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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807
한자 歷史
영어음역 Yeoksa
분야 역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이정자

[정의]

선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역사.

[개설]

제주도는 고대로부터 중국에서 한반도 남쪽을 거쳐 일본 큐슈[九州]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가 되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과거 유물·유적의 분포지가 대부분 제주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유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28년 제주항 축항 공사 때에 인근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일괄 유물은 과거 제주도가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로상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지적 조건으로 제주도의 문화는 본토와는 다른 특수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선사]

제주시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만~8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속칭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순록과 황곰·붉은 사슴·노루 등의 뼈가 발견되었다. 순록과 황곰은 오늘날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벌판에서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예전에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주 고산리 유적(사적 제412호)이 있다. 유물로는 즐문토기·무문토기·석부·마제석도 등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제주시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초반부터 집단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 중 제주 삼양동 유적은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개벽신화의 터전인 제주 삼성혈도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제주 삼성혈(三姓穴)에 얽힌 신화는 선사시대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주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발상지이자 개국의 성지로서 고(高)·양(良)·부(夫)의 세 신인(神人)이 이곳에서 솟아 나와 수렵생활로 연명하다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문헌상으로 볼 때,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 기록보다는 중국의 역사서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제주도의 경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州胡)’에 관한 기록이 그 첫 예가 되겠다. 이 기록은 당시 제주도 사회의 미개상태를 다소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호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곳 사람들은 마한인들 보다 조금 키가 작고 언어도 한족(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깎았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어서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한(韓)나라에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판다.”고 하였다.

[탐라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러 제주시는 탐라국(耽羅國)의 중심지이며 관문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76년(문주왕 2) 탐라국이 백제에 방물을 바쳤다. 이후 백제를 섬기다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신라에 입조, 복속되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을 『신당서』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당시 왜와 사신의 왕래와 문물교류의 기사도 보여 고대의 탐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탐라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랫동안 사신 왕래가 있었으며, 교역도 이루어져서 탐라방포(耽羅方脯, 일명 耽羅脯)와 탐라복(耽羅鰒, 전복) 등의 물품을 일본에 수출하였다.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탐라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함께 백강(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싸웠다.

925년(태조 8)에 탐라는 처음으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2년 후인 938년에는 탐라왕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입조함으로써 고려의 조공국이 되었다.

탐라국 시대는 제주도가 성주(星主, 탐라국왕)·왕자(王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성주와 왕자의 호칭은 신라 전성기에 탐라 왕족인 고후(高厚)·고청(高淸) 등 세 형제가 신라에 가서 왕을 찾아뵈었을 때 신라왕이 그들에게 성주·왕자·도내(徒內)의 작위를 주었던 데서 유래한다. 고려 태조도 신라의 예를 따라 말로(末老)에게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하며 또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세자라 칭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탐라국 왕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무산계를 수여하거나 구당사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무산계는 무관에게 주었던 품계이며, 구당사는 탐라국 내의 민정을 살피고, 때로는 탐라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을 조정에 보고하고, 처리하게 하는 등 지방 통제를 강화할 필요에서 두어진 관직이었다. 그 뒤 숙종 10년(1105)에 이르러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제되면서 고려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성주는 군현으로 편성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조선조 태종 2년(1402)에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더욱이 고려에서는 탐라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중국의 송나라나 여진족·일본 등에서 왕래하는 사신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였다. 탐라국 사신들은 고려의 연중행사인 팔관회(토속신앙)나 연등회(불교행사)에도 참가했다. 또 이 때에는 물물 교역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 탐라국에서 진상했던 물품으로는 선박·귤·우황·쇠뿔·쇠가죽·나육(螺肉)·비자·해조·진주·말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

1105년(숙종 10)에 이르러 제주는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직접 관할하에 들어갔다. 1153년(의종 7)에 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고종연간에 탐라가 제주로 개명되었고, 부사 및 판관을 두어 행정을 관장하였다. 충렬왕 21년에 가서는 제주목이 설치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주에서 약 2년 반 웅거하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이를 토벌하였다. 이후부터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다.

1276년(충렬왕 2)에는 원나라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몽골의 지배 때는 제주도가 그들의 직할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탐라·혹은 탐라국으로 호칭하였었다. 그러나 1294년에 원나라에 탐라를 돌려주기를 요구하여 고려에 환원된 뒤에는 다시 제주로 고쳤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부터 수탈이 자행되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민란의 주된 요인은 관리의 가렴주구와 토호 권세가의 토지침탈, 조세·부역의 가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관군과 삼별초간에 처음으로 공방전이 전개되었을 때,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관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왔다는 것은 단순히 대몽 항쟁을 전개하고 있는 삼별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겪어온 관리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별초를 도왔던 것이라 한다.

1362년(공민왕 11) 목호(牧胡)의 난으로 또 다시 탐라만호라는 관리가 두어져 관할되다가 1367년 고려의 요청에 의해 완전히 고려에 귀속되었다. 1374년 탐라에서 발호하던 목호들은 최영(崔塋)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었다.

