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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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1901년 제주 민란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명부. 제주목에서 평리원 안종덕 검사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안종덕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이 평리원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제주 민란 당시 민군과 교회는 제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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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3월 3일 제주도에서 의병장 고승천과 이중심의 주도하에 전개하려던 항일 의병 운동. 의병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백성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일종의 민군(民軍)을 말한다. 의병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한말이라 할 수 있다. 한말의 의병은 1894년의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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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입동은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제주항 주변과 동문로터리 동북쪽, 사라봉 서쪽 일대를 가리킨다. 2000년 복원된 산지천을 서쪽 경계로, 사라봉을 동쪽 경계로 하고 북쪽에는 제주항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일도동이 있다. 건입동은 영주 십경 중 사봉 낙조(紗峯落照)와 산포조어(山浦釣魚)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을이다. 사봉 낙조는 곧 사라봉에 올라 저녁놀이 물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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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 본관은 제주. 자는 경지(景志), 호는 초광(樵㹰), 초명은 고구훈(高龜訓)이다. 일명 고승천(高承天)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고영길(高永吉)이다. 고사훈은 나이 30살에 이르러서야 한학에 열중하고 북학을 배워 이용후생을 실천하려 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육지에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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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장환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1919년 3월 1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조천 지역 유지인 김시범(金時範)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金時殷)·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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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때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559년(명종 14)에 경원부사를 지냈는데, 재임 중 청렴하다고 하여 명종으로부터 옷 한 벌을 받았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재임 중인 1565년(명종 20) 12월에 변협(邊協)[1528~1590]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으며, 1568년(선조 1) 6월에 대호군에 임명되어 떠나자 백성들이 명관이라고 칭하였다. 변협이 제주목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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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2동 887-1번지에서 일도 1동 1476-2번지에 이르는 도로. 관덕로는 서문 로터리를 기점으로 관덕정과 중앙 로터리를 지나 동문 재래시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687m의 일직선 도로이다. 관덕로는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 앞을 지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명칭이 부여되었다. 관덕로에서 동쪽으로 중앙 로터리를 거쳐 동문교까지 이어지는 관덕로는 칠성로와 함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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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오지그릇을 구웠던 가마터.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오짓물을 입혀 다시 구운 질그릇으로 검붉은 윤이 나며 단단하다. 노랑굴은 제주 지역 가마의 한 종류로 그릇 표면이 노란 갈색을 띠는 오지그릇이나 반오지그릇을 구웠던 가마를 가리킨다. 당시 남죽동 노랑굴에서 제작된 그릇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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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1,950m]은 남한 최고봉으로 백두산과 더불어 국토를 잇는 상징적인 산이다. 한라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백록을 탄 신선이 사는 영산이라 알려져 왔고, 불로초를 찾아 영주산을 찾았다는 서불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한 한라산의 여신 설문대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제주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영감의 보고이다. 또한 한라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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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미산 허은이 제주인 귤수 문백민을 그린 현존하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미산(米山) 허은(許溵)은 소치(小癡) 허련(許련)[1809~1892}의 첫째 아들이다. 찬(撰)을 지은 허련은 대정현에 유배 온 추사(秋史) 김정희를 만나기 위해 세 번을 제주에 들어왔다. 첫 번째 방문은 1841년(헌종 7) 추사가 유배 온 이듬해 2월이었고, 두 번째 방문은 18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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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행하는 자식(아들)을 얻기 위한 의례.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전통 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자식(아들)을 낳기 위한 치성 의례(致誠儀禮)와 속신 의례(俗信儀禮)로 나타나는 출산 의례이다. 기자 의례는 일정한 대상에 치성을 드리는 치성 의례와 유별난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먹음으로써 그 주술성에 의존하는 속신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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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때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선비.