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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279
한자 權震應
영어음역 Gwon Jineung
이칭/별칭 산수헌(山水軒),형숙(亨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진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배인
출신지 서울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775년(영조 51)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관직 자의

[정의]

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 증조부는 권상하(權尙夏)이며 아버지는 제주목사를 역임한 권정성(權定性)이다.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학문과 덕행이 높은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배웠다.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초선(抄選)에 뽑혀 자의(諮議)가 되었다. 1771년(영조 47)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유배되었다.

유배 중 강필발의 집에 머물며 그 집을 창주정사(滄洲精舍)라 명명하고 제주 유생들을 가르쳤다. 창주정사는 주자(朱子)의 ‘오도부창주지의야(吾道付滄洲之義也)’에서 따온 것인데, 주자가 자신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고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강학(講學)과 저술을 쉬지 않았던 것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였던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유배 중 머물렀던 가옥을 돌아보고 지방 유지와 유림에게 유허비를 세우도록 하고 유허비의 비문을 썼다. 권진응이 제안하여 세운 송시열 유허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五賢壇)에 남아 있다. 1772년(영조 48) 나이가 60살이 넘었다고 하여 특별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났고, 1775년(영조 51) 병으로 죽었다.

[저술 및 작품]

「해운정중수기(海雲亭重修記)」,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문(尤菴宋時烈謫廬遺墟碑文)」, 『열녀김씨전(烈女金氏傳)』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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