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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463
한자 鄕吏
영어음역 hyangni
영어의미역 local functiona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 전기 제주 지역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아전(衙前).

[개설]

향리라 부르는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며 지방 행정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오늘날의 지방 공무원에 비견될 수 있다.

[제정배경]

탐라국의 지배 세력은 고려 후기에 점차 와해되면서 일부는 토관 세력으로 진출하고 또 다른 일부는 향리 세력을 형성하였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 향교가 설치된 것은 태조태종 때이다.

그러나 이들 향리들은 성리학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성리학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때문에 예법은 물론, 법전을 읽고 그것에 따라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지방장관으로 파견된 수령으로서 이러한 향리들에게 향역(鄕役)을 부담시키고서는 통치 수행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찰방(察訪) 김위민(金爲民)이 제주도 지방에 계속 누적되어온 폐단을 상서하여 제주안무사 조원(趙原)은 양민 가운데 글자를 아는 사람 30여 명을 선출하여 전리(典吏)라 칭하고 말단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427년(세종 9) 6월 전리의 직책이 폐지될 때까지 제주 지방 행정의 말단실무는 오로지 전리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시기 향리들은 600여 명이나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둔전(屯田)에 부역하면서 어랍(魚蠟)·흥판(興販) 등 잡역에 종사였다. 따라서 전리가 존재한 곳의 향리는 제주 지방 행정에 있어서 수령과 배제된 양상을 갖는다.

[담당직무]

중앙에 6조를 두었듯이 지방에는 6방(六房 : 이·호·예·병·형·공방)을 설치하여, 여기에 지방의 유력층을 관리에 임명하였다. 제주 지역에는 600여 명에 가까운 향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교양은 물론 행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향리들은 수령이 지나가도 책상 위에 걸터앉아 거들떠보지도 않는 등 예법이 없었고, 주로 고기잡이나 사냥, 장사 등에 종사하였다.

[관등체계상의 특징]

이에 제주 안무사 조원은 제주 주민 중에서 글자를 아는 사람 30여 명을 뽑아서 전리라 하고, 이들에게 행정을 맡겼다. 향리를 대신하여 전리가 조선 초기 제주 지역에서 지방 행정을 담당한 것이다.

전리의 폐단이 점차 극심해지자 세종 때 이르러서는 이를 없애고, 향리들에게 본래의 업무를 맡기는 방안이 서서히 마련되기 시작했다. 결국 얼마 안 가 향리들로 하여금 지방 행정의 말단 업무가 대체되었으나, 토착 세력들과 결탁한 이들의 주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변천]

제주도의 지배체제는 중앙권력의 상징인 수령권과 향촌 세력의 상징인 토관 세력의 갈등 속에 유지되었는데, 15세기는 향촌 세력인 토관 세력이 수령권을 능가하였고, 16세기에는 양자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수령권의 우위로 나타나고, 17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수령권이 제주비장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또 지배구조도 다른 지방과 같이 수령-향리-면·리임-평민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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