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사훈(高仕訓)[1871~1909]은 1908년 7월에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당시 제주군수였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 활동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석윤(金錫允)[1877~1949],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제주읍 이도리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황사평에서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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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7년 제주 광양서재 김병규 문하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을 사사하고 1891년에는 같은 광양서재에서 김설월에게 금강반야경을 마쳤다. 18세가 되던 1894년에는 전주 위봉사에서 박만하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1898년 해남 대흥사에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였고, 1902년 통영군 용화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1916년 범어사에서 이회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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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본관은 김해. 호는 농산(聾山). 아버지는 김봉호(金奉鎬)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제주에도 그 영향이 미쳐왔다. 제주 출신 김장환(金章煥)은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쫓기게 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조천으로 왔다. 조천 지역 유지 숙부 김시범(金時範)에게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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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생전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아관파천 등의 사건들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흥사단이 전개한 민족운동과 대동학회(大東學會)·기호학회(畿湖學會)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1852~1932]과 연서로 일본 정부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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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동에 있는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5년여 동안 적거했던 유허지.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운양 김윤식은 을미사변 뒤 1989년(광무 1) 제주도에 유배되어 1901년 5월 이재수의 난을 계기로 전라남도 지도로 이배될 때까지 제주에서만 5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속음청사(續陰晴史)』를 저술하고, ‘귤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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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본관은 김해. 항일운동가인 김시학(金時學)[1881~1949]의 장남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일어난 조천 3·1만세운동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학교의 전신)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천 출신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조천에서는 이미 김시범(金時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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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군수를 역임한 관인. 1901년 2월 17일에 제주군수로 임명되어 김희주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1901년 1월에 제주목사였던 이상규(李庠珪)가 불법으로 돈을 거둔 죄로 면직되어 있던 상태여서 제주목사 서리를 겸직했다. 같은 해 3월 유배와 있던 천주교도 이범주(李範疇) 구속 사건으로 1900년 6월에 제주 담당 신부로 와 있던 프랑스 신부 구마슬(具瑪瑟, Marc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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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발을 시조로 하고 김인충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나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왕자 김황(金湟)의 두 아들 중 장자인 김운발(金雲發)이 나주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나주를 본으로 삼았다. 제주입도조 김인충(金仁忠)은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14세손으로 고려 말에 무신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강화진 좌령랑장(左領郎將)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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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 1동 2651-6번지에서 제주시 삼도 2동 206-5번지에 이르는 도로. 남성로는 병문천과 한천을 양옆에 두고 뻗은 도로로 남문 사거리에서 제주 종합 경기장 교차로까지, 제주 종합 경기장을 지나는 길이1,650m의 왕복 4차선 도로이다. 남성로는 삼도 1동과 삼도 2동, 용담 1동을 지난다. 옛 지명인 남성 마을의 명칭을 반영하여 남성로라고 명칭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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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 2동에 속하는 법정동. 도남동을 돌로리라고 하는데, 다른 마을에는 호열자가 번져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으나 이 동네만 ‘빼놓고[돌라 놓고]’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한 제주성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길이 있었는데 이 길 주위의 마을에 ‘道’ 자를 넣어 마을 이름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즉 길의 남쪽이라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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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 1동·도두 2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동쪽으로부터 용두암-도두봉-이호 해변을 연결하는 해안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서 도로변에는 이국적인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입지하면서 해안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의미와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 섬의 북쪽, 즉 ‘섬의 머리’라는 뜻을 가진 ‘도두(島頭)’에서 유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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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불 입상. 동자복은 만수사 옛터인 민가 주택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성의 동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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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제주성 내 이도동에 제주도지사의 인가로 개교한 4년제 사립 초등학교. 