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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 씨의 생애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29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김성원과의 만남

떡집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장 건물 2층에 자리한 상인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성원 상인회 회장을 만났다. 시장 상인들을 만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상인들이 ‘그렇게 서문시장에 대해서 듣고 싶으면 상인회 회장을 만나보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그때 지역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도 서문시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김성원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전화로 약속을 하고 서문시장 상인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김성원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50여년을 용담동에 살면서 30여년 간 청과물 가게를 운영해 오고 있다는 김성원을 만나니, 서문시장 이야기와 더불어 용담1동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최근 서문시장에는 용담동 출신만이 아니라, 육지출신과 용담동 외 출신들도 많아서 한꺼번에 두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였다. 요즘은 상인회 일을 맡고 있다보니, 청과물상 운영은 대부분 그의 부인에게 맡겨두고 있는 형편이라며 운을 뗀 뒤, 용담동에서의 그의 삶과 서문시장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림에서 용담으로의 이주

김성원은 1941년 음력 4월 28일에 한림읍 수원리에서 7남매중의 3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본관은 김해로 부모님들은 한림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민이었다고 한다. 오현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제주시로 이주하기 전까지 유년시절을 한림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제주시에 있는 오현중학교(당시 학교는 오현단 지경에 있었으며, 현 제주시 이도1동 1421-3 일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누나가 살고 있는 용담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누나는 혼인을 해서 용담1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런 덕분에 좀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하기 바라는 부모님들의 희망으로 누나 보호 아래 있는 조건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주시에는 제주중학교, 오현중학교, 제일중학교와 피난민학교인 ‘송중(松中)’이 있었는데, 오현중학교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 외에 특이하게 육지에서 피난온 학생들이 다니던 송중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당시 제주극장(현 삼도동 제주대학 병원 근처)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4·3 사건

1948년에서 1951년에 제주에서 4·3이 발발했다. 4·3 연구소에 따르면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 3만여 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를 김성원은 어려서(7~8세 정도) 잘은 모르지만, 피해가 많았다는 것은 짐작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용담에서는 해륜사지 절터(현 용화사)에서 많은 사람이 진압대(토벌대라는 명칭을 하계에서는 사용하고 있음)에 의해 죽어나갔다고 들었단다. 다행히 집안에는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4·3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자,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덕분에 전쟁을 피해 육지로부터 피난온 사람들이 제주시에 넘쳐났다. 김성원이 오현중학교를 다닐때에는 피난민학교라 불려지는 중학교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송죽중학교(약칭 송중)’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난 온 사람들은 대체로 제주 시내에 거주했다. 무근성 ‘통물’ 옆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물’은 제주은행 서문지점 동쪽으로 내려가서 좌측 일대로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두레박으로 물을 떠먹는 곳이라 해서 ‘통물’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 근처가 피난민촌이었다. 거기서부터 용담동까지 피난민이 살았다고 한다. 피난민들은 세를 얻기도 했지만 돈이 없는 경우에는 텐트촌을 형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피난민의 유입, 4·3사건에 의한 소개민의 이입 등은 인구 증가를 낳았고 이는 새로운 도시화의 변동을 일으켰다는데, 이때 비주거지의 용지까지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지금까지 주택지로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한국의 정치적 사건들이 용담1동의 지경 변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학창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1950년대 제주시 지역에서는 중학교 입학도 지원학교에서 제시하는 국, 영, 수 등 교과목 시험을 치르고 평균 60점이 되어야 합격하고 다닐 수가 있었기 때문에, 김성원은 입학시험을 치르고 오현중에 입학하여 용담동의 누나 집에 기거하면서 당시 학교가 있던 오현단(현 제주시 이도1동 1421-3 일대)까지 걸어서 통학을 하였다고 한다. 김성원은 오현중학교 졸업 후 오현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위로 큰 형과 작은 형들도 모두 오현고등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현고등학교는 오현학원이라 불렸으며, 규율이 매우 엄했다고 한다. 원래 오현재단은 1946년 2월15일에 황순하 선생이 제주제일중학교로 설립하였는데, 1946년 10월 22일에 오현 초급중학교로 개명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오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오현이란 제주에 유배왔던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현,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다섯 성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명칭이다. 이후 1948년 8월 14일에 재단법인 오현중학교 유지회가 설치되었고 다시 학제변경에 의해 1951년에 오현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러다 1952년에 재단법인 오현학원으로 개명하였다가 1964년 3월6일 학교법인 오현학원으로 변경하였다.

축구부, 밴드부

김성원이 오현고를 다닐 때 오현고는 축구부와 밴드부가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학교 간 축구시합 때 응원전은 매우 치열하였다고 한다. 특히 오현고, 농업고, 상업고, 대정고가 축구로 유명했는데, 축구 못지않게 바디섹션과 학교응원가를 동원한 이들 학교의 치열한 응원전은 제주도민들에게 굉장한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응원전은 학교 간의 기 싸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응원을 하는 학생들은 목청이 터져라 응원가와 응원구호를 불러댔고, 관람객들은 축구보다 과열되는 응원전에 더 재미를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졸업생들도 동참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과열된 응원전 말미에는 학교 간 극소수 학생들 사이에 패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축구와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번은 목포에서 축구경기를 하는데 오현고가 축구를 잘하자, 육지 사람들이 ‘한라산에서 볼 차면 바다에 떨어지는 데 어떻게 저렇게 축구를 잘하느냐?’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가 조그만 섬인 줄 알고 그랬던 것 같다고 김성원은 회상한다. 그러나 김성원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학비를 댈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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