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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550
한자 尹元求
영어음역 Yun Wong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군수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대표관직 제주군수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군수를 역임한 문신.

[활동사항]

1905년 조선시대 마지막 제주목사 조종환(趙鍾桓)이 이임한 뒤 제주목사는 폐지되고 제주군수로 바뀌었다. 1906년(광무 10) 동래군수이던 윤원구가 초대 제주군수로 부임하였다. 윤원구가 제주군수로 부임하던 때는 일본에 의해 조선의 행정제도가 개편되고 있던 시기였다.

목(牧)·현(縣)제도의 면 행정, 즉 풍헌(風憲), 경민장(警民長) 등의 명칭이 면장·회계·면서기 등으로 개편되었으며, 군수가 보통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군수 윤원구는 제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을, 정의군수 장용견(張容堅)의신학교(義信學校)와 정의공립보통학교 교장을, 대정군수 김종하(金宗河)는 한일학교와 대정공립보통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였지만, 제주구 재판소에 일본인 판사 다가야[多賀谷熊雙]가 임명되었다. 1907년 제주우편국을 설치하여 일본인 가미하라[神原信一]가 파견되었으며, 관재서를 설치하여 통감부 관리가 장악하도록 하였다. 1908년(순종 2)에는 제주경찰서 서장에 일본인 시미즈[淸水重滿]를 임명하고 대정·정의·서귀포에 경찰관 분파소를 설치하였다.

제주도 내 여러 진(鎭)의 무기 및 군사 시설이 모두 소각되었고, 제주성 안에 주둔한 조선인 군대를 해산하고 일본의 헌병,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 공제당(共濟堂)에 있던 전패(殿牌)가 옮겨졌으며, 산천단(山泉壇) 등에서 시행하던 공식 제사가 중지되었다.

윤원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당하였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1908년 12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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