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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572
한자 李奎遠
영어음역 Yi Gyuwon
이칭/별칭 성오(星五),장희(莊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찬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833년(고종 20)연표보기
몰년 1901년(고종 38)연표보기
본관 전주(全州)
대표관직 제주목사|어영대장|군무아문대신|경성부관찰사|함경북도관찰사

[정의]

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오(星五), 시호는 장희(莊僖). 아버지는 이면대(李勉大)이다.

[활동사항]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도의 단천부사, 경기도의 통진부사를 지냈고, 1881년(고종 18)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 어영대장, 총융사를 역임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실패 후 수구파 정권이 들어서자 해방총관(海防摠管)과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를 지냈다. 1891년(고종 28) 9월 정용기(鄭龍基)의 후임으로 제주찰리사를 겸하여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94년(고종 31)까지 재임하였다.

이규원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시기의 제주 지역은 김지(金志)[1835~1896]가 민란을 일으켜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이규원이 안정시켰다. 1892년(고종 29) 봄에 오현단(五賢壇)귤림서원(橘林書院) 옛터에 축조하였으며, 여름에는 실화로 소실된 운주당(運籌堂)을 다시 건립하였다. 1894년에는 효열을 장려하였고, 각종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894년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군무아문대신, 경성부관찰사, 함경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 비석거리에 찰리이상공규원청덕비(察理李相公奎遠淸德碑)가 있다. 이규원의 후손이 2004년 이규원의 전 유품을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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