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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진수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610
한자 耽羅鎭守軍
영어음역 Tamnajin Sugun
영어의미역 Garrison Force of Tamna
이칭/별칭 탐라주둔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273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273년연표보기
폐지연도/일시 1374년연표보기

[정의]

고려 후기 몽골의 탐라 지배기 때 탐라에 주둔했던 고려군과 몽골군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제정경위 및 목적]

몽골은 1273년(원종 14) 탐라 삼별초를 정벌한 뒤 상당수 고려군과 몽골군을 탐라에 주둔토록 했으며, 이들 탐라진수군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들은 몽골의 탐라 지배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탐라가 일본과 남송(南宋)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경영되었던 데에 따른 것이었다

[내용]

1273년 원(元)은 탐라에 몽골군 5백 명과 고려군 1천 명을 주둔케 하였으며, 삼별초 평정 2개월 이후에는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라는 관부도 설치했다.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실리백(失里伯)은 탐라국초토사의 장관인 초토사로 부임하면서 병사 약 200명을 거느리고 옴으로써 탐라 주둔군은 종전의 약 1,500명에서 약 1,7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탐라진수군으로서 원의 탐라 지배를 가능케 한 기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탐라진수군의 유지비는 고려가 떠맡았으며, 1274년(원종 15) 원의 제1차 일본 정벌 때 탐라 주둔 고려군 1천 명도 함께 차출되어 참전하였다.

제1차 일본 정벌 실패 이후 탐라 다루가치가 고려 조정에 사람을 보내 탐라진수군에 대한 증원을 강요했는데, 이에 따라 “탐라에 수자리 사는 군사[戍卒]가 적음으로 사람을 모집해 작(爵)을 주어 보냈다”라는 기록처럼 탐라진수군에 충원할 사람을 유인하는 조처가 취해졌으며, 왕은 자신의 측근 신하까지 차출하도록 하여 4천 명의 병력 충원을 명했다.

1279년(충렬왕 5) 남송 정벌을 마친 원은 몽한군(蒙漢軍) 약 1,400명을 탐라에 더 보냈다. 원은 자기 나라 군사 약 400명 이상과 고려군 약 1천 명이 탐라에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한군 1,400명을 추가로 보내 일본의 탐라 침략에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정벌의 가장 중요한 기지이자 출발항이기도 했던 합포(合浦)[경상남도 마산]에 일본 침략을 대비키 위하여 증파했던 원군이 약 64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규모이다.

원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탐라에 대규모 원군을 증파해 일본 침략에 대비하려던 조처는 직할령으로 삼은 탐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함에 따라 계속 원의 영역으로 유지해 나아가려는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고려 왕은 제2차일본 정벌군 동원을 고심하다 원에 탐라진수군 1천 명의 차출을 두 번이나 건의해 허락받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탐라진수군에 대한 권한이 전적으로 원에 있었다는 점은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탐라가 경영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1281년 고려와 연합한 원은 제2차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변천]

원은 제2차일본 정벌을 실패한 다음해인 1282년(충렬왕 8)에도 합포에 군사를 보내 주둔시키는 한편, 고려의 요청에 의해 금주(金州)[경상남도 김해]와 전라도 지역인 전주·나주 등의 연해처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는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는 등 여러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

1282년 이후부터 원은 고려가 관리를 파견해 탐라 주둔의 고려군을 통할토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고려가 보낸 탐라 군관의 관할이 시작되었으나 탐라 군관의 가렴주구도 만만치 않게 행해졌다. 그럼에도, 고려의 탐라진수군에 대한 최고 통솔권은 원이 계속 지니고 있었다.

결국 탐라 주둔 고려군의 관할이 고려로 넘어온 조처는 원이 흔히 구사했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 가운데 하나로서 탐라가 양국에 이중적으로 귀속되어 탐라민이 이중 곤욕을 치르게 하는 상황만을 초래했다.

제2차일본 정벌 실패 이후, 탐라진수군에는 고려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탐라에는 원의 직할령이 되는 1273년부터 약 700명의 원군이 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최소한 약 400명 이상이 제2차일본 정벌 실패 후 3년이 지난 1284년(충렬왕 10)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더욱이 원은 1284년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려 탐라에 와 지키도록 하는 한편, 같은 해 약 400명의 탐라 주둔 원군을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조처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400명의 원군은 ‘오랫동안 와 있었던 원군은 교체하라’는 탐라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의 2년 전 건의가 원 황제에게 받아들여져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1284년 원군 병력 중 약 400명이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탐라진수군은 최소한 약 1,800명에서 1,400명으로 감축되었다. 원은 1290년(충렬왕 16)에도 탐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 1천명을 합단(合丹)의 난 토벌에 동원하라는 명령을 고려에 내리기도 하였다. 탐라진수군 1,400명의 병력 규모는 원이 일본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는 1294년(충렬왕 20)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원의 병력 약 1,400명은 탐라 주둔 고려군 1천 명과 더불어 원의 탐라 지배를 뒷받침한 무력적 기반의 양축이었다. 탐라진수군 가운데 상당수는 원의 탐라 지배가 1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탐라에 머물러 살면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이에 따라 원군은 원의 죄수와 관료로서 탐라에 왔었던 유배인, 몽고족으로 원의 탐라 국립 목장을 관할하던 목호(牧胡) 등과 함께 탐라 여자와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그 양상은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반(半) 몽골족화의 탐라민이 상당수 태어남에 따라 탐라의 인구 규모가 확대되었음과 동시에 탐라 몽골족의 세력 기반도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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