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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열 할머니의 가족과 성장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13
한자 -家族-成長期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고시열 할머니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건입동 해녀탈의실은 서부두수협직판장 뒷골목 허름한 창고 이층에 있다. 이렇다 할 간판이나 표지판 같은 것은 없다. 2층으로 올라가면 두 개의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샤워장이고 다른 하나는 휴게실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샤워실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개인용품을 둘 수 있는 사물함과 책상 하나가 놓여 있는 휴게실이 있다. 책상위에는 전화가 놓여 있고 사물함은 한 20여개 정도가 있었다. 바닥은 전기온돌로 따뜻했다. 휴게실로 통하는 문은 샤워실로 하나, 외부로 하나가 있었다. 이 해녀탈의실을 건입동〉과 일도동 해녀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녀들은 여기서 보통 아침 9시 쯤 모인다. 물때에 맞춰 나갈 시간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는다. 건입동 해녀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서부두 해녀탈의실을 찾았다. 그곳을 이용하는 해녀들은 건입동과 일도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건입동 해녀 중 제보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시열은 서부두해녀탈의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해녀 중의 하나이다. 해녀로 건입동에서 살아온 지 40년 이상이 된 그녀는 건입동 해녀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를 통해 건입동의 해녀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두 살 늦게 한 출생신고

고시열은 1935년 4월 2일생으로 주민등록상에는 올라가 있지만 실제 나이는 두 살 많은 75세이다. 실제 나이 보다 2살 적게 출생신고를 한 셈인데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옛날에는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아이가 죽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의례 늦게 호적에 올리곤 했었다고 하기도 하고 살아가는데 바빠서 출생신고 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자로 時자, 烈자를 쓰며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제주고씨 당오름파이며 한림읍 금릉리 출생이다. 특별한 태몽 같은 것이 있지는 않았다고 하며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물레로 행 미녕짱 속곳하나 허믄 여름살고 바지나 하나 허민 저슬살곡 해낫주.(물레로 해서 무명을 짜서 속옷 하나 하면 여름을 살고 바지 하나 만들면 가을을 살고 했었다)”고 말했다.

바다와 함께 한 부모

고시열의 부모는 처음에 농사를 하셨다. 아버지 고향은 금릉이고 어머니는 고향은 옆 마을인 협재였다. 아버지(고시욱)는 그녀가 뱃속에 있을 때인 1932년쯤 일본에 가서 화물선을 타고 노역을 하면서 살다가 왔는데 그녀가 7살쯤(1939) 제주도 들어오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7살 때 쯤 고시열의 얼굴에 빰을 비비면 수염 때문에 따가웠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어머니 고향은 협재이고 농사도 지으면서 물질을 하는 해녀였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화물선을 타다가 몸이 안 좋아 돌아왔으나 그녀가 12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1890년생)는 고시열의 아들 경수가 14살 때인 1981년 사망했다.

일본으로 돈벌이 하러간 형제들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오시자 결혼 한 언니 오빠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 형부와 오빠들은 아버지가 하시던 화물선 타는 일을 했는데 그 때는 화물선에서 살림도 할 수 있었다. 화물선에서 살림을 하면서 남자들은 배로 물건을 옮기는 일을 했고 여자들은 일본에서 해녀로 일을 했었다. 고시열의 형제는 5남매(2남 3녀)로 고시열이 막내인데 오빠 둘과 언니 하나는 죽고 현재 큰 언니와 고시열만 살아있다. 큰언니(1918년생)는 현재 금릉에서 살고 있는데 89살로 치매를 앓고 있다. 큰 오빠(1923년생)는 일본에서 화물선을 타다가 폭탄을 맞아 사망했다. 작은 언니(1926년생)와 작은 오빠(1928년생)는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몇 해 전에 사망했다.

부산살이

고시열의 남편이 제대해서 왔는데 농촌에 살려니 답답하기도 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에 시고모가 살고 있어서 부산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부산 국제시장에는 북에서 온 노점상들이 많았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그 중 하나를 인수하여 국제시장에서 옷가게를 시작하였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고시열이 장사를 시작하니 잘 안되었다. 그래서 다시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삼화양조장

1962년 제주에 처음 왔을 때는 칠성통거리에서 구멍가게를 했었다. 남편은 삼화양조장에 다녔고 집에서 할 일이 없으니 가게를 차렸는데 돈은 벌지 못하였다. 남편이 물질을 하지 못하게 하여 태왁도 몇 개 박살내 버렸지만 남편이 출근한 사이에 물질 다녀와서 남편이 들어오면 바다에 갔다 오지 않은 것처럼 했었다. 물에 한번 들어 갔다 오면 구멍가게에서 며칠 판 돈을 벌 수 있으니 남편의 반대에도 쉽게 손을 놓지 못하였다. 남편은 탑동 삼화양조장에서 전무직으로 수금하러 다니고 하면서 일을 하였다.

삼화양조장은 약주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직원이 약 20여명이 되고 직접 약주를 만들고 도내 곳곳에 차로 배달을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나중에는 양조장 내에 고시열 가족이 살 집을 지어줘서 한 공장 마당 안에 독채로 된 사택을 이용하게 되었다. 남편도 월급타고 고시열도 물질하고 하여 돈을 벌었다. 주로 번 돈은 계를 부어 이자를 받고 목돈을 만들었다. 목돈을 받으면 양조장에 재투자를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다. 그런데 사장 댁을 너무 믿었던 것인지 남편의 도장을 사무실에 두었는데 양조장 사장이 보증도 서고, 사채도 빌려 쓰고 하면서 고시열 남편의 도장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삼화양조장이 부도가 났는데 고시열네도 같이 망하게 되었다. 3대 번 돈을 모두 망해버렸다고 그녀는 표현했다. 시할아버지부터 물려온 금릉리 밭 3개 등 모든 재산이 법적으로 압류되어 버렸다. 옛날 구르마로 들어가는 신작로 밭도 있었다. 그 후부터 고시열은 심장병을 얻어 조금만 하면 심장이 뛰어서 살 수가 없다고 했다. 1977년 고시열이 44살 때 남편이 화병으로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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