제주 지역의 문맹 퇴치와 교육 보급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0년대 제주성 내에는 제주 보통학교라는 한 곳의 초등 교육 기관만이 있었는데 제주 보통학교 한 곳으로는 제주 지역의 취학 아동을 온전히 수용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따라 제주 지역 내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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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7년(원종 8) 문행노(文幸奴)가 제주 동북부 지역에서 사람들을 규합해 일으킨 민란. 무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통적으로 문관을 임명하던 외관직에 하급 무관까지 논공행상의 차원에서 대거 등용되었는데, 외관직에 임명된 하급 무관들은 이전 외관들보다 더욱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대규모 민란이 들끓게 되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반정부 봉기와 갈등의 직접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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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발생한 12세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제주 민중의 항거.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난 시기는 탐라가 고려에 병합되던 12세기부터이다. 이때의 민란은 탐라령의 횡포나 고려의 압정에 저항하면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 정벌 직후 원은 제주도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았는데, 외세의 지배 하에서 탐관 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고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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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일어난 제주민란의 주도자. 본관은 남양. 자는 성칠(聲七), 호는 능헌(菱軒). 본명은 방진두(房鎭斗)이며 일명 방갑(房甲)이라도도 한다. 아버지는 방상규(房祥圭)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다. 1898년(고종 35) 방성칠은 강벽곡(姜辟穀)·정세마(鄭洗馬) 등과 함께 남학당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전라도로부터 제주에 들어와서 능화동(현재 제주특별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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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 제주 지역에 축조한 유적. 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한 목적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데 있었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왜구는 고려 말부터 제주에 자주 침입하여 방화·약탈 및 인명 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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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수원(水源)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다. 아버지는 동금(同禁) 백희수(白希洙)이고, 어머니는 윤민동(尹敏東)의 딸이다. 1877년(고종 14) 1월 이희충(李熙忠)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881년(고종 18) 5월까지 임기를 훨씬 넘겨 4여 년이나 재임하였다. 부임하던 해 가을에 메뚜기 떼로 농사에 큰 피해가 발생하여 주민이 굶주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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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제주목사 백낙연(白樂淵)을 기리는 비. 백낙연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77년(고종 14) 정월에 부임하고, 1881년(고종 18) 5월에 교체되었다. 흉년이 들자 조정에 요청하여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동쪽과 남쪽의 두 성문 앞의 큰 길을 수리하였다. 백낙연이 부임하던 1877년에 제주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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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51년(철종 2) 7월 이현공(李玄功)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귤림서원을 개건하였으며, 1851년 가을 별저미(別儲米)를 운반해 줄 것과 내탕전 1천 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전년의 흉년을 진휼하였다. 1852년(철종 3) 유생 강기석(姜琦奭)의 건의에 따라 제주성 남수구 북쪽 김정(金淨)의 적거지에 김충암적려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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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주택가 내와 제주시 용담동 용화사 내에 세워져 있는 두 기의 석불 입상. 이 두 기의 석불은 사람의 수명과 행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되는 한 쌍의 복신미륵으로, 동자복과 서자복을 말한다. 구전으로는 ‘자복신(재물과 복의 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고, 옛 제주성 바깥 동쪽과 서쪽에 두 미륵이 성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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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마을. 지형이 달과 비슷한 형국 또는 달이 뜨는 모습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과 또는 달이 뜨는 모습이 잘 보일 만큼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주향교 북쪽에 동~서로 난 옛날의 구 한질을 이르는 동네로서 제주성의 서문 밖에 부러릿질 서쪽 길가와 개물동산 남쪽의 비석거리를 말한다. 또는, 동북쪽 방향의 골목길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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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용화사 내에 있는 석불 입상. 서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해륜사지 옛터에 보존되어 있는 미륵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성의 서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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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591년(선조 24) 갑산부사로 부임하였고,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李瑛)[?~1593]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함흥을 점령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황초령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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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 호는 귤헌(橘軒). 제주목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당대의 부호이다. 1892년(고종 29) 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떠났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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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때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을 지낸 군인.