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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635
한자 李昌輝
영어음역 Yi Changhw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1695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변호사|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1695
성별
생년 1897년(고종 34)연표보기
몰년 1934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경력 조선농민사 이사|조선변호사협회장|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활동사항]

191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법률 공부를 한 뒤 1921년 8월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24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0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25년 10월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농민사가 결성될 때 김준연(金俊淵)·최두선(崔斗善)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 회장, 보성전문학교 교우회장,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민중 계몽을 위해 전국 순회 강연도 하였다. 고향에 대한 관심도 높아 1929년 고산포를 정기 여객선 기항지로 만들었고, 1931년에 고산우체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창휘는 특히 항일운동가와 사상가들의 변론에 힘썼다. 1928년 6월 변호사 10명이 참여한 경상남도 청년연맹 사건 재판에 자청하여 변론에 나섰으며, 1929년 8월 여운형(呂運亨) 사건 재판에서는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허헌(許憲)과 함께 여운형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창휘김병로·허헌과 함께 ‘민권변호 삼총사’라고 불렸으며,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운동, 간도공산당 사건 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 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 망우동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한 사건의 재판에서도 이인·허헌과 함께 민족적 입장에서 변호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운동가 김문준(金文準)이 연루된 사건의 재판에서 변론하였다. 1934년 9월 10일 38살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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