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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민란[1901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05
한자 濟州民亂-年-
영어음역 1901nyeon Jeju Millan
영어의미역 Jeju Uprising in 1901
이칭/별칭 이재수의 난,신축민란,신축교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한금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901년 4월 9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1년 10월 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대정군 인성리
관련인물/단체 이재수|오대현|강우백|채구석|강봉헌

[정의]

1901년(고종 5) 4월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秀)가 주도한 민란.

[역사적 배경]

천주교는 1886년 한불 수호 조약과 1896년 교민 조약 등을 통해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후 고종이 “신부를 나처럼 대하라”라고 선언함에 따라 특권 세력화되었다. 제주 지역에서도 1901년 인구의 2.5%가 천주교 신자가 되는 성장을 보이는데 이는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며, 죄를 지어도 성당에 들어가면 잡지 못하는 등의 특권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거 입교하였기 때문이었다.

양적 팽창에 주력한 천주교의 선교 활동은 곧 문제점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천주교 신부들은 천주교인들의 불법 행위를 보호해 주었으며 지방 행정까지 간섭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거나, 옥문을 부수고 옥에 갇힌 천주교인을 탈출시켰으며, 이미 매매한 토지를 다시 파는 등의 불법을 저질러도 면책을 받는 등 법적·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도들과 봉세관(封稅官)이 결탁하여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천주교인과 비천주교인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목적]

천주교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불거진 천주교인들의 폐단과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의 과도한 조세 수탈에 저항하려는 목적이었다.

[발단]

1901년 4월 9일 강우백(姜遇伯)을 중심으로 대정군민들은 소장을 올려 천주교도들과 봉세관의 폐단과 수탈의 시정을 호소하였고, 4월 12일에는 정의군에서도 이러한 호소가 있었다. 한편 대정 군수 채구석(蔡龜錫)과 향장 오대현(吳大鉉) 등은 천주교인들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대정군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였다.

4월 29일 천주교인들이 상무사원인 송희수를 구타하는 등 천주교인들과 상무사원들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천주교도 김병헌은 천주교인 50여 명을 데리고 와서 옥문을 부수어 천주교인을 빼내고 상무사원을 잡아감으로써 사건이 격화되었다. 상무사는 대정군 인접 지역에서 민회를 개최하여 천주교인들의 교폐와 봉세관의 세폐를 성토하고 제주읍성으로 가서 등소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소장에는 오대현과 강우백을 장두(狀頭)로 하였다.

[경과]

봉세관 강봉헌은 천주교도들의 도움으로 서울로 피신하였다. 봉기한 민란군은 제주 목사 김창수(金昌洙)에게서 조세 폐단과 교폐를 정부에 보고하여 혁파할 것을 약속받자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고 교인 1,000여 명을 소집, 제주목 무기고에서 총기를 꺼내어 무장하였다. 무장한 천주교인들은 농민들에게 발포하였고 오대현 등 여섯 명을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조세 수취 구조에 대한 반봉건적 운동은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정현에서는 동진과 서진 두 곳의 민군이 구성되었으며, 강우백이재수가 각각 대장을 맡아 조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3군에 통문하여 봉기를 촉구하였다. 5월 17일 제주읍성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민군 수만 명이 가세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의 선제공격으로 농민 18명이 살해되자 민란군 측은 일본인에게 총 50자루를 구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민란군이 무장함에 따라 프랑스 신부는 프랑스 군함의 급파를 요청하였고 시간을 벌기 위해 5월 23일 오대현 등 23명을 풀어 주며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5월 25일 제주읍성 내 백성들까지 민란군에 합세하여 봉기함에 따라 천주교도 측이 패배하였고 입성한 민란군은 천주교인 250여 명을 살해하였다.

5월 31일 프랑스 군함 두 척과 270여 명의 프랑스 해군이 입항하였다. 6월 2일 정부군 100여 명과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W. F. Sands가 급파되었고 일본 군함도 출동하였다. 정부는 프랑스 군함 철수를 주선하고 민란군에게 선 해산 후 민폐 혁파를 조건으로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동진대장 오대현과 제주 목사 정부군 대장 사이에는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봉세관이었던 강봉헌이 대정군수로 부임한 데 이어 6월 9일 다시 입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에 농민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 사이 민란군 지도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갈등이 노출되고 있었다. 온건파였던 오대현의 동진은 합법적 등소로 정부와 협상하고자 하였고, 강경파였던 이재수의 서진은 민폐 혁파와 천주교도 처단, 봉기민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군 대장 윤철규가 이재수와의 면담에서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며 제주읍성으로 입성하기를 요구하였다. 6월 11일 약속대로 민란군이 입성하였으나 정부군은 민란군 지도자 4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체포하고 민란군을 강제 해산시켰다.

[결과]

1901년 6월 17일 세폐 혁파에 관한 17조항이 관철되었고 7월 2일 12조의 교민화의 약정이 체결됨에 따라 교폐 문제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7월 18일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40여 명의 민란군 지도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영사재판으로 10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프랑스 정부에서 배상금을 요구함에 따라 제주도민에게 총 6,315원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이에 1904년 6월 제주도민 1인당 15전 6리씩 갹출하여 배상하였다. 더불어 프랑스 측의 요구로 황사평을 천주교도들의 묘지로 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 민란[1901년]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생긴 폐단과 봉세관의 과도한 조세 수탈에 항거한 사건으로 반봉건적 항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라는 외세의 횡포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적 항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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