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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 할머니의 직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23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먹고살기 위한 일본행

신옥년이 일본으로 처음 간 것은 열 살 때였다. 그리고 13년을 살다 귀국했다. 부모와 작은오빠는 모두 용담1동에 살고 있었지만 큰오빠와 고모네, 작은아버지 딸과 아들네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 모친이 ‘석달 증명’(30일용 비자로 이해됨)을 하여 어머니와 일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배는 군대환, 복목환, 경성환, 신길환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가기 전 부친과 모친은 조금 다투었다고 한다. 부친의 일에 모친이 조금만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부친은 싫어했다고 한다. 때문에 모친은 답답한 생활을 잠시 벗어나고자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모친은 어린 신옥년을 데리고 군대환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 작은오빠가 “경찰에 보난 증명도 나왕 붙염십디다. 어머니 어떵허쿠과?(경찰에서 증명을 붙이고 있더군요. 어머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물으니, 어머니는 단번에 간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모친은 밭에 다녀오던 채로 산지(현 제주시 산지천 근방)에 가서 이종 조카가 하는 한복집에서 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린 딸에게도 흰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갈아입혀 그 날 배에 올랐다고 한다. 군대환은 제주섬 전체를 돌아 사람들을 태우고는 일본으로 향했다.

돈벌이는 우산 공장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 작은오빠는 공책과 연필, 흰 운동화를 사놓고는 ‘너는 일본에 가도 일본 학교는 들어갈 수 없으니, 아무리 멀어도 조선 야학을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여자도 글을 배워야 한다’고 작은오빠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야학을 다닐 때 흰 운동화를 신고, 더러워지면 젖었을 때 분필을 발라두면 새하얗게 말릴 수 있는 방법도 첨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야학이라고 하는 곳이 너무 먼거리에 있었던 데다 공장일에 매여 있던 노무자로서는 야학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장에서의 일은 처음 ‘고무리 가사공장’이라고 해서 우산살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전부 한국 사람만 근무했는데, 특히 오라리(현재 오라동) 근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린 신옥년을 아껴주었다고 한다. 거기서의 일은 15일을 일하면 3백 원, 한달에 6백 원의 급여를 받았다고 한다. 그 급료에서 5백 원은 고모네 댁에 밥값으로 지불하고, 남은 1백원으로 목욕비도 하고 용돈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일본에 사는 제주 사람

일본에 가서 보니 ‘히나시나리꼬’라고 해서 동대판 쪽에 제주 사람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제주 시내 사람이 일본에 많이 갔던 것 갔다고 회상한다. 육지 사람들은 산골로 들어가서 ‘박한 일’(힘든 일)도 하고 마차도 끌고 했지만, 제주 사람들은 ‘된 일’(호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차가 얼마 없고 길 위로 다니는 버스 전차와 마차, 자전거 등이 교통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공장 안의 일들을 주로 선택했지만, 육지 사람들은 공장에서 출하하는 물건들을 싣고 다니면서 배달하는 일들을 했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양산 공장(고무리 가사)이나 통쇠 공장 그런 데서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사는 제주 사람들이 많아서 함께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같은 느낌이 났다고 한다.

일본 패전 그리고 더 어려워진 삶

일본이 패전하고 나니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본인들 중에 재일교포 처녀의 저고리 고름을 뜯어버리고 횡포를 놓는 사람들이 있어 신변의 위험이 늘어가자 조선인들이 만든 조직에서(필자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라고 추정한다) 한복을 입지 말고 일본식으로 입든지 양장을 입든지 하라고 하기 시작하면서 신옥년도 양장을 입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제 상황도 의복의 수난만큼이나 나빠져 일본이 패전 후 식량이라고 한 달치를 받으면 15일정도 밖에 먹지 못할 양이었다고 한다. 공장들도 모두 문을 닫은 데다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고 큰 아이조차 보살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어차피 일본서 살아봐도 배가 고플 바에야 ‘고향에서 돈은 없어도 배부른 밥은 먹겠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아기만 데리고 제주로 귀국하겠다고 말했더니 시댁에서 이를 알고 ‘한 배에 한 식구가 다 갈 수 없으니 먼저 세 식구(신옥년, 남편, 장남)가 귀국하라고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 중에는 장롱을 고리짝으로 바꿔 돈 되는 짐을 담아오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기잡이 어선을 이용해 돌아오는 선편에 한 식구가 전부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제주로

신옥년은 일본에서 제주로 들어오는 어선에서 15일을 버티었다. 중간중간 섬에 들러 물을 담아 식수로 사용했고, 바닷물에 씻은 쌀로 밥을 해서 요기를 하면서 15일째 되는 날 제주시 화북항에 당도했다. 이때 이 배로 신옥년 가족 셋과 시이모, 남편의 동생 등 다섯 명이 함께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항구에 내려서 시이모는 친정인 도두리로 가고, 셋째 시동생은 래물로 가고, 신옥년의 가족은 지금 살고 있는 용담1동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후에 래물로 가려고 하니까, 작은오빠가 ‘래물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부모가 계신 것도 아닌데 누가 거들어줘서 살겠느냐’며 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때 오빠는 삼도리에 가서 살게 되니까 신옥년은 친정 아버지만 모시고 살다가 몇 년 후 돌아가셨다.