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를 제1기로 수료하고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광복 후 창군 당시 제5연대의 소대장과 중대장을 거쳐 제8연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이 되었다. 연대장 재임 중인 1948년 10월 17일 “제주성의 해안에서 5㎞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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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제주성(濟州城) 소속의 봉수. 수산봉수는 북동쪽의 도원봉수(직선 거리 8.7㎞)와 남서쪽의 고내봉수(직선 거리 4.3㎞)와 교신을 하였으며, 조부연대와 남두연대에 서로 교신하였다. 소속 별장 6명, 봉군 24명을 배치하였다. 수산봉수는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해안가에서 남동쪽으로 약 1.2㎞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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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어사 심동신의 선정비. 심동신이 1859년(철종 10) 11월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제주목사 정우현(鄭愚鉉)을 뇌물죄로 파직시키고, 1860년(철종 11) 도민의 시전(柴錢) 4백 냥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제주성의 효자 김광숙(金光淑), 오라리의 양일복(梁日福)의 처 열녀 김씨, 매촌(梅村)의 변지환(邊之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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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80년(선조 13) 2월 전라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584년(선조 17) 3월 보성군수에 임명되었다. 1587년(선조 20)과 1588년(선조 21)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 녹둔도를 두고 벌어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588년 2차 녹둔도 전투에서 온성부사 양대수는 회령부사 변언수(邊彦琇),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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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옛 일본 해적.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인 해적을 총칭한다. 흔히 고려 후기까지의 왜구를 전기 왜구, 그 이후의 왜구를 후기 왜구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기 왜구가 우리나라를 주요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면, 후기 왜구는 약탈의 대상지가 중국과 동남아 지역으로 확대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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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용연 일대 해륜사(海輪寺) 터에 있는 사찰. 제주시 용담동 용연 인근에는 속칭 절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13세기 경 창건된 고려시대 사찰 해륜사가 있었다. 해륜사는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 1702년(숙종 28) 제주절제사로 부임했던 이형상 제주목사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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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송시열의 제주 유배 때의 행적을 기리는 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1689년 3월 제주로 유배를 왔다가 달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불려 가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제주에 있으면서 『문의통고(問義通攷)』를 저술하고, 손자를 비롯하여 제주 유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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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에 있는 포구. 우지포는 지금의 한림읍 수원리의 외딴 자연마을인 용운동 해변에 있는 안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우지(牛池)라는 지형지물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잠수촌과 귀덕촌 사이에 우지포가 있다고 가록하고 있다.『탐라지』에서는 제주목 안에 있던 일곱 개의 우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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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13세기 후반 원나라가 제주도를 지배할 때 설치했던 관아 터. 몽골족의 나라 원(元)은 1273년(원종 14) 제주도에 들어와 있었던 고려의 마지막 항몽 세력인 삼별초(三別抄)를 고려와 연합해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 지역을 직할령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설치했는데, 그 터가 제주시 북쪽 해안가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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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군수를 역임한 문신. 1905년 조선시대 마지막 제주목사 조종환(趙鍾桓)이 이임한 뒤 제주목사는 폐지되고 제주군수로 바뀌었다. 1906년(광무 10) 동래군수이던 윤원구가 초대 제주군수로 부임하였다. 윤원구가 제주군수로 부임하던 때는 일본에 의해 조선의 행정제도가 개편되고 있던 시기였다. 목(牧)·현(縣)제도의 면 행정, 즉 풍헌(風憲), 경민장(警民長) 등의 명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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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 왜구가 제주도 화북포 일대에 침입한 사건. 을묘왜변은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는데, 1555년(명종 10) 왜구 선박 70여 척이 1차로 전라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2차로 제주도를 휩쓸며 약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다. 즉,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난 이래 조선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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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1883년(고종 20) 선공감감역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8년(고종 25) 진해현감, 1889년(고종 26) 내금위장을 거쳐 1896년(고종 33) 평리원(平理院)이 개편된 뒤 고등재판소 검사, 법부 형사국장을 역임하였다. 1896년 지방 제도가 23부제로 개편된 뒤 제2대 제주부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96년 제주민란으로 면직된 오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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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주.