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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649
한자 李衡祥
영어음역 Yi Hyeongsang
이칭/별칭 중옥(仲玉),병와(甁窩),순옹(順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653년(효종 4)연표보기
몰년 1733년(영조 9)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관직 제주목사|동래부사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고, 아버지는 이주하(李柱厦)이다.

[활동사항]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후 제주의 전통 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학덕이 높은 선비를 선생으로 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고을라·양을라·부을라를 모시는 삼성사(三姓祠)를 세웠다.

제주도 남부에 있었던 한라호국신사인 광정당(廣靜堂)에서 지방민들이 기도하던 풍습을 근절시켰다. 이 밖에도 신당(神堂)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단속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여 두 사찰을 불태웠다.

유교적 풍속 교화에 힘써 일부다처가 윤리에 벗어난 일이라 하여 금지시켰고 동성동본 간의 혼인과 근족간의 혼인도 엄격히 금지시켰다.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금하였고, 여름에 남녀가 어울려 샘물에서 함께 목욕하는 일이 풍기를 문란케 하는 행위라 하여 금지시켰다.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 가문에 이어져 온 산마감목관의 세습제를 폐지하였다. 1658년(효종 9)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金大吉)이 산마감목관을 이어받은 이래 그 자손에게 세습되고 있었다. 이 세습제가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 권세를 남용하고 목졸(牧卒)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있어 과감하게 혁파한 것이었다.

제주목사에서 이임한 후 영광군수와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이후 30여 년 간 초야에 있다가 1728년(영조 4)에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에 임명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는 『병와문집(甁窩文集)』이 있다. 『병와문집』의 서(序)에 있는 『탐라순력도서(耽羅巡歷圖序)』는 제주도의 인구·우마·감귤·전답 등에 대한 상세한 통계가 있는 자료이다. 이밖에『둔서록(遯筮錄)』·『악학편고(樂學便考)』·『강도지(江都誌)』·『예학편고(禮學便考)』·『남환박물(南宦博物)』·『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형상의 공을 기리는 비는 4개가 세워졌으나, 현재 사상이형상기념비(使相李衡祥紀念碑)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제주 삼성혈에 남아 있다. 1735년(영조 11)에 영천의 성남서원에 제향되었고, 사후 63년 만인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1829년(순조 29) 제주 유생들이 이형상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혜사(永惠祠)에 추가로 제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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