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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138
한자 高麗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文敬公高兆基墓碑
영어음역 Goryeo Jungseosirang Pyeongjangsa Sangjuguk Mungyeonggong Go Jogi Myobi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of Go Jogi, Goryeo Minister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2464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묘비(墓碑)
건립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고조기(高兆基)
높이 233㎝
너비 80.5㎝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2464 지도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에 있는 고려 전기 고조기(高兆基)의 묘비.

[개설]

고조기는 고려 전기 인종, 의종 때의 인물이다.

[형태]

비신의 높이는 233㎝이고 너비는 80.5㎝이며 두께는 52㎝이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는 “高麗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 文敬公 高兆基 墓碑(고려중서시랑평장사상주국 문경공 고조기 묘비)”라고 적혀 있다. 비의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릇 길게 흐르는 냇물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솟는 샘이 있고 또 여기 꽃과 잎새 무성한 나무 등걸을 파 내려가면 깊은 뿌리가 있는 법이다. 사람도 이와 같아 조상은 자손을 낳아 기르고 자손들은 피의 근원을 찾아 조상을 섬기나니 이것이 어찌 저 강물의 샘과 나무의 뿌리에만 비길 것이랴. 남해의 파도를 넘어 구름 밖에 아득한 제주 땅에 발을 딛으면 탐라국을 처음 세우신 고을나왕(高乙那王)의 탄강지라.

전해오는 거룩한 유적지 삼성혈이 있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1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굉걸한 무덤이 있으니 이는 시조 고을나왕의 48대 손이요, 고씨의 조상이신 문경공(文敬公) 고조기(高兆基)의 묘소다.

그러나 자손들은 묘비의 갖추지 못함을 민망히 여겨 마침내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근원을 찾는 갸륵한 뜻에 감격하여 삼가 그 사적을 상고하니 시조의 15대 손 후왕(厚王)은 신라로부터 성주(星主)의 칭호를 받았다.

45대손 자견왕(自堅王)은 태자(太子) 말로(末老)를 고려에 보내어 태조(太祖)에게서 상과 작위를 받았으며 그 뒤에 이 땅이 고려와 합치게 되면서 시조왕(王) 이래 대대로 계승해 오던 왕위가 그로써 끝났다.

말로(末老)로부터 새로 헤아려 고씨의 중시조 일세를 삼고 그의 아들 유(維)가 처음으로 고려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까지 오르니 이가 바로 공(公)의 부친이라.

공은 실로 제 3세가 되는 분이다. 공의 첫 이름은 당유(唐愈)요. 고려 시대 1107년(예종 2)에 문과에 급제하여 남쪽 지방으로 나가 고을을 다스릴 적에 청백으로써 이름을 드러내었고 그로부터 계속하여 벼슬길에 있었다.

이때 공은 언제나 옛 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고 강개한 천성을 기르기 무릇 20여 년 1130년(인종 8)에 이르러서는 시어사(侍御史)가 되었으나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에 좌천되었다.

얼마 뒤 옛 자리로 왔으나 역시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공을 뽑아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올렸지만 실상인즉 대관의 직책을 뺏은 것이었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 1147년(의종 원년)에는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다음해에는 정당문학참지정사(政堂文學參知政事)를 거쳐 3년 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고 잠깐 한때 탄핵을 입어 강등되었다.

그러나 총신 김존중(金存中)의 힘으로 곧 다시 복귀되었으며 5년 후에는 중군병마판사겸서북면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에 임명되었더니 드디어 11년 후, 1157년 2월 3일에 세상을 여의었다.

그러자 왕은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관원을 보내어 호상케 하여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이라 하였다. 공은 특히 오언시에 능하여 「산장야우시(山莊夜雨詩)」와 「진도강정시(珍島江亭詩)」은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는 대표작이라.

실로 높은 경지를 주무르던 시인이었던 것이요, 부인은 국대부인(國大夫人) 김씨(金氏)니 상서효온(尙書孝溫)의 따님이며 정호(挺琥), 정익(挺益), 성명(誠明) 세 아들의 후손이 계계승승 국내외에 두루 퍼져 이제 50여만 명에 달했음을 본다.

어허, 느껍다. 미쁘다. 축복받은 가문이거니 겨레의 역사 위에 큰 공적을 쌓고 또 쌓을 것이다. 내 이제 붓을 바꾸어 노래를 바친다.

