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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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형상이 쓴 제주의 인문지리지.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조선 후기 숙종, 정조 때의 문신이자 국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남환박물(南宦博物)』은 1702년 3월부터 1703년 6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한 뒤에 1704년 경상북도 영천의 호연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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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집필한 문집. 이형상이 살던 숙종조는 사회적인 혼란과 사상적 갈등이 심하였다. 나라 경제는 파탄 지경에 빠졌으나 당쟁은 어느 때보다 심하였고, 학문적으로는 실학과 서학이 대두하였다. 이런 와중에 이형상의 학문 세계는 그보다 앞 시대의 인물이었던 유형원이나 후대 인물인 정약용에 비해 뒤질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형상의 문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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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에서 기계 장치 없이 나잠업으로 미역·천초 등의 해초와 소라·전복·해삼·문어 등을 캐면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해녀라고 한다. 아직도 제주도 전역에 5,000명이나 되는 해녀가 특이한 나잠수 작업으로 생업을 영위하고 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바다에서의 물질 작업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한다고 표현할 만큼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을 해내는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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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지역에 있는 바닷가에서부터 수심 20~40m까지 암반, 돌무더기, 모래가 깔려 있는 곳. 제주도 생성 시기에 용암이 흘러내리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지 않고 바다 속 깊은 곳까지 흘러들었는데, 용암의 줄기는 바닷가에서부터 바다 속으로 멀게는 2㎞까지 흘러간 곳도 있다. 이렇게 제주도의 바다에는 조간대와 갯벌바다 사이에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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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밭은 제주도 해안의 암반이나 모래밭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던 장소로, 염전에 해당된다. 제주도는 강우일이 많아 소금 생산이 불리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소금이 몹시 귀하여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말·말총·귤·해산물 등을 육지부의 소금과 교환하여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제주에서는 여러 소금밭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소금 생산에 불리한 지형적 조건으로 모래를 이용하거나 암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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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사찰 터.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곽지사에 대하여 ‘재주서사십오리금폐(在州西四十五里今廢)’라고 하여 “주의 서쪽 4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곽지사는 이원진이 『탐라지』를 기록할 당시인 1650년(효종 1)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국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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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와 금성리에 있는 포구. 곽지포는 지금의 애월읍 곽지리와 금성리에 있는 정짓내 하류에 있는 개맛을 두고 이른 말로, 곽지포는 그 당시「제주삼현도」에 있는 곽지촌(郭支村) 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곽지포를 두고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과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서는 곽지포(郭支浦),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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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1만 8천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새철 드는 날’(입춘날)에 제주목 관아에서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리들과 무당들이 같이 행하던 굿놀이판이 있었다. 이를 현대에 재현하여 탐라국입춘굿놀이라는 민속놀이 축제를 만들었다. 제주시가 주최하는 관민 합동의 도시 축제로 전승·발전·확대시켜나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축제이다. 탐라국입춘굿놀이는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제주 사람들의 넉넉하고 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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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치는 과정에서의 통과 의례이다. 이는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이 주장한 것으로 세 가지 절차로 나뉜다. ‘분리-과정-가입’ 의례가 그것인데, 현재의 집단에서 새로운 집단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행해진다. 분리를 위한 의식 절차는 상례에서 가장 잘 발전되고, 통합을 위한 의식 절차는 혼례에서 가장 잘 발전된다. 또 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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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인조 15) 조선 15대 국왕인 광해군이 폐위되어 제주로 유배된 사건. 1575년(선조 8)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제15대 국왕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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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흔히 방(房)이라고 부르는 생활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돌 설비가 없는 상방과 구별되는 공간. 수면, 휴식, 학습 등 사적 공간으로 온돌 설비가 된 곳을 구들이라 부른다. 바닥은 유지 바름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구들의 크기는 2.0~2.2m이며 높이는 1.9~2.0m로 낮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고팡(곡식을 보관하는 공간)에 접한 구들을 큰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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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1,950m]은 남한 최고봉으로 백두산과 더불어 국토를 잇는 상징적인 산이다. 한라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백록을 탄 신선이 사는 영산이라 알려져 왔고, 불로초를 찾아 영주산을 찾았다는 서불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한 한라산의 여신 설문대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제주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영감의 보고이다. 또한 한라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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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노끈이나 실, 쇠줄 따위로 여러 코의 구멍이 나게 얽어 날짐승이나 물고기 따위를 잡는 데 쓰는 물건. 제주도의 어로 기술은 낚시와 그물로 대별된다. 어로 기술은 일정할 수 없다. 어로 문화 집단인 어촌 마을마다 그들이 처한 환경에 순응하면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남환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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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화공.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이형상(李衡祥)[1653~1753]이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해에 제주의 각 고을을 순력하는 행사 장면을 그린 도첩이다. 이 도첩은 300여 년 전 제주의 풍물·문화, 방어 시설, 진상품, 지형, 건물 배치 등을 파악할 수 있게 그려진 실용적 목적의 기록화이다. 김남길은 제주목 소속의 지방 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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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리의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일상생활의 규범과 예절로서 내려오고 있다. 