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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622
한자 李益雨
영어음역 Yi Ik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1118[내동길 26-2]
시대 근대/근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1118[내동길 26-2]지도보기
성별
생년 1910년연표보기
몰년 1996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경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광주지부 선전부장|광주인민위원회 서기국장|조선공산당 전라남도당 재정부장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 양부는 이한구(李漢九)이며 부인은 장경렬(張璟烈)이다. 조선 말기 제주군수를 역임한 김창호(金昌鎬)의 생질로, 김창호의 아들 김정순(金正舜), 김정로(金正魯)와는 외종형제(外從兄弟) 사이이며 모두 항일운동가이다.

[활동사항]

한림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호세이대학교[法政大學校]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한림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수풀소년단을 조직하였다. 1931년 5월 5일 한림공립보통학교 재학생 400여 명의 동맹 휴학을 지도하여 노예 교육의 폐지, 수업료 감면, 교과서 무상 배포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투쟁하였다.

제주의 청년 운동가들은 급진적인 변혁을 위해서 제주청년동맹 및 신간회(新幹會)를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1931년 5월 16일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강창보(姜昌輔)·오대진(吳大進)·김한정(金漢貞)·신재홍(申才弘) 등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였을 때, 이익우는 농민부를 맡았으며 담당 지역은 구우면(현재 한림읍·한경면)이었다.

1931년 12월 김태안(金泰安), 고운선(高雲善) 등과 함께 구좌읍에서 일어난 해녀 항쟁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32년 초 체포되었다. 1932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6년이 선고되어 항소하였고,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와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광주지부 선전부장과 광주인민위원회 서기국장이 되었다. 1946년 6월 조선공산당 전라남도당 재정부장에 선임되었으며, 미군정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1989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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