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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224
한자 冠婚喪祭
영어음역 Gwanhonsangj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현승환

[개설]

관혼상제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치는 과정에서의 통과 의례이다. 이는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이 주장한 것으로 세 가지 절차로 나뉜다. ‘분리-과정-가입’ 의례가 그것인데, 현재의 집단에서 새로운 집단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행해진다.

분리를 위한 의식 절차는 상례에서 가장 잘 발전되고, 통합을 위한 의식 절차는 혼례에서 가장 잘 발전된다. 또 과도적인 이행을 위한 의식 절차는 성년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반 게넵이 제시한 통과 의례는 출생 의례가 포함되나 유교식 가례법에 따른 관혼상제에는 없다. 더구나 제주도에서 관례는 없는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유교식 가례법이 보급되기 이전 제주도에서 어떤 예법이 시행되고 있었는지는 소상히 알 길이 없다. 유교식 가례법이 들어온 이후에도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떤 과정을 거쳐 민간에게 보편화되었는지도 소상히 밝힐 수가 없다. 제주도는 토속 신앙인 무속이 성행한 곳이므로 무속 행사가 가례법에 깊숙히 침투하고 있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혼례]

조선조에 제주에 들어온 관리자들의 눈에는 제주도의 혼례 풍습이 상당히 색다른 것으로 보인 것 같다. 숙종이형상(李衡祥) 제주목사는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지(地誌)에 말하기를 구혼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준비한다. 납채자도 또한 같다. 혼인한 날 저녁에 사위는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에게 배알한다. 만일 그 음식이 적으면 딸을 내놓지 않는다. 그래서 취한 후에 방에 드는데, 지금 역시 이 풍속이 있다. 또 동성이나 근족을 가림이 없고, 교배례를 행하는 일도 없다.”

숙종 때까지 동성혼이나 근족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믿어야 할 기록인지 의심이 없지 않지만, 어떻든 육지의 혼례 방식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고 보인다. 제주에서 행해지던 혼례 절차를 통해 제주 혼례의 특징을 살펴보자.

1. 청혼과 허혼

혼인 적령기가 되면 신랑집에서는 중매인을 놓아 신부가 될 사람의 부친에게 혼담을 놓는다. 허혼(許婚)의 의사가 있으면 신부가 될 사람의 부친은 신부의 사주 곧 생년월일시를 백지에 적어 남자 부친에게 넘겨준다. 남자 부친은 이것을 택일사에게 갖고 가서 궁합을 맞추어 납채, 납폐할 날짜를 택일한다.

2. 납채(막편지)

납채일이 되면 납채 예장(이를 막편지라 함)과 신부 옷감 한 벌을 예물로 싸들고 남자 부친이 여자 집으로 찾아가는데, 여기서 양가 대표들이 주연을 베풀고 서로 사돈이라 부르며 예우를 다한다. 당사자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어떤 의식도 없다. 맞선을 보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3. 이바지

결혼 3일 전은 ‘돗(돼지)잡는 날’이다. 돼지는 동네 하인들이 잡고 근친 남자와 여자들은 돼지고기를 삶거나 천막을 치고 전을 부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도운다. 대개 잔치 전일이나 우수일(偶數日)에는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잔치 날에 소용될 물품을 보내는데 이를 ‘이바지’라 한다.

4. 납폐(잔치)

잔치 날이 밝으면 신랑은 예장을 쓰고 무명 2필 정도를 홍세함에 넣어 신랑 부친이 날인을 하여 차린다. 이어 문전제를 지내고 문전제상 앞에 홍새함을 놓고 신랑 부친이 분향, 헌작, 잡식을 하여 끝낸다. 신랑이 왼발을 시작으로 집을 나서는데, 하님·신랑·상객·여자 상객·가마 순으로 따른다.

신부 집 동네에 일행이 도착하면 하인들은 ‘홍옹’하는 권마성을 길게 내어 신부 집에 이른다. 신부 집 역시 문전상 준비를 갖추었다가 상객이 들고 온 홍새함을 신부 근친이 소반에 받아 분향 후 보자기를 풀고 예장을 검토한 후 홍세함에 넣은 무명(폐백)의 실오라기를 조금 뽑아 술잔에 넣고 잡식한 술을 지붕 위에 올린다. 그때 중방(안내자)의 안내로 신랑과 상객들이 방으로 안내되어 접대를 받는다.