다시 일본으로

그나마 한국 상황이 일본 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더욱 나빴다. 그래서 다시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는 일본으로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밀항을 해야 하는 판국이 되었다. 이 밀항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신옥년도 귀국 후 일본에서 시집갈 때 친척들이 해준 옷 몇 벌을 팔아서 돈을 구하려고 해도 돈을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오일장에 나가보면 일본에서 밀수로 가져와 파는 ‘양은그릇’이나 물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물며 신옥년 집에 세를 놓은 방에 살던 사람도 자기가 가지고 온 옷을 동문시장에서 팔아달라고 해서 팔아주고 돈을 받아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밀항

밀항을 하는 사람도 돈이 있고 일본에 친척이 있는 경우에나 했다. 밀항을 할 때 일본 어느 섬에 내려 주면 거기에 데리러 마중 나올 사람도 있고, 돈도 물어줄 사람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한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게 밀항을 해서 와이셔츠 공장 같은 데서 일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석달 비자를 받고 가서는 석 달에 한번씩 귀국해서 비자를 갱신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신옥년과 아들도 이렇게 해서 다시 20년 동안 일본을 왕래하며 일을 했다고 한다.

동문시장 그릇집에서

일본에서 제주로 돌아올 때면 신옥년은 동문시장 그릇집에서 일을 했다. 그릇집은 배달 운전수가 셋, 그릇을 파는 종업원들이 4명이 있던, 꽤 규모가 큰 그릇집이었다. 거기서 신옥년은 종업원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돈을 관리하기도 하고, 종업원들이 바쁠 때에는 그릇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신옥년이 근무하던 그릇집은 대대로 산지에서 그릇집을 운영하던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가 그릇 장사를 하다가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작은 아들에서 제주에서는 ‘말젯아들’이라 불리는 셋째 아들에게로 내려온 그릇 가게였다고 한다. 그릇집에 근무하는 종업원들의 나이는 대체로 19살에서 20살 정도였다고 한다. 너무 어리면 물건을 잘 팔 수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20살 안팎이었다고 한다. 종업원들 중에는 추자도 출신이 4명이었는데, 운전수가 둘, 종업원이 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초등학교까지만 나오고 돈을 벌기 위해 제주시로 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추자도는 살기가 너무 어려워 그쪽 출신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제주나 전라도로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신옥년은 사촌 시동생이 교사였는데, 추자로 발령이 나서 가 니 ‘살 곳이 아니었다며 가서 보니 기가 막히더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릇집의 흥망

추자도 출신 종업원들은 곧잘 물건을 팔기도 했는데, 1970~80년대가 되면서 시집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릇 세트를 마련해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새각시 잔치 그릇’이라고 하면 그때 돈 70~80만원 정도의 그릇을 신부들이 마련해서 갔는데, 이 종업원들은 그 돈에 맞게 매출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손님에게 바가지 요금을 씌우기도 했고, 혹은 어떤 그릇들은 반드시 해가야 편안한 시집살이를 하는 것처럼 유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당시 가게에서는 ‘요령 있는 행위처럼’ 인식되어졌다고 한다. 그때 신부들이 마련해서 갔던 그릇들이 사기 밥그릇, 냄비, 밥상, 교자상 등 생필품 외에도 의례용 식기들도 더러 마련해 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향이 급감해서 신옥년 육촌 동생이 몇 년 전에는 와서 신옥년에게 하는 말이 “아이고 성님 댕겨난 그릇집이 이젠 반착으로 줄여네 호끄만허게 핸 두가지덜 만 햄수다(아이고, 언니 다녔던 그릇가게가 이제는 규모가 반으로 줄고 자그만 하게 해서 두 가지 종류 정도만 팔고 있습니다)”하더라는 것이다. 신옥년은 그릇집에서 나이 칠십이 다 되도록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사이 중간중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을 세 번이다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면 항상 그릇집 주인 부인이 와서는 “강 언제 오쿠가? 언제 오쿠가?(가서 언제 올거냐)”며 제주에 오면 또 나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작은 아들 손자를 돌보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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