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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60
한자 金明植
영어음역 Kim Myeongsik
이칭/별칭 송산(松山),경덕(景德),솔뫼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성별
생년 1890년(고종 27)연표보기
몰년 1943년연표보기
본관 김해
대표경력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회장|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신생활』주필|신간회 제주지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 자는 경덕(景德), 호는 송산(松山) 또는 솔뫼. 아버지는 정의현감이었던 김문주(金汶株)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고향에 소재하고 있던 의흥학교(義興學校)에서 초등과정을 마쳤다. 1908년(순종 2)에 한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고, 1911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익희(申翼熙)[1892~1956]·안재홍(安在鴻)[1891~1965] 등이 중심이 되어 1912년 10월에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사부장을 지냈다.

1916년 4월 15일에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적국에서 배우려는 의미를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이후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4월에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였던 『학지광』을 편집하였고, 1918년에는 2·8독립선언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귀국하여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 창간에 참가하여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창간호에 「대세와 개조」라는 장문의 논설을 썼으며, 「니콜라이 레닌은 누구인가」를 연재해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1920년 4월 11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에 고순흠(高順欽)[1893~1977]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가하였으며, 1920년 12월에는 116개 청년단체들이 모여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박일병(朴一秉)[1893~?] 등을 중심으로 결성한 청년단체의 연합회인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1월에는 김사국(金思國)[1892~1926], 이영(李英)[1889~1960], 장덕수(張德秀)[1895~1947], 홍증식(洪增植)[1895~?] 등과 함께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서울청년회를 조직하고 뒤이어 동아일보사를 퇴사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22년 3월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였던『신생활』이 창간되면서 이사 겸 주필이 되었다. 일제는 1922년 11월 11일에 발간한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특집을 다룬 제11호와 11월 18일에 발간한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을 다룬 제12호를 문제 삼았다.

결국 박희도(朴熙道)[1889~1951] 사장과 노기정 인쇄인이 체포되고 인쇄기가 압수되었으며 김명식 주필과 유진희(兪鎭熙)[1893~?] 기자가 구류 처분되는 한편 신일용(辛日鎔)[1894~?] 기자가 기소되었다.

이 필화 사건은 조선 초유의 사회주의자 재판으로 알려지면서 한겨울인데도 방청객만 500~6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박희도는 징역 2년 6개월, 김명식은 2년, 신일용과 유진희는 각각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김명식은 재판과정에서 사장이 없는 동안에는 자신이 편집인 겸 발행인 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밝혔다. 함흥형무소에 복역 중 1923년 7월 26일에 건강상태가 악화돼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이후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제주지부가 결성되자 지회장을 맡았다. 이때 송종현(宋鍾炫)은 간사였고, 강창보(姜昌輔)[1902~1945]와 김택수(金澤銖)는 회원이었다.

1930년에는 오사카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돼 일본의 오사카형무소에 재수감된 뒤 『신생활』 필화 사건의 남은 형기 동안 복역하였다. 1938년쯤에 고향에 돌아왔고 일제의 고문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40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신문 기고로는 마지막으로 보이는 「제1차 대전 후의 세계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 연재물에서 “역사관의 허무사항은 금물이며, 인류문화는 쉬지 않고 향상한다. 어떤 시기에 어느 문명이 파멸되어도 다른 문명이 생겨 그를 대신한다.”며 인류문화의 연속성을 역설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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