신랑상이 들어오면 하님은 신랑에게 술을 부어 석잔 권하고 밥그릇 뚜껑을 열어 밥을 세 숟갈 떠서 그 뚜껑에 놓아 밥상 밑에 놓는다. 상객 방에서는 이런 절차 없이 식사한다. 식사 후 신랑 측 상객들이 신부 측 친족들과 상방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돈열맹’을 한다.

하인들이 가마를 준비하여 집 난간에 들어다 걸쳐 놓으면 신랑 측 여자 상객과 하님의 안내로 신부가 나와 오른발부터 가마에 탄다. 가마 속에는 이불·방석·요강 등이 실려 있다. 신랑 집으로 솔부하는 행렬의 순서는 신랑 측 하님, 신부가 탄 가마, 신랑이 탄 말, 신랑측 상객, 신부측 상객 순으로 된다.

신랑집에 당도하여 가마를 방문 앞에 내려놓으면 신부가 하님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대반(보통 백모·숙모)이 앉았다가 마중한다. 신랑은 예복을 벗고 자유로이 행동한다. 신부 방에는 하님이 음식상을 독상으로 들고 와 대반 앞에 먼저 놓고 다음에 신부 앞에 놓는다. 하님이 신부의 밥뚜껑을 열고 신부에게 술을 석잔 권한다.

이어 신부의 밥을 세 숟가락 떠서 밥뚜껑에 넣고 밥상 밑에 놓으면 대반의 권유로 같이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면 신부는 예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어 상방으로 나오고, 서로 사돈열맹을 하여 술을 나눈다. 신부 댁 친족들이 돌아갈 때 대문 밖까지 나와 인사를 하는 데 여기서 비로소 신랑·신부가 얼굴을 보게 된다.

혼수는 가마 안에 넣을 정도였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많아졌다. 상객을 보내고 신부가 방에 들어와 앉으면 근친 부인들이 신부 방으로 들어가 자기 소개를 하고 신부에게 옷 한 벌 정도의 선물을 준다. 신부는 하루 종일 방에서 고팡(庫房)을 향해 앉아 있고, 저녁 식사는 동서, 시누이들과 함께 한다. 밤이 되면 신랑 친구들이 찾아와 밤늦게까지 놀고 가는데 신랑 다루기, 신방 엿보기 등은 없다.

이처럼 상객과 더불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솔부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고 있어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 등의 의식이 없다. 이런 의식을 상층 가문에서는 행했다고 전하기는 하나 일반 민간에서 행한 일은 없다.

5) 사돈잔치

결혼 다음 날 신랑·신부는 근친의 웃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신랑 부친과 함께 산부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 근래에는 이때 신랑의 자매가 돼지고기와 술을 지고 수행하기도 한다. 신랑 부친과 신부 부친은 근친 몇 명과 함께 사돈 사이에 인사를 나누고 음식 대접을 하는 데 이를 사돈잔치라 한다.

신랑·신부는 이날 신부 댁에서 잠을 자고, 신부는 신랑 댁에서 받은 선물 내역을 신부 모친에게 보고하고 이에 대한 답례품을 갖고 다음날 신부 아버지를 모시고 신랑 집으로 와서 신랑집 사돈잔치를 한다. 이날 신랑·신부는 신랑 집에서 자고 다음날부터 신부는 시어머니를 따라 부엌일을 도운다.

신부는 결혼식이 끝난 다음날부터 친정에 가고 싶으면 친정에서 며칠 살다 오기도 하는 데 이를 소위 ‘왔다 갔다 하는 기간’이라 한다. 반드시 신부가 시집에 와야 하는 날은 명절, 제사, 농번기 등의 시기이다. 이처럼 왔다 갔다 하는 기간은 첫 자식을 낳을 때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신부가 해산달이 가까워지면 친정에 가는데, 이이를 낳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아이를 데리고 시집으로 온다. 이때 비로소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하여 살림을 마련해 주어 딴 살림을 하도록 한다.

[혼례의 변화]

제주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부에서 급격하게 문물이 유입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조금씩 수용하던 외부 문물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게 되면서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그 양상을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중매혼이 점차 연애결혼으로 변화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혼인 연령이 점차 남 27세 이상, 여 24세 이상으로 만혼 경향으로 바뀌었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3~4년 더 늦어지고 있다. 이바지 제도도 완전히 없어졌다. 모관대·원삼·족두리 차림이 거의 없어져 양복과 드레스로 바뀌었다.