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지완(李志完)[1575~1617]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 등을 거쳐 1647년(인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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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裕). 아버지는 이돈형(李惇亨)이다.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4년(현종 15) 5월 전라북도 용안현감에 부임하여 1675년(숙종 1) 12월 사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이기하(李基夏)[1646~1718]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96년(숙종 22) 9월에 물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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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민란(일명 이재수의 난, 신축민란, 제주교난)의 주모자. 본관은 고부(高阜). 아버지는 이시준(李時俊)이며 어머니는 송씨이다. 본래 대정군의 관노였으나 갑오개혁 이후 노비제가 폐지되자 관아의 급사이면서 향청의 우두머리인 오대현(吳大鉉)의 하예(下隸)가 되었다. 칼과 활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 1901년 5월 봉세관(封稅官)의 과중한 세금과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작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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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 간의 충돌 사건을 다룬 영화. 1999년 상영된 「이재수의 난」은 최초로 한국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한국의 기획시대와 프랑스의 롭세르바토와르가 공동으로 제작하였고, 박광수 감독이 연출했다. 상영 시간 100분으로, 주인공은 이정재·심은하가 맡았다. 이 영화의 원작은 현기영(玄基榮)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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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901년(고종 38) 4월 이상규(李庠珪)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902년(고종 39) 6월까지 재임하였다. 주사 최창순(崔昌淳)과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1850~1920]으로부터 유림 오대현(吳大鉉)과 관노 출신인 이재수(李在守) 등이 제주성을 점거하고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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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 의병의 의병장. 1909년(순종 3) 2월 25일 이중심을 비롯한 고사훈·김석명·노상옥·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한영근(韓永根)·김만석(金萬石) 등이 조병생의 집에서 회합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사훈·이중심을 추대하였다.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3일로 정하고 대정군부터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제주도민들에게 격문과 통문을 돌렸다. 고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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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제주의 근대 불교를 중흥시킨 승려. 1876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학림암 보하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불교계의 교단을 이끌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제주불교협회를 창설하였고 근대 제주 불교를 중흥시켰다. 1902년 원흥사의 서무로 활동했고, 1907년에는 불교연구회의 내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49세에는 대본산 영명사 주지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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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희명(希明). 아버지는 임현모(任賢模)이다. 1851년(철종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62년(철종 13) 2월에 신종익(申從翼)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임헌대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1862년(철종 13) 4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이 삼남 지방으로 확산되어 제주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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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정의군수를 역임한 관리이자 항일운동가. 본관은 인동. 자는 익중(翊中), 호는 정산(庭山). 장규열(張奎烈)이라는 이름도 썼다. 아버지는 장현호(張炫昊)이다. 김윤식(金允植)이 1896년 아관파천 후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27세의 장용견과 교유하고 평하기를, “의(義)를 좋아하며 항상 귀양살이 하는 사람을 챙겼고 시회(詩會)에도 참가하였으며 어렵고 험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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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연일. 자는 봉수(鳳叟). 아버지는 정태락(鄭台樂)이다. 1863년(철종 14) 1월 임헌대(任憲大)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그가 제주에 부임하였을 때 강제검(姜悌儉) 등이 주도하는 민란군이 제주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임 제주목사가 부임하자 강제검은 180명이 연서한 교폐절목(矯弊節目)을 제시하면서 시행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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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에 제주도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벌인 항일 운동. 제주 3·1 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조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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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순조 13)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일으킨 민란. 1813년(순조 13) 제주도 백성들에게 부과된 부역이 너무 과중해지자 양제해가 김익강·고덕호·강필방 등과 함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사람을 모으고 병기를 만들어 제주성과 정의·대정에서 거병하기로 뜻을 모았다. 양제해는 제주 영읍의 네 관원을 죽이고, 섬 전체를 장악한 후 배가 육지로 못 나가도록 한 뒤, 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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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일제 강점기에 개설되었던 중등 학술 강습소. 제주 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중등 과정의 교육을 가르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5년 12월 변호사였던 양홍기(梁洪基)는 사립 중학교를 개설할 목적으로 제주성 내 사립 명신 학교 자리에 제주 중학 강습원을 개설하였다. 1936년 4월 남학생 70명을 모집하여 본격적으로 강습원을 운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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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부터 1917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시행한 대규모의 국토 조사 사업. 