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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할아버지의 일상생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1011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집필자 문순덕

모둠벌초

농경시대에는 농가에서 음력 8월 1일부터 8월 15일 추석 전까지 대부분 벌초를 했던 풍습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추석이 8월 15일이니까 벌초는 원칙적으로 8월 1일부터 시작했다. 너무 일찍 벌초를 해도(여름철이어서) 풀이 많이 자라거니와 농경시대에는 이 시기가 농한기에 해당하니까 모여서 벌초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몇 대조 할아버지 자손들이 모두 모이면 수십 명이 모이는 집안도 있어서 그 시조의 유대를 과시하는 단합대회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제주도 풍습에 음력 8월 1일에는 친척들이 공동으로 벌초를 한다. 위로 올라가면 한 조상의 후손들이니까 같이 모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조부면 팔촌이 후손에 해당하니까 같이 모여서 벌초를 한다는 뜻에서 ‘모둠벌초’라는 용어가 생겼다고 한다. 김금심(김홍식 아내)은 결혼하기 전에는 벌초를 해 보지 않았는데 결혼을 하니까 며느리로서 벌초에 동참했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남편 형제간들이 있어서 다니지 않았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도 나이 드니까 벗해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배

조사자가 대학시절부터 설날 김홍식 교수님댁을 방문해 왔다. 제자들이 북초등학교 정문에 모여서 세배를 가면 먼저 간 사람과 새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교차하면서 덕담을 나누게 된다. 동문들도 여기서 일년에 한번 얼굴도 보고 세배도 하는 교차로라 할 수 있다. 사모님이 정성껏 준비해준 설음식(떡국)을 한상 가득 차려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맛있게 먹고 온다. 여기를 시작으로 해서 다른 교수님댁을 방문한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과 동문들은 정초 세배 때 교수님댁 설음식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많은 손님을 치르면서도 교수님 부부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즐겁게 맞이해 주었다. 일년 중 제자와 스승이 만날 수 있고, 서로 덕담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며 기뻐해 주셨다.

일제강점기 문화생활

삼도동에 1943년에도 전기가 있었지만 라디오는 그 전부터 사용했다. 라디오는 배터리를 사용하니까 전기가 들어온 것과 무관하다. 그러다가 전기가 들어오니까 전기를 이용했다. 그 당시 라디오는 전축처럼 컸다고 한다. 김홍식의 경험을 보면 일제강점기에도 라디오를 가진 집이 있었지만 광복 후에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김홍식이 광주에서 하숙을 할 때 하숙집에도 라디오가 없었다고 한다. 김홍식도 8·15 때 일본 천황의 담화를 직접 들었는데 전파 사정이 좋지 않아서 잡음이 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는 전시라서 요즘처럼 유행가는 잘 듣지 못했고, 전시에 대한 뉴스나, 고작해야 군가를 듣는 정도였고, 오락프로라는 건 없었다고 한다. 김금심은 초등학교 때 집에 라디오가 있어서 우리나라가 해방되는 것도 라디오로 들었다고 한다.

전화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에 제주시에 200여 대 정도의 전화가 있었고, 개인집에 전화를 가설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학창시절의 노래

김홍식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성장해서 한국 동요를 모르고 자란 세대이다. 일본 동요를 부르고 자라서 지금도 기억나는 일본 동요가 있다고 했다. 북소학교 때 창가를 배웠는데 창가가 동요보다 조금 어려웠으며, 교과목에도 창가가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홍식이 지금도 기억난다며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

"소학교 1학년 때 창가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방법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선생님이 풍금을 치면 학생이 나가서 지정된 창가를 불러 점수를 매겼어요. 그런데 나는 노래를 못 불렀지. 그 때는 평가가 갑을병으로 할 때니까 다른 과목은 다 갑인데 창가만 병을 받았어. 지금도 그 노래는 잊어버리지 않아요. 특히 태평양전쟁이 심화되면서 막바지 이르러서는 창가 대신 군가를 많이 불렀지. 지금 군가라고 할 수 있는 전쟁 분위기의 창가. 일본 창가. 그런 거 상당수를 기억하지."

김홍식의 기억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북소학교 수업시간에 행진곡풍의 일본 창가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소학교 1~3학년까지 ‘조선어시간’(한국어 시간)이 일주일에 한 시간 있었는데 조선어말살 정책이 심화되고 우리말 사용이 폐지되기 직전이어서 가르치는 선생이나 배우는 학생이나 별로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노래를 들은 것은 광복 후, 그 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 노래를 국어 시간에 칠판에 적어 가지고 배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지금도 국어선생님 이름이 기억나는데 이만석 선생님이 동요는 아니고 아무튼 한국노래를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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