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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368
한자 崔益鉉
영어음역 Choe Ikhyeon
이칭/별칭 찬겸(贊謙),면암(勉庵),최기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배인
출신지 경기도 포천
성별
생년 1833년(순조 33)연표보기
몰년 1906년(고종 43)연표보기
본관 경주(慶州)
대표관직 사헌부장령|승정원동부승지|호조참판

[정의]

조선 말기 제주로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초명은 최기남(崔奇男)이다. 아버지는 최대(崔岱)이며,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855년(철종 6년) 유학(幼學)으로 도기과(到記科: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식년 문과 초시)에 강(講)이 뛰어나 문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어 그 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8년(고종 5) 사헌부장령으로서 스승 이항로(李恒老)[1792~1868]와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의 실정을 상소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1873년(고종 10) 승정원동부승지에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과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하여 서원 철폐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흥선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하고 고종의 친정(親政)과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고종 12)에 풀려났다.

1873년 12월 4일 조천포에 도착하여 제주성 내 칠성로에 있는 윤규환의 집을 유배소로 정하였다. 제주목사 이복희가 감시하였다. 당시 교유한 제주의 문사에는 안달삼·김희정·강기석·김용징·김치용·김양수·김훈 등이 있었다. 1874년(고종 11) 3월 27일 이기온과 함께 한라산에 등산하여 두루 명승을 구경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 일본과의 통상 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의병 운동을 촉구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전라북도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 쓰시마 섬에서 주는 음식은 모두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끝내 거부하고 제자에게 유소(遺疏)를 구술해 남기고 아사순국(餓死殉國)하였다.

[학문과 사상]

조선 말기 일본의 침략 아래 위정척사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하였으며, 유학의 거봉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면암집(勉庵集)』이 있는데, 한라산을 등산하고 지은 기행문「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가 실려 있다.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는 원래 한라산의 경치가 유명할 뿐만 아니라 작가의 묘사도 훌륭하여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게재된 바도 있다. 글씨는 백록담 동벽 바위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방선문(訪仙門)의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으며, 1982년 8월에 충청남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모덕사(慕德祠)에 제향되고 있으며, 포천·해주·고창·곡성·무안·구례 등지에서 봉향되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번지[청성사길 101]에 있는 채산사는 1906년 유림이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며 1976년 8월에 경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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