가까운 집안끼리는 물론이요 이웃이나 향인 중에 관혼상제나 기타 큰일이 닥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여 위문과 경축을 주고 받으며 서로 협조하였다. 제주도에서도 유교적인 특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어서 납읍리에서 매년 거행되는 마을 포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납읍마을에는 일상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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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 간 걸쳐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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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인간이나 차가 다니는 비교적 넓고 큰 길. 해방 후 제주의 교통은 1961년 5·16군사쿠테타 정부가 수립된 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의 미개발된 천연 자원과 민속 등을 자원으로 하여 관광 개발을 정부시책으로 추진하면서부터 사회 간접 자본의 건설로서 시작되었다. 그 뒤 정부는 1973년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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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고려 시대 돈수암의 옛 터. 돈수암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재주동팔십리(在州東八十里)’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증보탐라지』에도 “제주읍동삼십이리허(濟州邑東三十二里許)에 재(在)하니 금폐(今廢)”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그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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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 만수사지는 일명 동자복사라고도 한다. 만수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동자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18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일명동자복재건입포동안(一名東資福在巾入浦東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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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의 제주목 관아 안에 있던 조선 시대 누각. 망경루는 조선 시대에 지방의 20개 목(牧) 가운데 ‘제주목’에만 유일하게 존재했던 2층 누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망경루는 특히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하였다. 망경루는 15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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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바닷고기를 잡을 때 그물을 사용하는 기술. 1653년(효종 4)에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제주도의 산과 바다는 험악하여 그물을 쓸 수 없다. 고기는 낚고, 들짐승은 쏘아 잡는다”라고 말했다. 이형상도 1702년(숙종 28)에 쓴『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제주도는 그물이 없는 섬이라고 했으나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리 그물·상어 그물·머르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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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잠수(潛嫂)들이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할 때 입는 노동복. 명칭은 ‘수옷’·‘녀옷’·‘물옷’·‘물소중이’·‘해녀옷’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물소중이’란 ‘물[水]+소[小]+중이[袴衣]’의 복합어이다. ‘물’은 장소, ‘소’와 ‘중의’는 만듬새와 모양을 뜻한다. 즉, ‘물 속에서 입는 작은 홑옷’이 된다. 모양은 어깨에 걸개(끈)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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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인간의 미적 활동에 의해 표현된 조형 예술. 미술은 인간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분야이다. 미술의 풍부한 표현은 넓게는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대체로 쾌(快)와 불쾌(不快)의 감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에 대해 ‘곱다’, ‘아름답다’라는 감정이 들었다면 그 작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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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 제주 지역에 축조한 유적. 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한 목적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데 있었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왜구는 고려 말부터 제주에 자주 침입하여 방화·약탈 및 인명 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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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지역의 관에서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전하던 군사통신 조직. 봉수는 말 그대로 밤에는 봉(烽:횃불), 낮에는 수(燧:연기)로 급보를 전하던 통신 방법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이다. 그러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의사를 전달하던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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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분포되어 있는 불교에 관련된 유적지. 제주도의 불교 유적지는 근대 이전의 유적지만 약 85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제주목에 사찰이 총 15개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도 총 22개의 사찰에 대한 기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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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총이나 활 또는 길들인 매나 올가미 따위로 산이나 들의 짐승을 잡는 일. 제주민들은 정착 생활을 하기 전부터 그리고 농경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衣食) 해결을 위해 수렵을 생활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토양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첨두기(찌르개)와 석촉 등은 신석기시대부터 창과 화살을 이용해 수렵 생활을 했음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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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에 있는 한라산 산신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산천단의 옛 터. 한라산 산신제의 내력을 살펴보면, 옛날에는 명산대천에 제 드리는 일을 아주 중요한 국사로 삼아 모든 산천을 하나하나 등재하고, 격식을 갖추어 『오례의』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한라산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에 1703년(숙종 29)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조정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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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있었던 포구. 어등포는 지금의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한갯목’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다. 어등포는 조선 후기에 어등포리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좌읍 행원리를 두고 어등개라고 한다. 그렇다고 행원리의 마을에 어등개라는 포구나 지명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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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제주목사 이형상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영천 출신으로 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제주에 만연한 음사를 철폐하고 심방들을 귀농시키는 등 개혁적인 여러 일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제주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영천 이목사」는 이형상이 제주목사 시절의 여러 가지 행적이 후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전설화된 것으로 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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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던 조선 시대의 사당. 