[조선시대]

1402년(태종 2)에 오랫동안 전래되어 오던 성주(星主)·왕자의 칭호가 폐지되어 성주가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가 우도지관으로 개칭됨으로써 종전의 토관직(土官職)이 없어지면서 제주 지배층이 없어졌다. 1416년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이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가 두어지고, 산남은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이 정의현(旌義縣), 서쪽이 대정현(大靜縣)으로 구분되어 현감이 두어졌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609년(광해군 1) 김치(金緻)가 판관으로 있을 때 동서 방리를 설치하고 약정(約正)을 두었다. 제주목에는 중면·좌면·우면, 정의현에 좌면·중면·우면, 대정현에는 우면·좌면을 두었다가 뒤에 제주목의 좌면이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나뉘고, 우면도 그렇게 나뉘었다. 현재의 제주시 지역은 제주목의 중면에 해당된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호, 인구가 6만 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선조 약 500년을 통하여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유배인들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신분도 위로는 광해군과 같은 폐왕이나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승려와 환관·도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었으며, 사면 후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대로 넘어오면서 1목 2현의 행정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종래 부·목·군·현 등으로 번잡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을 모두 군으로 단일화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현·정의현이 모두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제주부의 관청은 제주에 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제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갑오경장의 여파로 1894년 종래의 지방제도는 모두 폐지되었고 23개의 부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는 제주부로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의 세 군을 제주부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1896년(고종 33년) 8월에는 전국 23부를 13도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제주도는 제주목으로 개칭되었고 목사를 두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주는 섬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곤란할 뿐 아니라 나라에서 특별히 덕화(德化)를 베푸는 특수성으로 인해 목(牧)을 설치하여 대정·정의 두 군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다시 1목 2군 즉, 제주목과 대정군·정의군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광무 원년(1897) 11월에 제주군이 신설되면서 1목 3군이 되었다가 동 10년(1906) 9월에는 제주목사제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관시켰다. 이리하여 당시 제주도는 제주·대정·정의 3군 체제로 여전히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1908년에 목사가 폐지되고 부가 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제주목이 폐지되고 제주군이 되었다. 1909년에 대정군과 정의군이 폐지되어 제주군에 흡수됨으로써 제주도는 1개 군 12개 면 167개 이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제주시 지역은 이때 제주군 중면이었다.

[일제강점기]

한편 일제강점기인 1913년 중면이 제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에는 제주도의 군제(郡制)가 폐지되고 도사제(島司制)를 실시하여 도사로 하여금 경찰서장까지 겸하게 하였다. 1917년에는 환상(環狀)의 일주도로가 해안 마을을 관통하여 개통됨으로써 종래 내륙으로 진출하였던 말단 행정의 중심지가 해안 마을로 이동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1929년 당시의 제주면내의 호구수는 8,013호, 3만5013인이었다. 1931년 제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어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군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군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으리만치 활발했다.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본토에서의 운동에 호응한 운동도 있고, 또한 제주도의 독자적인 운동도 있다. 한국항일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격과 비교하여 볼 때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도민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해방 전 제주도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고 여기에 보충적인 산업으로서 수산업과 목축업이 있었다. 그런데 소작쟁의(小作爭議)가 거의 안 보인다. 물론 1930년대의 가장 큰 투쟁으로서는 1932년의 '해녀항쟁'이 있었지만 이 투쟁도 수산자본에 대결한 해녀항쟁이라기보다도, 일제권력에 유착한 해녀어업조합에 대하여 해녀를 중심으로 결속된 마을공동체의 대결이란 성격이 농후하다.

둘째, 제주도 항일독립운동은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제주도 사상운동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로 김명식(金明植)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김명식은 한국 최초의 노농(勞農)단체로서 1920년 4월에 창립된 '노농공제회(勞動共濟會)'의 발기인으로서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초창기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도 사상운동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영향이 직접, 간접적으로 매우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현대]

1946년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되었고,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62년 1월 1일에 14개 동의 행정동이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23일에 일도동일도1동·일도2동으로, 이도동이도1동·이도2동으로 오라동오라동·연동으로 분리 되었다. 1983년 10월 1일에 삼도동삼도1동·삼도2동으로, 1985년 10월 1일에 용담동용담1동·용담2동으로 분리되었다. 2006년 7월 북제주군을 통합하면서 일도1동 등 19동, 한림읍 등 4개읍, 한경면 등 3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8·15 해방으로 자주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고,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에 주력하면서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자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주도에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기용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을 키워갔다.

미군정의 정책은 도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3·1사건과 4·3사건으로 도민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제주 사회는 또 한 번 격변하였다. 4·3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제주에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과 중공군 포로가 밀려들었다. 4·3에 이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제주도민은 권위주의적인 반공국가체제하에서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의식과 함께 국가의 물리력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1990년대부터 제주도 개발의 기본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장기계획을 수립하여 제주도 고유의 향토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자연 및 자원을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관광여건을 조성함으로써 도민의 복지향상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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