 중심의 복합도시 양상으로 발전하여 미래에는 하나의 커다란 노형타운으로 성장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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