② 신부의 혼수품, 패물 등이 굉장히 많아지고 고가품으로 바꾸어졌다. ③ 신랑·신부, 상객 등 일행이 모두 차를 이용하고 있다. ④ 동네 하인이 없어지자 홍세함은 상객이 들고 가고 하님이 하는 심부름은 근친이나 이웃 사람이 대행하고 있다. ⑤ 결혼 당일에 신랑 일행이 신부 집에 가 솔부하고 오는 길에 곧바로 예식장에 들러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신식 의례를 지내고 신랑 집으로 온다.

⑥ 혼인 다음날의 사돈잔치가 거의 없어졌다. 혼인 날에 신랑 부친이 신랑 일행과 함께 신부 집에 가 사돈 간의 인사를 나누고, 신식 결혼식이 끝나 일행이 신부 집에 올 때 신부 부친이 같이 와 사돈 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행하고 있다. 근래에는 대형식당이나 호텔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흔하다.

[상례]

혼례와는 달리 상례와 제례는 성격상 그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부모를 여의는 것도 슬픈 일인데 조상들이 해 왔던 방식을 막무가내로 바꾸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혼의 존재를 믿고, 그 영혼이 고이 저승에 돌아가지 못했을 경우는 살아있는 후손에게 해꼬지를 한다고 하니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고는 시신에 대한 공포, 공경의 관념에서 생긴 것이다. 상례의 절차에서 제주도의 특성을 보이는 것들만 제시해 본다.

1. 부고

장사가 나면 근친자들이 원근 친족과 친지들에게 부고를 알린다. 부고는 어떤 서식으로 전하기보다 구두로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래에는 근친자가 날짜 보는 이(흔히 정시라고 하는 지관이 봄)에게 가서 장례 택일을 하고 상주들이 의논하여 장지까지 정한 후에 부고를 작성하여 신문에 내는 일이 많다.

2. 조관

이 날은 상가의 사돈집에서 팥죽을 부조로 쑤어 오는 것이 일반적 풍속이다. 이 날에는 이 죽으로 모든 사람이 식사를 대신한다. 관을 운반해 집 밖으로 나오면 집안에 있던 여인이 즉시 방안을 비로 쓸어 내치고 콩을 뿌려 문을 닫기도 하고, 사기 그릇을 밖으로 던져 깨기도 한다.

3. 운상

상여 앞 쪽에는 기다란 광목을 두 줄로 묶어 매어 있어 동네 부녀자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이 관목을 잡아끌며 전진해 나간다. 이 광목을 ‘설배’라 한다. 이 설배는 본래 험한 산길을 올라갈 때 상여를 끌어 올렸던 것이라는 전승이 있다.

4. 성분

마을에 따라서는 성분 후 묘의 울타리인 ‘산담’까지 쌓는 곳이 있지만 일이 여기까지 미치기 어려우므로 대개 봉분의 완성으로 일을 끝낸다. 이날 장지에서의 점심 식사는 예전에는 떡으로 했었다. 이 떡은 친척들이 해 온 떡이다. 이 부조의 떡을 ‘고적’이라 한다. 고적은 의무적이어서 부계 혈족의 8촌까지의 근친, 외종형제, 고종형제, 이종형제까지의 친척은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5. 대소상

음식은 술, 돼지고기, 떡, 밥이나 국수 등이다. 여자 조객은 영전에 배례하는 일이 없이 여상제를 만나 부조(돈이나 빵)를 넘기고서 여자 조객석에서 음식 대접을 받는다. 근래는 부조가 주로 돈이나 빵, 쌀 등으로 바뀌어졌지만, 30~40년 전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남자 조객은 ‘지촉(紙燭)’이라 해서 백지나 양촉을 가져와 영전에 올리고 엎드려 ‘어이어이’ 하고 잠시 곡을 하여 재배한 후, 상제와 배례를 나눌 때도 같은 방식으로의 곡을 하여 배례를 했다. 여자 조객은 떡을 가져오거나 메와 갱을 한 그릇씩 집에서 하여 들고 와서 부엌으로 들어와 영전의 제상에 올리고 방 한편에 서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잠시 곡을 하여 물러났다.