제주도에서의 토지 조사 사업은 1913년부터 2년 동안에 걸쳐 토지 소유주로부터 신고를 받아 처리하고 불복 신고(不服申告)를 받아 재결(裁決) 결과를 처리하였으며 1917년 일제의 강권으로 완료되었다. 제주 지역에서는 세부 측량(細部測量)이란 명칭으로 통용하여 왔다. 일제는 우리나라 전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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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에 있었던 제주 지역 최초의 여객 자동차 회사. 제주 지역에 최초로 교통수단인 여객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1925년 2월이었으며, 이후 제주 동부 자동차 회사와 제주 통운 주식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제주 동부 자동차 회사는 제주-성산포 간을 운행하였고 제주 통운 주식회사는 제주-모슬포와 한림 간을 운행한 데서 비롯되어 제주 동부 자동차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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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삼국시대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으로 축성된 성터. 제주성은 삼국 시대 탐라국 수부의 성곽으로 축성되었으나 원래의 규모와 축성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읍석성(邑石城)의 둘레는 910보”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4,394척이고 높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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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의 북부 지역을 포괄하는 행정 구역.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실시로 이전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통합되어 제주도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주(濟州)라는 명칭은 1223년(고종 10)경에 탐라군(郡)이 행정단위 개편으로 제주로 불려진 데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먼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제주시는 탐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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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르방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이다. 제주도를 방문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돌하르방과 마주친다. 오랜 세월 제주를 지켜온 돌하르방은 제주 방문을 환영하고 보호해 주는 듯, 위엄 있는가 하면 둥글넓적한 온후한 인상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마치 모진 환경에서 한평생을 보낸 우리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처럼 무뚝뚝하고 엄한 표정엔 미소마저 담뿍 담겨 있어 보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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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관립 학교.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제주민을 교화·교육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았고, 교수관 1명이 정원 7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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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제주의 역사. . 조선 시대 제주는 독립성을 상실한 채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제주는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중앙 정부에 의해 과중한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특히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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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장기 산업 자금의 조달 및 공급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금융 기관. 총독부령에 의해 1918년 10월 1일 ‘조선 식산 은행’의 설립으로 인해 광주 농공 은행이 같은 날짜로 해산함에 따라 광주 농공 은행 제주도 지점이 명칭을 변경하여 조선 식산 은행 제주 지점이 개설됐다. 8·15해방 이후 한국 식산 은행으로 바뀌어 한국 전쟁 때까지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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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판관을 지낸 문신. 본관은 평양. 자는 유보(裕甫), 호는 일락(一樂). 아버지는 조경운(趙慶雲)이며 어머니는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형은 공조참판 조인득(趙仁得)이다.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 8) 1월에 전라도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575년 8월에 체직되었다. 1577년(선조 10) 5월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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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양주. 자는 성경(成卿)·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趙榮順)이며,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부인은 홍지해(洪趾海)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별검(別檢)이 되었다. 1777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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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세계, 또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일체의 활동. 교리가 경전으로 출판되고, 의례 체계가 표준화되며, 종교 지도자의 재생산 구조와 지도자와 일반 신도의 결합 구조가 공식 조직(formal organization)의 형태를 띠게 될 때, 보통 ‘종교’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부를 때는 바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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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시대 종루 터. 종루는 진해루(鎭海樓)·포정사(布政司)·종각(鐘閣)이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제주목의 관아를 둘러서 쌓은 제주성 안에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제주성 문을 열고 닫을 때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리던 곳이다. 조선조 세종 때 불에 타서 없어지자 새로 새워서 진해루라 이름하였고, 1699년(숙종 25) 제주목사 남지훈이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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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조선 시대 북수구의 누정. 임진왜란 후인 1599년(성종 32) 제주목사 성윤문이 제주성을 개축할 때, 남수구와 북수구에 무지개다리(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를 건립하여 남수각과 북수각으로 불렀다고 한다.