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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477
한자 浦口
영어의미역 Port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광민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지역에서 배가 드나드는 길목.

[개설]

포구는 ‘개’·‘개맛’·‘개창’·‘성창’·‘돈지’라 일컬어지는 바다 밭으로 나가는 길목이며, 주로 해변 인접한 곳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화산도(火山島)로 이루어진 제주도의 해변은 단조롭고 암초가 많아 배를 정박할 만한 포구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제주도의 포구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데, 이는 비교적 굴곡이 발달한 대륙도나 산호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 섬은 외부와 교역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포구는 제주도 사람들에게 절체절명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외부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왔다.

1928년 제주항 공사 중에 중국 전한(前漢, B.C. 202~A.D. 220) 때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의 발견이 이를 대변한다.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주호(州胡: 濟州島)의 ‘시매한중(市買韓中)’과 대마국(對馬國)의 ‘남북시적(南北市糴)’이 그 단적인 예이다. 섬나라가 교역을 활발하게 이루어내는 데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포구였다.

고광민(高光敏)은 『제주도포구연구』에서, 김상헌『남사록(南槎錄)』이증『남사일록(南槎日錄)』을 모델로 하고, 여러 문헌과 지도를 보조 자료로 삼아, 또 현장 조사를 통하여 82개 제주도 포구의 현재 위치를 추적하였다. 또 이를 토대로 포구의 이름을 분석한 바 있다. 포구의 이름은 마을·지경·포구·지형지물의 이름을 취하였다.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는 53곳, 지경 이름을 취한 포구는 20곳, 포구 이름을 취한 포구는 7곳, 지형지물을 취한 포구는 2곳이었다. 포구의 이름은 절대적으로 마을 이름을 취하였다. 부득이 그럴 수 없는 경우에 지경·포구·지형지물의 이름을 따랐다.

[지리적 배경]

제주도는 배의 종류에 따라 포구의 규모를 달리하였다. 전선가박포구(戰船可泊浦口)는 8곳, 대강가박포구(大舡可泊浦口)는 15곳, 병선가박포구(兵船可泊浦口)는 47곳, 어선가박포구(漁船可泊浦口)는 81곳이었다.

제주도의 연륙 포구는 원래 5개 포구이었다가 1555년(명종 10)부터 두 개의 포구로 한정되었다. 연륙 포구는 모두 제주도 북부에만 쏠려 있었다. 제주도에서 한반도를 오가는 데는 새벽에 출선하고, 초저녁에 추자도에 도착하는 것이 최상의 코스였다. 제주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출륙한다고 하더라도 제주도 북쪽의 어느 포구든 우선 경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연륙 포구가 제주도 북쪽에만 쏠리게 된 지리적 배경이었다. 또 부역과 공납에 시달리는 제주도 백성들은 호시탐탐 탈출을 꾀하였다. 이를 간계(奸計)로 규정한 조선왕조는 출륙 포구를 화북포(禾北浦)와 조천포(朝天浦)로만 묶어 놓았다. 이것이 제주도 연륙 포구를 두 포구로만 묶어 놓은 정치적 배경이었다.

한편 제주도의 배는 덕판배와 터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덕판배는 연륙선(連陸船)과 어선(漁船)이 있었다. 제주도의 연륙선은 본토의 육선(陸船)과는 규모와 구조를 달리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제주도 포구의 입지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선은 제주도의 해변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펄바다’를 드나드는 낚싯배가 주종을 이루었다. 터우는 1936년 말 현재 제주도 전역에 533척이 있었다. 거름용 해조류 채취가 주목적이었다. 이는 제주도의 토양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형]

제주도의 포구는 이용 목적에 따라 서로 달리하였다. 배를 감추는 포구를 ‘배개’ ,‘터우’를 붙이는 ‘터웃개’ 또는 ‘텟개’를 구분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포구 유형은 지형 조건으로 만입형(灣入型), 곶형(串型), 빌레형, 천변형(川邊型), 복합형, 애형(崖型)으로 나눌 수 있었다. 만입형(灣入型)과 곶형(串型)은 조수(潮水) 조건에 따라 세분하였다. 여러 유형의 포구와 김상헌『남사록』의 병선 가박 포구를 견주어 본 결과, 입지 조건이 절대적인 포구의 기준은 아니었다.

제주도의 포구는 보조 포구가 크게 작용하였다. 보조 포구가 필요하지 않은 포내형(浦內型)의 포구는 두 개의 포구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외 포구들은 주변 산재형, 근거리 고정형, 원거리 1개소 고정형, 원거리 2개소 고정형, 해변 점진형, 해중 점진형, 천변 점진형(天邊漸進型)이 있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7.09 [지리적 배경] 수정 <변경 전> 1555년(세종 34) <변경 후> 1555년(명종 10)
이용자 의견
문** 지리적 배경에 1555년(세종 34)로 되어있는데 이때 조선은 명종 10년이고 명나라가 세종 34년입니다. 구분할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답변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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