6. 함박제

장례법에 대한 구전으로 ‘함박제’라는 것이 있다. ‘함박’은 함지박의 방언이요, ‘제’는 제사다. 이 제사는 유교식 제사법으로 지방을 써 붙이는 일도 없고, 메나 기타 제물을 따로따로 차리는 일이 없이 큰 함지박에 메를 가득 떠 놓아 술을 부어 올리고 수저를 메에 꽂아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의 대상은 부모·조부모 등 여러 대의 조상으로, 그 조상의 수만큼 술을 부어 올리고 메에 수저만 꽂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함박제는 문자를 몰라 지방을 써 붙일 줄 모르는 집안에서 행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함지박 한 그릇에 메를 가득 떠 놓고 여러 신위에게 함께 제사 올리는 법은 제주 민간의 식사법과도 일치한다. 과거에 제주도 민간에서는 식구들이 밥을 따로따로 떠 놓아서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함지박에 하나 가득 떠 놓고 국만 따로따로 떠 놓아 식구들이 둘러 앉아 먹는 풍습이 있었다.

또 마을제에서 해신제를 지낼 때, 바다에서 익사한 무주고혼들을 위하는 제를 근래까지도 이런 식으로 한 일이 있다. 즉 큰 양푼에 메를 가득 떠 놓고, 제관이 술을 한 잔 부어 올리면 수저를 하나 꽂고, 다시 술을 부어 올리면 다시 수저를 꽂고 하는 식으로 양푼 주위에 뱅 돌아가며 술잔을 올려서 지내는 것이다.(구좌읍 동김녕리 사례) 이런 사실로 보아 함박제는 유교식 제례법이 보급되기 전에 있었던 민간의 제법이 아닌가 추정된다.

[상례의 변화]

혼례에 비해서 상례의 변화가 더디다 해도 제주의 상례도 전통시대와는 달리 현대에 이르러 대체로 간소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양상을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상복이 간소해졌다. ② 부고는 신문의 부고란을 많이 이용한다. ③ 상여가 차차 없어져 영구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④ 조객의 ‘어이어이’ 하는 곳이 완전히 없어졌다. ⑤ 우제를 장지에서 한꺼번에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맞추어 축문도 바뀌어졌다. ⑥ 공동묘지 이용 및 가족묘지 설치가 많아졌다. ⑦ 2000년대로 들면서 화장 문화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⑧ 장례식장이 만들어졌다.

[제례]

고인이 별세한 기일에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를 방언으로 ‘싯게’라 하며, 3일재계하여 4대 봉사하는 것이 원칙이다. 기일 전날 근친 부녀자들이 모여 제물을 준비하고 유교식 제례의 원칙을 따르는데 다만 모사(茅沙)가 다르다. 접시에 띠 끝부분 3개를 10㎝ 정도로 끊어 묶어 걸치고 그 위에 고사리채 세 개를 걸쳐 놓아 모사로 대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 감귤 이파리를 따다가 접시에 놓아 모사로 쓰는 곳도 있다.

제주 특유의 진설로는 문전제상이 있다. 이것은 작은 상에 선조 제상에 올릴 제물 각종을 올리는데, 상이 좁으므로 제물을 몇 접시에 종류별로 겸하여 올린다. 문전제상은 선조제상 옆에 놓아둔다.

자시가 되면 문전제상을 상방 전면 문쪽에 내어놓아 단헌단작으로 재배, 잡식한 후 이 상을 부엌으로 넘기면 주부가 잡식하여 조왕에 고사를 지낸다. 이것은 가신 중 문신과 조왕을 위한 토속적인 신앙이 제례에 습합된 것이다. 지방의 서식도 가문에 따라 다소 다르니, 배위의 본관을 밝히는 데도 있고, 신위의 표시를 양위의 중간 위치에 한 줄로 ‘신위’라 쓰는 데도 있다.

[참고문헌]
  • 현용준, 「예고(禮考)」(『제주유맥육백년사(濟州濡脈六百年史)』, 제주유맥육백년사편찬위원회, 1997)
이용자 의견
김** 冠은 왜소개가 안된겁니까?
  • 답변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오류 사항 수정이 아닌 경우 수정증보 시 일괄 처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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