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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 씨의 일상생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33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의생활

김성원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노동복으로 즐겨 입던 옷은 ‘갈중이’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노동복도 다양해졌지만, 예전에 제주 사람들은 입는 것에 그리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이 ‘갈중이’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을 따서 빚은 다음 즙을 짜서 광목천에 들여 옷을 만든 것으로 파란 감물은 말릴수록 어두운 갈색으로 변하는데, 감이 갖고 있는 성분 때문인지, 땀을 자주 식혀야 하는 노동일에서 때도 타지 않으면서 시원하여 여전히 제주사람들이 아끼는 의복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요즘은 이것을 아는 육지사람들이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사가기도 한다고 한다. 현재 서문시장의 갈옷 집도 성업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는 곱게 한복 단장을 했다고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은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요즘도 김성원에게 부인은 제사나 명절 때에 한복을 입으라고 권유를 한단다. 그러나 여전히 한복은 낯 설은 옷이 되어서 가끔씩만 입는다고 한다. 김성원이 어릴 적에는 일본에서 이모가 보내온 옷가지들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들이 많아서 그렇게 옷가지 같은 것들을 보내주곤 했단다.

일본 이모

김성원에게 때가 되면 일본에서 옷을 보내 준 사람이 이모였다. 부친도 이모와 함께 일본에 있다가 귀국했는데, 이모와 부친은 밀항하여 함께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은 쇠를 다루는 일을 하다 그만 손가락이 잘려 해방 후 귀국했다. 당시에는 제주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밀항을 하는 제주인도 많았고 부친이 했던 것과 같은 일들을 하는 재일교포도 많았다. 만일 부친이 일본에 계속 머물렀다면 아마 교포2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모는 혼인을 하고 일본에 갔는데, 두 자녀는 한국에서 혼인해 살고 있고, 한 자녀는 일본에서 일본인과 혼인하여 살고 있다. 이모는 때가 되면 입던 옷들을 정리해서 꾸러미를 보내주었는데, 당시 한국의 의복 사정은 좋지 않아 그것을 입고도 자랑하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이모는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재일제주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주생활

김성원이 오현중을 다니기 위해 용담동에 살기 시작했을 때의 용담동의 가옥은 대체로 안채와 바깥채가 있는 초가집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간히 일제식 가옥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0~80년대가 되면서 지붕들이 슬레이트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의 여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좀 있는 사람들은 다시 집을 허물고 짓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식 건물들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허물어졌고, 다시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생겨났다. 김성원이 학교를 다닐 때는 일제식 건물들을 해체해서 다시 지은 슬레이트집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때만 해도 슬레이트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더러 있던 통시(재래식 화장실)들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통시를 이용할 때 돼지와의 힘겨운 기싸움도 이제는 아련한 기억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용담동의 건물들은 대략 20~30년쯤 된 건물들이 많다. 그리고 2, 3층짜리 주상복합건물들이 20~30년 전부터 거리마다 들어섰다고 한다. 서문도로가 확장되면서 새로 지어진 건물이 많단다. 서문시장 상인들 중에도 건물 주인이 많다. 다 ‘알부자’라고 한다. 김성원도 건물을 소유하고 세를 놓으면서 그 세로 아이들 교육비에 보태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상권이 죽어 세가 잘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신앙과 종교

서문시장 상인들 중에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 개신교와 천주교에 다니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다. 김성원도 사라봉에 있는 사찰을 다니지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을 위해 용하다는 한라산의 석굴암과 존자암에도 한 달에 수 회 다니면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부인이 권유를 해서 따라다니게 되었다. 남자들은 절에 주로 가지 않으며 종교 믿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다 아들의 사법시험 기원 문제로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제주시에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한라산 깊은 산중에 있는 석굴암에 가서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종교가 다르다. 장녀는 천주교 신자이다. 굳이 불교로 개종하라고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마을 포제

마을에서는 매해 정월 초에 포제가 열린다고 한다. ‘무형문화재위원회’라는 조직이 마을에 존재하는데, 마을 제단과 포제에 관여하다는 것이다. 주로 노인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마을제는 분동이 되면서 용담1동과 2동 따로 지낸다. 한두기도 따로 지낸다. 서문시장 상인들도 마을제를 할 때에는 참석한다.

용담1동의 마을 포제는 삼헌관(三獻官), 대축(大祝), 집사(執禮), 종사관(從祀官), 전서(典書) 등 9명으로 제관을 해마다 선발하여 3일 전에 제행소에 입소하여 합숙을 하면서 금욕을 하고 몸을 치성한 다음 포제를 치른다고 한다. 예산은 마을 자산금 또는 기부금으로 포제 재산금을 적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포제 준비는 재무가 담당하며 재행소는 재무 집에 설치하여 집례가 총 지휘 및 감독권을 가져 이행한다고 한다. 제물은 돼지 한 마리, 쇠고기, 과일 7종, 명태, 소금하지 않은 생선, 채소(미나리, 무채), 청주 등을 준비한다고 한다.

포제 제식의 절차는 집례의 홀기로 제관의 관수로부터 시작, 분향, 삼헌관 헌작, 배례, 대축, 낭동, 제관 배례, 첨작으로 제식이 끝난다고 한다. 이 제식이 끝나면 재무 집에 모여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음복을 하고 마을의 발전에 대한 집회의 기회를 갖기도 하여 온 동네의 친목과 단합을 기한다고 한다. 이 포제는 4·3 등 어려운 시기에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세시풍속

김성원네는 친척이 많지 않아 설, 추석 명절에는 세 군데의 친척집에만 돌아다니며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친척들이 많은 집안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설, 추석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단오날은 시장상인들에게 대목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대목이 없어지고 있다. 지금은 한식이나 단오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백중날은 사람들이 절에 많이 다니러 갔다. 절에서 백중날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문시장 상인들에게 백중날은 과일 등을 비롯해 많은 제수 물품들이 팔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 백중날 물맞이 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백중날 물맞이는 신경통에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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