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고시열 할머니의 일상생활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17
한자 -日常生活-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살림집 구성과 변화

고시열이 한림읍 금릉에 살 때에는 마당은 아주 넓었고 방 2개, 마루, 부엌, 고팡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남편이 죽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물질을 하여 번 돈으로 1984년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샀다. 고시열이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지어진 집을 샀다고 했다. 처음 이사할 당시에는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가 이사를 가고 5일장이 그 자리에 생긴다고 했었다. 5일장이 서는 날에는 우동장사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이사 간다던 제주 여상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주여상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한 그녀의 집 앞에는 화분들이 많이 놓여 있다. 예전에는 화분 놓여 자리에 대문도 있었는데 도로를 넓히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대문이 없어진 관계로 현관이 바로 길가와 이어져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살만하다.

현재 그녀의 집 구조는 오른 편으로 방과 부엌이 있고 왼편으로 방과 욕실이 있고 가운데와 왼쪽으로 이어진 마루가 있다. 처음 고시열이 여기로 이사 올 때는 거의 밭들이었다. 후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집들도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장보기와 일상음식

금릉에 살 때는 농사지은 것을 해서 먹었다. 보리쌀, 팥 놓고 삶아서 좁쌀을 넣으면 풀기가 있어서 밥을 하고 자리젓, 김치(바다물에 절였다가 멜젓 놓고 고추 가루도 조금 넣어서 버무렸다)에 주로 먹었다. 남편이 살았을 때 '외식을 하면 주로 자장면이나 탕수육 같은 중국식을 주로 먹었었다. 요즘은 김치찌개를 가장 많이 해먹는다. 손자들도 좋아하고 간편해서 돼지고기를 넣거나 참치 통조림을 넣어서 만들면 맛있다. 가끔 외식을 할 때는 불고기를 먹으러 가는 편이다. 고시열은 식료품을 사기 위해 동문시장을 애용하며 가까운 킹마트도 자주 간다.

세시음식·명절음식

제사 때나 명절 때는 거의 같은 음식을 하는데 소고기, 돼지고기 적과 고시열이 직접 잡아 만든 소라적과, 바닷고기로 옥돔이나 우럭, 조기를 굽고 소고기 미역국을 끓인다. 채소로는 고사리, 미나리, 콩나물이 기본이다. 청묵을 쑤기도 하고 빙떡도 지져 먹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거의 생략한다. 명절 때는 제주시내에 두 군데 돌아다니면서 차례를 지내고 금릉도 대여섯 군데는 되는데 명절을 지내려면 하루해가 다 간다. 요즘은 간소화해서 직계 식구들끼리만 한다고 하는데 고시열은 조상께 절을 해야 한다면서 아직 나누지 않고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

의생활-젊었을 때 평상복

고시열의 어머니는 목화에서 실을 빼어 무명을 짜서 아이들 옷을 만들어 주었었는데 자신도 호기심에 만지다가 엉망을 만들어 어머니께 혼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시열이 결혼 직후 평상시 의복은 무명으로 된 몸빼바지에 손으로 뜬 스웨터를 입는 것이었다. 시집가기 전에 육지 갔다 오다가 까만 치마에 분홍 저고리 만들어왔었는데 그것과 시집올 때 받은 명주옷을 외출복으로 하였다. 갈옷도 직접 미녕(무명)으로 감물을 들이고 재봉틀로 박아서 만들어 입었었으나 고시열은 갈옷을 많이 입지는 않았었다고 기억했다. 지금은 멋으로 피부를 생각해서 갈옷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갈옷은 노동복으로 생각했다. 특히 밭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었는데 고시열은 밭일 보다는 물질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자연히 입을 기회가 없었던 듯하다.

아이들 옷

아이들이 태어나면 처음 입는 봇뒤창옷(배냇저고리)은 고시열이 직접 만들어 입혔는데 아이가 태어날 때 마다 새로 만들지 않고 두 달 정도만 입히는 것이므로 입고난 후 잘 소독하여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지는 않았다.

고시열이 커서는 광목이 나와서 천을 사서 재봉틀로 만들어 입었다. 시어머니가 쓰던 손미싱이 아직도 있는데 이제는 눈이 어두워서 못한다. 시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아서 옷을 잘 만들었는데 당시 한 마을에 몇 개 없었던 일본 미싱을 집에 가지고 있었다. 고시열도 아이들 어렸을 때는 옷을 직접 만들어 주었지만 조금 크자 양품점에서 만들어 파는 옷을 사 입혔다. 칠성통에 옷을 만들어 파는 양품점이 많았는데 고시열이 주로 애용하던 가게는 신화양장점이라고 아직도 있다. 고시열은 키가 큰 편이라 이미 만들어져 나온 옷은 작아서 못 입고 주로 옷을 맞춰 입었다고 한다. 남자 옷들은 양복점이라고 여자 옷 파는 가게와 달랐는데 남편이 주로 가던 양복점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노래·놀이

금릉 앞바다가 해수욕장이었는데 어머니가 일 시킨 것을 다하면 바다에 가서 놀면서 물질을 하는 것이 놀이였다. 바다에서 놀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수영을 배우게 되었고 해녀 흉내를 내는 것이 놀이이자 연습이었다고 했다. 줄넘기를 하나 둘 셋을 부르며 양 옆에서 긴 줄을 가지고 돌리면 가운데로 뛰고 지나가는 ‘꼬마야’같은 놀이를 했었고, 헝겊으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서 피구를 하는 방법으로 하는 오지매 놀이도 했었다. 조금 커서는 고무줄놀이, 강강술래 등 동네 친구들과 어두워지도록 놀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놀러 다니다가 어머니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어도 사나

1980년대에 수협대결 문화제를 하였는데 제주시 수협대표로 마이크를 잡아 노래를 불렀었다. 이제는 심장이 뛰어서 노래를 못 부르지만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전복잡앙 수출하고 소라잡아 수출해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불러서 3년 연속 우승기를 타기도 했었다. 지금도 가사의 내용을 자유롭게 바꿔 부르면서 ‘이어도 사나’를 신명나게 부르신다.

섣달 그믐 문전제

섣달 그믐날 저녁에 해녀들끼리만 탈의실에서 문전제를 지내어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는 간단한 제를 지낸다.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해녀들끼리 제를 지내는데 언제부터 행해진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