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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157
한자 高性謙
영어음역 Go Seonggyeom
이칭/별칭 원위(元撝),능봉(菱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찬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
성별
생년 1856년(철종 7)연표보기
몰년 1899년(고종 36)연표보기
본관 제주(濟州)
대표관직 성균관 교수

[정의]

조선 말기 제주 출신으로 중앙 관리를 역임한 문신.

[개설]

고성겸은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것을 한으로 여겨 어머니와 상의하여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3년상을 치르니 모두 지극한 효자라 일컬었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극진하여 어머니가 70세로 노쇠해지자 성균관 교수를 사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제주. 자는 원위(元撝), 호는 능봉(菱峰)이다. 아버지는 고응식(高應植), 어머니는 홍일돈(洪一敦)의 딸이다. 둘째아들 죽암(竹岩) 고순흠(高順欽)[1893~1977]은 붓글씨로 유명하였고 노장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활동사항]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삼성사(三姓祠)가 철폐되자 고성겸은 “삼성사는 삼성의 시조이며 탐라를 개척한 삼신을 모신 사당이다. 이는 자손만이 한탄이 아니고 본도 주민이 애석해 하는 일”이라고 개탄하고 상소를 올렸다.

1896년(고종 33) 제주에서 실시된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재생(齋生)으로 선발되었고, 1897년(고종 34) 성균관 유생만 응시할 수 있는 문과 초시인 관시(館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지은 「황극론(皇極論)」(왕도 정치의 극찬을 논한 것)이 일곱 번째에 뽑혀 성균관 교수가 되었다.

이후 귤당(橘堂) 이기온(李基瑥)[1834~1886]이 오라동 연미마을에 칠봉서당(七峰書堂)을 개설하고 고성겸을 훈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제자의 실수로 서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제자를 구하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들어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고성겸조천읍 조천리의 소백(小柏) 안달삼(安達三)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이후 호남의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가르침을 받아 시례춘추(詩禮春秋)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원리를 탐구하여 이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한편, 성균관관장 서상봉(徐相鳳)은 고성겸의 바르고 옳은 의리와 아름다운 문장, 단아한 글씨를 높게 평가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로 『능봉집(菱峰集)』25권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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