영혜사는 조선 중기인 1669년(현종 10) 제주목사 이연이 제주목사 출신의 유학자들을 배향하기 위해 귤림서원 동쪽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에는 이약동·이회를 배향하였는데, 1819년(순조 19) 제주목사 조의진의 유장(儒狀)에 따라 이형상과 김정을 배향하였으며, 1831년(순조 31)에는 제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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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죽성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 제주 지역의 신당은 흔히 본향당, 일뤠당, 여드레당, 해신당으로 나누는데, 그 중 본향당은 마을 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성소로 마을굿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본향당 당신은 마을 공동체의 신인만큼 마을 사람 전체의 생명과 건강, 사업 번창 등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본래는 모든 자연마을마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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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행해지는 전통 혼례에서의 한 절차. 육지의 전통 혼례의 대례와 유사한 절차이다. 일반적으로 제주의 혼례에서는 대례과정이 없다. 극히 일부에서 ‘올리친심’(올히친심, 오리친심)이라 하여 간소화된 대례 과정을 올렸다. 올리친심의 어원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천생연분을 뜻하는 오리를 들고 간다는 뜻의 ‘오리’와 혼인식을 뜻하는 ‘친심’이 합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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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의 끝자락,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용연을 만난다. 용연은 용두암에서는 약 200m 떨어진 한천 하류에 있는 맑은 못이다. 예부터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통하는 길이었다는 이 용연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 북쪽에서 발원하여 오등동, 오라동을 거쳐 용담동의 동서한두기 사이의 바다와 이어지는 한천 하류로 전형적인 건천이지만, 사철 용천수가 풍부하고 만조시에는 해수가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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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용연 계곡에서 개최되는 문화예술 행사. 용연은 용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예로부터 가뭄이 극심할 때 기우제를 지낸 신성한 곳이기도 하며, 신제주·구제주 목사와 판관이 교체되는 송구영신의 잔치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음력 7월 기망일(旣望日) 달빛이 교교하게 용연을 비추면 옛 선비들은 용연에 배를 띄워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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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용연 일대 해륜사(海輪寺) 터에 있는 사찰. 제주시 용담동 용연 인근에는 속칭 절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13세기 경 창건된 고려시대 사찰 해륜사가 있었다. 해륜사는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 1702년(숙종 28) 제주절제사로 부임했던 이형상 제주목사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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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대에 보급된 유학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유교는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생활 윤리로 자리 잡았지만, 제주 지역에서는 무속 신앙 때문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이형상(李衡祥)[1653~1733] 같은 적극적인 제주목사들의 활동에 힘입어 지방 유림들은 점차 자신들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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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옷을 입는 생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옷을 입고 생활한다. 그러므로 의복은 기후나 풍토 같은 자연 환경에 적합한 형태를 띠게 된다. 또한 일의 성격, 도덕적 기준이나 미적, 정치적 관념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치 등의 사회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신체를 장식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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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고, 아버지는 이주하(李柱厦)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후 제주의 전통 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시키는 데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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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형상을 기리는 비. 이형상 기념비는 1702년(숙종 18) 6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703년(숙종 29) 6월에 파직된 이형상(李衡祥)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제주에 부임했던 이형상은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하고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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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숙(大叔). 아버지는 이광하(李廣河)이다. 1702년 알성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1703년(숙종 29) 6월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애매헌(愛梅軒) 동쪽에 청심당(淸心堂)을 건립하였다. 청심당은 영조 때 세병헌(洗兵軒)이라고 불렸다. 또한 해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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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무속 신앙이나 불교가 성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어. 제주의 마을은 농경, 어로 등의 생업을 서로 돕는 생산 공동체이며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공동 작업의 안전·번영을 기원하는 무속적 의례를 공유하는 신앙공동체였다.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 이념에서 보아 민간신앙인 무속이 얼마나 생활 속에 뿌리내렸는가를 나타내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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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역에서 예로부터 소금을 제조하던 기술.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천일염전 방식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데, 이 방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강우량은 적고 기온은 높고 습도가 적어 증발이 잘 되는 지역이어야 한다. 이에 알맞은 지역으로는 지중해 연안·인도 서부·오스트레일리아 서부 등이 있으며,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방식으로 제조된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한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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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련 1동에 있는 당유자, 병귤, 산귤, 진귤 등 4종류 6그루의 재래종 감귤 나무. 제주 도련동 귤나무류는 수령 100~200년, 높이 6~7m의 당유자, 병귤, 산귤, 진귤 등 4종류 6그루로 제주 재래종 감귤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1973년 4월 3일 당유자나무 2그루, 산귤나무 2그루, 병귤나무 2그루 등 총 6그루가 제주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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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 있는 탐라국의 신화와 관련된 유적. 제주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씨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梁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신화가 전하는 3개의 구멍이다.