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철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636
한자 李喆運
영어음역 Yi Cheolu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보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대표관직 제주목사|봉산군수|김해부사|좌도수군절도사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1776년(영조 52) 봉산군수를 거쳐 김해부사와 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봉산군수 재임 중 장령 유영진(柳榮鎭)[1723~?]은 이철운에 대해 “민생을 침학하여 자기 살찌우기를 마치 천성을 상실한 사람처럼 하므로,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지 않음이 없었다.”라는 이유로 벌을 내리라는 상소를 올렸다.

1792년(정조 16) 3월 이운빈(李運彬)[1730~?]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으나 4개월 후인 1792년 7월 평안도 구성부사 김사목(金思穆)[1740-1829]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1792년 8월 조정은 제주의 농사가 염려되어 제주의 상황을 잘 아는 이철운을 유임시키고 김사목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

1793년 11월 사헌부장령 강봉서(姜鳳瑞)는 “1793년에 흉년이 들었는데도 제주목사 이철운은 술에 취해 환곡(還穀)을 함부로 하고 삼읍(三邑)에서 굶는 자가 2천여 명인데 4천여 명으로 보고하였다.”라는 상소를 올려 이철운을 삭탈관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조정은 강봉서의 상소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심낙수(沈樂洙)[1739~1799]를 제주안핵어사로 파견하여 자세히 조사한 후 이철운을 파직시키고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1797년(정조 21) 우의정 이병모(李秉模)[1742~1806]가 이철운의 공적이 크다고 보고하여 유배에서 풀려났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