물 밖에, 하늘 밖에 아득한 한 점 땅에 신인의 혈통과 한라산 정기를 받아 큰 나무 굵은 가지에 저 님 한 분 맺히시니 그 열매 다시 심어 퍼지고 또 퍼지고 8백년 긴 세월에 십만(十萬) 그루 백만(百萬) 그루 곳곳이 그늘 드리워 덕을 입히옵소서.”

비의 왼쪽에는 문경공의 시 여섯 수가 새겨져 있는데 그 시는 아래와 같다.

山莊夜雨(산장야우)

昨夜松堂雨(작야송당우)

溪聲一枕西(계성일침서)

平明看庭樹(평명간정수)

宿鳥未離棲(숙조미이서)

산장의 밤 비

어제 밤 송당에 내린 비로

불은 계곡물 소리 들으며 잠들었어라

해 뜰 무렵 뜰의 나무를 대하니

깃든 새가 아직 떠나지를 않았네.

寄遠(기원)

錦子裁成寄玉關(금자재성기옥관)

勸君辰重好加飱(권군신중호가손)

封侯自是男兒事(봉후자시남아사)

不斬樓蘭未擬還(불참루난미의환)

멀리 부침

변방의 자식 옷을 지어 옥관에 보내면서

바라기는 아침엔 삼가하고 저녁은 많이 들기를

제후에 봉해지는 일들은 본래가 남아의 일이거니

오랑캐를 쳐 부시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

珍島江亭(진도강정)

行盡林中路(행진림중로)

時回浦口船(시회포구선)

水環千里地(수환천리지)

山礙一涯天(산애일애천)

白日孤槎客(백일고사객)

靑雲上界仙(청운상계선)

歸來多感物(귀래다감물)

醉墨灑江煙(취묵쇄강연)

진도 강가 정자에서

숲 속 길을 다 가도록

때로 포구의 배들을 돌아본다네

물은 천리되는 땅을 둘렀고

산은 한 결같이 하늘 끝을 막았네.

한 낮의 외로운 뱃사람이

푸른 구름 천상의 신선이 되었는네

돌아올 땐 풍물에 흥감한 것이 많아

취기와 한묵을 강 연기에 흩뿌린다네.

安城驛(안성역)

山雨留行客(산우류유객)

郵亭薄暮時(우정박모시)

春風無好惡(춘풍무호오)

物性有參差(물성유참차)

柳眼巳開嫩(류안이개눈)

花脣欲吐奇(화순욕토기)

如何雙鬢上(여하쌍빈상)

不改去年絲(불개거년사)

안성역에서

산속의 비가 나그네를 머물게 하니

저물녘의 우정이라

봄바람은 좋고 싫어하는 게 없건만

사물의 성정에는 차이가 있다네

버들개지 새싹은 트여 부드럽고

꽃잎은 기이한 망울을 터치려 하는데

양쪽 백발이 어떠하던가

작년에 센 머리털은 어쩔 수가 없다네

宿金壤驛(숙금양역)

鳥語霜林曉효(조어상림효)

風驚客榻眼(풍경객탑안)

簷殘半規目(첨잔반규목)

人在一涯天(인재일애천)

落葉埋歸路(락엽매귀로)

寒枝冒宿煙(한지모숙연)

江東行未盡(강동행미진)

秋盡水村邊(추진수촌변)

금양역에서 자다

새들이 지저귀니 서리 내린 숲이 밝아오고

바람에 놀란 나그네는 잠이 깨었네

처마 끝 절반이 둥글게 눈에 드니

사람이 하늘 끝에 있는 듯

낙엽은 돌아갈 길을 가리고

싸늘한 나뭇가지는 연기를 무릅쓰고 있네

강동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먼데

가을은 수촌 변에 다하였네

泳淸縣(영청현)

路橫層岫僻(로횡층수벽)

城倚半天孤(성의반천고)

碧洞長虛寂(벽동장허적)

行雲忽有無(행운홀유무)

古松能自籟(고송능자뢰)

春鳥巧相呼(춘조교상호)

物像馴吟賞(물상순음상)

留連倒酒壺(유연도주호)

영청현에서

길은 가로지고 산길 후미져 층층인데

성은 반공에 떠서 외로워라

벽동은 비어서 적막한지 오래인데

흐르는 구름 갑자기 생겼다 없어라

오래된 소나무 절로 소리를 내는 듯

봄이라 새들끼리 서로를 부르던가

물상을 익히며 읆고 감상하려니

연달아 묵으며 술병만 기울인다네

비의 오른편에는 “이은상(李殷相)은 삼가 글을 짓고 김기승(金基昇)은 글씨를 쓰다. 1968년 4월 문경공묘비건립위원회(文敬公墓碑建立委員會)라고 적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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