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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562
한자 衣生活
영어음역 Uisaenghwal
영어의미역 costum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현진숙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옷을 입는 생활.

[개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옷을 입고 생활한다. 그러므로 의복은 기후나 풍토 같은 자연 환경에 적합한 형태를 띠게 된다. 또한 일의 성격, 도덕적 기준이나 미적, 정치적 관념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치 등의 사회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신체를 장식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의복 착용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 의생활도 이러한 요소에 영향을 받으면서 생성되고 변화하였다. 제주 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본토와의 관계와 역사서에 기록된 단편적인 기록, 얼마 되지 않는 유물과 구전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

제주도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의 의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어느 지역이나 그랬듯이 직조 기술을 습득하기 전에는 풀이나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의생활을 하였다. 즉 추위를 막고 신체를 보호하고 꾸미는 본능적인 의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서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부드러운 가죽옷이나 풀을 엮어서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당시의 의생활은 직조를 통해 만든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재료를 이용하여 옷을 몸에 걸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제주도의 의생활은 백제 및 신라와의 교류, 더 나아가 일본 및 중국과 대외 교류가 활발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때에는 직물을 직조한 옷을 입었으며, 다른 지역과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의생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고려시대]

신라시대 말부터 관복이 당제(唐制)로 개편되는 등 당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의생활이 고려의 몽고 복속 이전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도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지며, 특히 관복 등의 하사로 제주도 지배층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일반 서민들의 의복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다.

13세기에는 몽고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관리하게 됨으로써 100여 년간 실질적으로 몽고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제주도의 의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태능(金泰能)의 연구에 의하면 몽고의 영향으로 겨울철에는 야외 활동을 위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또한 개와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감테’라는 방한용 사냥 모자, 가죽으로 만든 방한화를 신었다. 이외에도 머리에 수건 등을 쓰는 것도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의생활은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제주도를 돌아보고 난 후 순력을 기리기 위해 완성한 그림책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통해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림에서는 관원의 관복과 일반 평민들이 입는 평상복과 노동복으로 구분되어 있다.

관복 차림은 본토와 다르지 않고 일반 평민들이 입은 의복으로는 외출복과 노동복이 있다. 남자들은 외출복으로 바지, 저고리 위에 포를 입고 갓을 썼고, 여자들은 치마, 저고리에 얹은머리 모습이다.

노동복 차림으로는 목자들이 입는 바지, 저고리에 털벙것을 쓰고 가죽발레를 입었다. 물질할 때 입는 물옷은 흰색으로, 가슴과 하체를 가린 모양인데 이는 1970년대까지 입었던 물옷의 형태와 비슷하다. 뱃사공은 상투 머리에 바지와 저고리 차림이다.

[근현대]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의생활을 살펴보면, 태어나서 최초로 봇뒤창옷이라는 배냇저고리를 입었다. 이 옷은 의례적인 성격의 옷으로 삼베로 만들었다. 아이가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하게 되면 저고리와 밑이 터진 풍차바지를 입혔다. 아이가 점차 자라면 바지, 저고리, 치마를 입혔다.

혼례복은 신식과 구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식은 신랑이 사모관대를, 신부가 장옷이나 원삼을 입는 것이다. 신식은 신랑이 양복 차림을, 신부가 흰색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흰색 너울을 쓴 형태이다. 신부가 입은 혼례복의 경우, 1인용 가마를 타고 시집 갈 때는 장옷을 많이 입었고, 가마를 탈 때는 원삼을 입었다.

1950년대 말에는 가마 대신 화물 자동차를 이용하는 등 신·구식이 혼용되었으며, 신부 집의 마당에 병풍을 치고 결혼식을 올리거나 사진을 찍는 새로운 풍습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는 공회당이나 극장을 빌려 예식을 올리기도 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모양새를 갖춘 예식장이 생겨나면서 구식 결혼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제주도의 경우 평상복과 외출복은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상류층에 속하는 남자는 직물이 무명인 것도 있지만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고, 하절기에는 생명주와 모시를 사용했다. 옷은 바지, 저고리, 배자, 도포,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에는 갓을 썼다.

일반 서민은 거의가 무명 저고리, 무명 바지를 입었고, 격을 갖추어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자도 다른 지방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상류층에 속하는 여자는 속옷으로 다리속곳을 입었고, 서민들은 소중이를 입었다.

가슴에는 치마와 저고리 사이 겨드랑이 밑을 가리기 위해 허리띠, 혹은 요대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 평상복의 형태는 다른 지역과 별 차이가 없지만 실용성과 견고성, 편리함에 역점을 두어 옷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소녀들이나 부녀자들은 치마 대신에 검정물을 들인 ‘몸뻬’를 주로 입었고 남자들은 국민복을 입었다.

1940년대부터는 젊은 여자들이 발목이 보이는 검정색의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으며 1950년대에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양장이 서서히 대중화가 되어갔다. 특히 재일 교포들의 보내주는 의복은 제주 고유의 의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서양복이 보급되면서 내의와 양말 공장이 생겨났다. 이때 남자들은 빠르게 서양복을 받아들였지만 여자의 경우 서양옷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느렸다. 그러다 차츰 치마 위에 스웨터를 입거나 블라우스를 입는 등 양장과 한복을 혼용하여 입다가 서서히 양장으로 바뀌었다.

의복의 재료로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의생활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양장점에서 맞춰 입은 맞춤복이 유행하였고, 1980년대부터는 기성복과 맞춤복이 공존하다가 1990년대부터는 맞춤복이 거의 사라지고 기성복이 대중화되었다. 특히 바지와 스포츠웨어를 즐겨 입었다.

노동복의 경우, 밭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들에 나가서 가축을 돌보는 테우리(목동)들은 갈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정당벌립과 대패랭이를 썼다. 물질을 할 때는 1970년대까지는 물소중이와 물적삼, 물수건을 썼는데, 1960년대에 외부로 물질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물수건 대신 까부리라고 하는 모자를 보급시켰다.

까부리는 머리에서 목 뒷덜미 전체와 양 볼을 덮을 수 있는 모자 형태로 보온성도 뛰어나고 쉽게 벗겨지지도 않아 편리했다. 특히 양쪽 귀 높이에 구멍이 나 있어 물이 쉽게 빠져나오고 잘 들을 수 있도록 고안된 모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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