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제주 삼성혈의 성역화는 1526년(중종 21) 이수동(李壽童) 제주 목사가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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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2동 한천(漢川) 가에 있었던 내왓당[川外堂]의 무신도. 모두 10폭으로 되어 있으며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로 32㎝, 세로 62㎝의 한지에 그려진 무신도 10폭은 모두 소나무 판자에 붙여져 있다. 모두 진채 물감으로 그려졌으며, 각 폭마다 신위 1위(位)씩을 앉은 자세로 그려 넣었다. 무신도 10폭 중 남신도(男神圖)가 6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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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던 옹기. 단벌소성으로 완성되는 그릇으로 음료수·생활용수·곡식·씨앗 등을 보관하던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유약을 칠하지 않은 옹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유약을 칠한 옹기들도 있다. 노랑그릇, 검은그릇, 옹기, 도기, 지새그릇, 토기 등이 있다. 『남사일록(南槎日錄)』에 수록된 1488년의 최부(崔溥)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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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최고의 경승지가 어디냐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제주도 전체가 빼어난 경승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선인들은 제주를 대표할 만한 경승지와 경치를 선정하여 이름을 짓고 철따라 두루두루 찾아다니며 칭송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것들은 변함없이 제주를 대표하는 경승지이다. 특히 조선 말 제주도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한우(李漢雨)는 제주에서 경관이 특히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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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 그래서 제주도를 오름의 왕국이라 부른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할 만큼 오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각각의 오름마다에는 제주 사람들의 얼과 혼이 서려있다. 오름은 마을을 잉태하고 목축업의 근거지가 되고 제주 개벽의 신화를 창조하고 항쟁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생식물의 보고이자 지하수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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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조선 중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 시설. 조천진은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하나이다. 조천(朝天)은 조선 초기부터 조천방호소와 조천포수전소가 있던 방어의 요충지였는데, 처음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선조 때 개축하였다. 고서의 기록을 통해 조천은 천자의 나라에 조회하러 나간다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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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세계, 또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일체의 활동. 교리가 경전으로 출판되고, 의례 체계가 표준화되며, 종교 지도자의 재생산 구조와 지도자와 일반 신도의 결합 구조가 공식 조직(formal organization)의 형태를 띠게 될 때, 보통 ‘종교’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부를 때는 바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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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지역의 지방관이 왕에게 의례적으로 바친 특산물. 진상은 원래부터 납세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 도(道) 단위로 지방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주·현에 그 부담이 배정되었고, 이것이 다시 각 민호에 배정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의 진상물 품목으로는 말·귤·전복·버섯·한약재 등을 들 수 있다. 『탐라지』(제주목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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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조선 중기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 시설. 차귀진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 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1652년(효종 3) 이원진 목사가 차귀도를 의지삼아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설치했다. 제주의 9진성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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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판매·배포의 목적으로 간행된 문서나 사진·회화 등의 저작물. 저작자나 출판사가 지식이나 정보·사상·감정·문화 등의 정신적 내용을 문자나 도형 등으로 기호화하고 처리해서 그 메시지를 도서 또는 서적이라는 인쇄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 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그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적, 경제적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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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제주목에서 작성한 제주목 관아 시설 배치 상황 등이 나와 있는 지방 관찬문서. 편자 및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뒷표지 뒷면에 ‘제주 탐라방영총람 관덕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목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수령을 보좌하는 육방 관속이 작성하여 신임 수령이 부임해 왔을 때, 해당 사항별로 수령에게 설명하거나 혹은 수령이 소속 읍을 순행할 당시에 향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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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부력(浮力) 도구. 1702년(숙종 28)에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나오는 해녀들의 작업 장면에는 테왁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테왁은 조선 시대 제주 지역에 널리 보편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왁은 테를 두른 박이라는 뜻의 테박에서 ‘ㅂ’탈락 현상이 일어나 테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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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던 제사. 한라산 산신제는 고려 시대부터 음력 2월에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북쪽에 마련된 단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뜻으로 드리던 제사였다. 그러나 겨울 산을 오르다가 사람이 죽는 등 사고가 잦자 조선 전기에 제주목사 이약동이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지금의 산천단에 묘단을 건립하고 산신제를 봉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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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있었던 포구. 함덕포는 그 당시 함덕리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이 포구를 두고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과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는 함덕포(咸德浦), 그리고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는 강림포(江臨浦)라고 하였다. 강림포는 강녕개의 한자어다. 지금 조천읍 함덕리 2구에는 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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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터. 해륜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억불 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가 1702년(숙종 28)에 제주절제사 겸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해륜사와 관련해 “주성(州城) 동쪽에 만수사(萬壽寺)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海輪寺)가 있어서 각각 불상은 있으...