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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총관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433
한자 耽羅總管府
영어음역 Tamna Chonggwanbu
영어의미역 Tamna Commandery
이칭/별칭 탐라국군민도달노화적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275년 이전
폐지연도/일시 1284년연표보기

[정의]

고려 후기 원간섭기에 원이 제주도를 직접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개설]

원은 원래 삼별초를 평정한 직후 제주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하였다가 곧이어 이를 탐라국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개편하였다.

이것이 탐라총관부로, 개편 시기는 1275년(충렬왕 원년)경이다. 총관부의 장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에는 몽고족 인물이 파견되었지만 휘하 관원에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임명되었다.

탐라총관부와 관련하여 원은 제주도에 1천 명 이상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삼별초를 공격할 당시 원군은 7백 명 정도였으나, 충렬왕 8년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로 1천4백 명의 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다. 그 후 병력의 일부가 철수하고 대략 1천5백여 명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정경위 및 목적]

탐라총관부는 원대의 지방행정 단위인 행성(行省)·노(路)·부(府) 중에서 노에 설치되는 관부였다. 이 기구는 권농(勸農)과 아울러 군정 업무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탐라도 원의 지방행정 단위 가운데 노로 간주되어 총관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결국 원은 군민도달노화적총관부를 통해서 탐라를 행정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내용]

제주는 남송 과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 일찍부터 원에게 주목받았다. 또한 목마장이 설치되면서 경제적 이점이 부각되자 원간섭기에는 원의 직접 관할 지역이 되었다.

탐라총관부는 제주를 장악하며 조선용 목재를 징발하고 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목마장을 다수 개발하였다. 목마장은 충렬왕 2년 탐라총관부의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고말 160필을 서귀포시(구 남제주군) 성산읍에 있는 수산평에 방목하면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후 제주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변천]

탐라총관부는 1284년(충렬왕 10) 탐라국안무사로 개편되었다. 이후 일본 정벌에 집착하던 원의 세조가 1294년(충렬왕 20) 세상을 떠나자 고려가 원에 요청하여 탐라를 환속받았으나, 1300년(충렬왕 26) 원이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탐라는 다시 원의 직할령이 되었다.

원은 탐라를 돌려받더라도 탐라 목장의 말은 계속 원에 바치기로 한 약속을 고려가 잘 이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충렬왕의 견제와 탐라 목장의 경영 강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할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다음 해 탐라총관부는 탐라군민만호부(耽羅軍民萬戶府)로 개편되었으며, 이후에는 변함이 없다가 반원정책이 단행되는 1356년(공민왕 5) 폐쇄되었다. 탐라만호부로의 개편은 고려가 탐라총관부를 혁파하고, 합포의 진변만호부 등과 같은 예에 의할 것을 원에 요청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탐라총관부가 원의 직접 지휘를 받았던 반면에, 탐라만호부는 고려왕이 장관인 정동행성 관할하에 두었다.

[의의와 평가]

원은 탐라총관부의 장관인 다루가치는 몽골족을 파견했으나, 항상 토착 세력을 관부의 속관으로 기용해 탐라 지배에 참여시켰다. 이는 원이 흔히 구사하던 이이제이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탐라총관부의 설치로 제주에 토착화된 몽고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한동안 불식되지 않았으며, 이는 탐라가 고려에 반한된 뒤에도 남아있던 몽고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2.23 [개설] 등 일부 서술 수정 휘하 관원에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임명되어 원의 지배를 방조하였다. -> 휘하 관원에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임명되었다. 일본 침략을 대비하여 ->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로 일본 침략에 대한 전진 기지로서 ->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 이는 반고려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이는 탐라가 고려에 반한된 뒤에도 남아있던 몽골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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