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에 죽서루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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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순녀(順汝). 아버지는 포도대장 채학승(蔡學承)이다.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기용되어 내외 관직을 거쳤다. 1855년(철종 6) 8월 목인배(睦仁培)[1794~?]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856년(철종 7) 봄에 귤림서원(橘林書院) 모현암(慕賢岩) 편액을 썼고, 제주성 동성문(東城門)에 있는 연상루(延祥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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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북수구성 위에 있던 조선 시대 누정. 천일정은 1847년(헌종 13) 제주목사 이의식이 북수구성을 성 밖으로 늘여 쌓고 그 위에 세운 누정이다. 비바람으로 무너졌다. 사라진 북성의 자취와 함께 천일정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제주성 주변에 있던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제주성의 옛 모습을 복원한다면 역사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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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던 조선 시대 누각. 청풍대는 제주성 남문 안 서쪽에 있던 누각이다. 언제 창건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주목사 심연원이 1536년(중종 31) 명륜당을 개축한 뒤 남긴「명륜당중수서(明倫堂重修序)」에 청풍대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 초에 제주목사 김영수가 노장대(老將臺)라고 명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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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초명은 최기남(崔奇男)이다. 아버지는 최대(崔岱)이며,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년) 유학(幼學)으로 도기과(到記科: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식년 문과 초시)에 강(講)이 뛰어나 문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어 그 해 정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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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이전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 토석단(土石壇)의 터 칠성단(七星壇) 월대(月臺)는 삼도리(三徒里) 지역이 제주성 내에 자리 잡은 5~7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러 세워졌다고 한다. 칠성단 월대 터는 전설에 의하면, 고(高)·양(良)·부(夫) 등의 삼성(三姓) 시조가 일도·이도·삼도라 일컫는 세 개 지역의 땅을 나누어 차지할 때 북두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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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숙종 때 제작된 제주도 지도와 그 서문. 1709년(숙종 35)에 제주목사 이규성(李奎成)이 제작한 지도 1과 병서 2로 이루어진 지도로, 세로 125㎝, 가로 98㎝의 크기이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제주 지도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1년 6월 4일 제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도의 서문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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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예의판서 한리(韓理)이다. 아들은 한서룡(韓瑞龍)·한서봉(韓瑞鳳)·한서구(韓瑞龜) 등 3명이다. 1437년(세종 19) 2월 최해산(崔海山)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하기 전, 의정부에서 제주 방어는 중요하므로 봉화·척후(斥候)를 엄하게 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왜선이 정박할 요해처를 잘 방어하라고 지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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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로 유배된 조정철을 변호하다 죽은 여인. 본관은 남양.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향리를 지낸 홍처훈(洪處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777년(정조 1) 9월 11일 노론 벽파에 속하였던 조정철(趙貞喆)이 제주로 유배되어 제주성 안에 있던 신호(申好)의 집에 귀양지를 마련하였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귀양지를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고, 1781년(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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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정의현감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홍범철(洪範喆)이며, 제주목 신촌에서 태어났다. 이우식(李友植)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부임하였다. 1898년(고종 35) 1월 방성칠(房星七)[1849~1898]이 화전세(火田稅)·장세(場稅)·호포(戶布)의 과다 징수와 환곡의 임의 징수 등의 폐단을 바로잡겠다고 1898년 제주민란(일명 무술 민요)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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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남양. 자는 성소(聲簫), 호는 우정(羽亭). 아버지는 도사(都使)를 역임한 홍재원(洪在源)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공부한 후 1890년(고종 27)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3년(고종 30) 7월 파리를 떠나 귀국하던 길에 도쿄에 머물면서 이일직(李逸稙)을 만나 김옥균(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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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31년(영조 7) 개천군수를 지냈으며, 1738년(영조 14) 부령부사 재임 중 정사를 잘 돌보아 영조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전라우수사 재임 중인 1754년(영조 30) 10월 김몽규(金夢煃)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56년(영조 32) 9월에 떠났다. 1755년(영조 31) 제주에 보리 흉년이 들어 가을에 기근이 있자 조정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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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조천진에 축조한 성곽. 화북포는 조선 시대 제주 지역의 대표적인 수전소로 방어의 요새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화북포에는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또한 비상 양곡이 6석, 격군이 180명, 사포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